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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명수의 강 (묵시22:1-5)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11-25 조회수245 추천수0 반대(0) 신고

 

 

 

계시록22장 : 영원한 영광의 나라 - 영원자복의 하나님 나라와 묵시의 신실성(1)

 

공동번역성서

 

생명수의 강  

 

(묵시22:1-5) 

1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2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3 이제 그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가 그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시간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 하느님의 백성, 교회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번 본문인 요한 묵시록 21장 후반부를 통해서 장차 올 그 나라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처럼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본 것입니다. 아울러 그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보석 같은 삶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 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면 그 새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요한은 오늘 본문의 묘사를 통해서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의 생명은 바로 생명수의 강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聖徒들의 생명의 근원은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이 장면을 구약의 어디에선가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동산 중앙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던 곳이 어디입니까? 에덴동산, 그리고 또 한군데 있습니다.
에제케엘서 47장에 보면 하느님의 영광이 돌아, 온 새로운 성전에서 물이 흐르는 장면이 나오지요?


(에제47:1) 1 나는 다시 그분에게 이끌리어 성전 정문으로 가 보았다. 그 성전 정면은 동쪽을 향해 나 있었는데,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에서 뻗은 선을 타고 흘러 내려 갔다. 


그러니까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회복된 에덴과 하느님의 영광이 돌아 온 새 성전이 성도 안에 구현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성도는 단순히 구원받은 한 개인일 뿐 아니라 회복된 하느님 나라를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그림자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제키엘서에서는 성전에서 물이 흐릅니다. 오늘 본문1절에서는 그 생명수의 강이 하느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지요? 우리가 지난 주 본문에서 성전은 곧 누구이셨습니까?


(묵시21:22) 22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누구입니까? 하느님과 어린양입니다. 그러니 에제케엘서 47장1절이 오늘 본문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배우신 것들을 머릿속에 잘 떠 올려 보셔요. 제가 새롭게 창조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충만하게 흘려 보내주시는 생명력을 무엇이라 한다고 했습니까?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원래 차단되었던 것을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부어주시는 생명력을 성경은 ‘바라크’‘복’ 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그 영원한 나라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바라크’ ‘복’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수의 강 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이미 이 땅에서 그 ‘복’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산상수훈 팔복이 나옵니다. 그 팔복이 전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카리오이’‘복 있는 자여!’라고 시작됩니다. 그 산상 수훈의 팔복은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삶 이 이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보여 지는가를 설명하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 이미 영적으로 그 새 하늘 과 새 땅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미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흘러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성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미 이 땅을 살고 있는 성도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존재하는 우리 성도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이미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말인데 그 생명수가 도대체 뭡니까? 그리고 그 생명수는 어떻게 다시 우리 성도들에게 부어지게 된 것이지요? 답은 ‘예수‘입니다.


(요한4:10-15)  10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시자 11 그 여자는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12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마셨고 그 자손들과 가축까지도 마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시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13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하셨다. 15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그 샘물을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잘 보면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명수와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는 생명수가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하는 샘물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달라고 하는 샘물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우물에서 나온 기적 같은 세상의 물이었습니다.
오늘 날 교회들의 모습이 꼭 이 사마리아 여인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수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그 예수님에게 자기 육신의 목을 축일 기적 같은 물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께  ‘주여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엉뚱한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그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생명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 여인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서 자기 목을 축이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이게 바로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흐르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 물동이를 들고 ‘이 물동이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기적 같은 물을 채워주세요‘ 라고 징징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인 물동이를 버리고 예수라는 그 참 생명수를 세상에 소개하고 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영생(신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1요한5:11-12)11 그 증언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당신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하느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1:3-4)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생명은 오직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 안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성도들은 세상이 아닌 오직 예수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달마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지 그 예수를 이용해서 내 육신의 목을 축이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온유, 절제, 자비...)
그 생명수가 어떻게?  우리에게 다시 십자가로 주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 그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땅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삶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이 산상 수훈에 나오는 팔복을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팔복은 ‘이렇게 살면 복 받는다’가 아닙니다. 이 팔 복은 ‘복을 받은 자들은 이렇게 살게 된다.‘를 보여주는 것이 팔복인 것입니다.  ‘복 받은 사람, 생명수를 마신 사람들은 이렇게 살게 된다.’가 팔복인 것입니다.
잘 보세요. 그 하느님의 보좌로 부터 흘러 나와 우리에게 부어진 생명수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지요.


(마태5:3-12)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7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0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언뜻 봐도 이건 우리의 기대와 너무 다르지요?
먼저 3절을 보면 주님께서 ‘복이 있는 자는(생명수를 가진 자는) 心靈이 가난하다‘ 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자리하실 수 있도록 내 마음에 있는 세상의 욕심과 야망들을 버리는 것 입니다. 
세상의 것이 비워지고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바로 심령의 가난이며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진짜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복 있는 자는 애통하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애통‘’펜데오‘라는 단어는 억울 함에 대한 애통을 말합니다. 복을 받아 구원을 얻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면서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처사를 감당해 내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우리가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가 손해보고 내가 양보하고 내가 져 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펜데오‘’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복 있는 자는 온유하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溫柔하다‘라고 번역이 된 ’프라우스‘라는 단어는 단순히 ’성품이 온순하 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프라우스‘라는 단어는 ’프로슈케‘’하느님께 기도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지금 현재 세상의 환경이나 처지를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出埃及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골고루 나누어 갖습니다. 

그런데 언제 그 땅을 나누었습니까? 가나안을 정복한 뒤에 나누었습니까?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나누어 갖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는 자신들의 대적들이 우굴 거리고 그 대적들은 이미 철 병거를 가진 철기 문명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청동기 문명을 살고 있는 오합지졸 이스라엘이 어떻게 공격도 안 해보고 그 땅을 미리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까? 자기들의 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있고 여러분의 생명을 그 분께 걸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승리의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企業으로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는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義에 주리고 목이 마르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고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욕구가 ‘의’ 로 향해 있습니다. ‘의’라는 것은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열심히 기쁘게 수행하는 것을 ‘의’‘짜다크’라 한다고 했지요? 성도가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복을 받게 되면 그 의에 대한 욕구, 다른 말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무엇일까? ‘가 그의 욕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상 적인 욕구를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다섯 번째로 ‘복을 받은 자는자비롭다.’라고 합니다. 자비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죽이시는 그 자비와 사랑을 ‘자비‘’엘레에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는 성도는 그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이웃을 대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역시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가리켜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지요.
여섯 번째로 ‘복 있는 자들은 마음이 淸潔하다‘라고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비워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 부패성 이러한 것들을 비우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 죽이기를 열심히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일곱 번째로 ‘복 있는 사람들은 이웃을 和平케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평화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예수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절대 평화케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열케 하고 다투게 하는  자가 되지요. 평화케 하는 자들은 그들이 상대방의 아래로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 서 힘이 듭니다.
여덟 번째로 ‘복이 있는 사람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힘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 받은 사람, 생명수의 강이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 팔 복을 다 합쳐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복을 받고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十字架’를 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지금 이 팔복을 들으시고 ‘그게 뭐가 천국이야. 난 그럴 거면 천국에 안 살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국에서도 여러분이 핍박을 받고 늘 남에게 당하고만 살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죄인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그 삶 속에서 죄인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면 거기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워내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이 天國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땅에서 그 삶을 훈련하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땅에서 이성을 간직한 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으로 살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이런 생각 해 보셨어요?  만일 우리가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래도 우리는 더 갖고 싶고 더 유명해 지고 싶어 할까요? 

그 때는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이 적고, 내가 덜 유명하다는 기준을 내릴 상대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적다, 많다‘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모두가 내 옆 사람과 비교해서 내리는 결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많이 갖고 더 유명해지려고 하는 그 욕구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 보면 결국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이겨서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 나를 과시하려는 ‘죄’인 것입니다. 그 것을 세상의 ‘힘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새 사람들은 세상 것을 자꾸 포기하고, 양보하고, 져 주면서 그 ‘힘의 원리‘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의 원리를 벗어나서 나 말고 하느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십자가’라는 삶을 이 땅에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받은 자들의 삶은 고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겠습니까? 하느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하실 수 없으셨나요?  하느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떤 삶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그림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할 것입니다.

 ‘힘이 최고야, 예수 잘 믿으면 그 힘을 주셔, 그러니 십일조 떼어먹지 말고 열심히 해, 봉사 열심히 해, 집을 팔아서라도 건축 헌금 해봐.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에게 몇 배로 그 힘을 불려 주실 거야’  그건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절대 넘어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이 바로 그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잘 보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마귀에게 데리고 가십니다.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생명수를 마시게 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복 받은 자들을 마귀가 어떻게 미혹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하지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성당에 와서 온통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의 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그걸 우리는 불신자라 부릅니다. 어떤 힘센 초월자의 힘을 빌어서 자신에게 기적처럼 이 세상의 ’빵‘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의 소원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시험하는 마귀에게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잘 보세요. ’나는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 가 아닙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입니다. 그 것은 예수님은 지금 모든 성도들을 ‘대표해서’ 그리고 ‘대신해서’ 시험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신명기8장 3절을 인용하셔서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신명기 8장 3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그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단지 그들의 배를 불리는 음식으로 주신 것이 아니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는 양식 으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음식과 양식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음식은 내 배를 불리기 위해 그 때 그 때 먹는 먹거리를 음식이라고 합니다. (밥, 김치찌개, 국 이런 것들이지요) 그러나 ‘양식‘은 ’사람이 그 것을 바탕으로 어떠한 목표 지점으로 갈 수 있도 록 해 주는 힘‘을 말합니다. 


예전에 한국에 보리 고개가 있을 때에 광에다가 쌀 두어 가마니를 척 쌓아두면 온 식구가 겨울을 날 힘을 얻었습니다. 그 것을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헬라어는 전자를 ’프롭페‘라고 하고 후자를 ’브로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개혁 성경에는 그 두 단어를 혼용해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 분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그들이 광야에서 쏟아지는 만나를 보고 ‘이런 하느님이라면 우리를 반드시 저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 실 것이다’라는 힘을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지 음식을 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음식도 하느님께서 주시지요. 그러나 음식은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길에 우리의 생존을 위해 주어지는 것 이지 그 것이 생의 목적이 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만나를 ’음식‘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음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만나를 음식으로만 보니까 불평 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부추와 마늘과 고기도 먹었는데 왜 여기서는 맨 날 만나만 먹어야 하나?‘ 

그래서 신명기 8장 에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빵’을 위해 살고 오직 ‘빵’을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에 우리가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빵’이 조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하느님 앞에 광주리 들고 가서 ‘빵’만을 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세상의 빵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의 내용이신 ‘예수’를 힘 삼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6:27)  27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주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네 힘으로 너를 증명해 보라‘는 시험입니다. 그게 마귀의 세력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그런 힘이 있으신 분이시지만 거절하십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마귀는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절하면 이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거부하십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는다고 성당에 와서 세상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은 전부 마귀에게 경배 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것이 없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나에게 없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보다 세상의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우리 의 죄 된 모습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수를 이미 마신 분들입니다. 그 들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 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그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구유에 오셨는지 아십니까? 왜 그렇게 못 생긴 모습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가셨는지 아세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외형을 보고‘난 당신의 백성입니다’라고 따르는 자들이 없도록 하 기 위해서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진짜 하느님의 백성들을 가려내기 위해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황제로 오셨다면 이 세상 전체가 그 분을 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가지신 힘과 재물을 쫓는 것이지 영원한 생명수이신 구세주를 따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느님의 백성들만 그 예수의 초라한 모습 속에서 생명수를 발견해 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그들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눈에 보이는 번영과 행복이 찾아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일을 하신다면 누구나 다 예수를 믿겠노라고 나설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짜 하느님의 백성들을 골라 내시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 십자가를 걸림돌로 두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쫓는 자들은 모두 그 십자가라는 걸림돌 에 걸려 넘어져 버립니다. 

가짜들은 십자가 앞에서 이내 포기합니다. ‘이게 무슨 복이야? 난 안가’  오직 하느님이 택하신 하느님의 백성들만이 그 십자가를 묵묵히 통과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느님의 별이 동방박사들을 헤로데의 宮으로 데리고 갔을까요? 하느님은 그 동방 박사들로 하여금 세상에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하느님께서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인도했던 것이라면 그 별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갔어야 지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 별을 헤로데의 궁으로 끌고 가십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유대인의 왕 헤로데의 궁에 가서 다른 왕을 찾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서 동방 박사들을 통해 이 세상의 왕, 이 세상의 힘을 부정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 세상의 힘이 진짜 힘이 아니라 비록 구유에 놓였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 삶이 바로 진짜 힘이며 진짜 왕의 삶 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의 원리에 의해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은 완전히 잘 못된 세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오시자마자 세상 힘의 상징인 헤로데  왕의 정체가 잔인하 게 폭로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들까지도 서슴없이 죽여 버리는 그러한 세상의 정체가 예수 앞에서 폭로되는 것 입니다. 아울러 하늘의 왕 노릇 할 사람들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세상 왕들에게 핍박받고 쫓겨 다니는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을 암시하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인 것입니다.


(미가5:1-2)  
1 그러나 애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 간다. 2 그 연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돌아 오면, 


이 말씀을 의역을 하면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칠 분이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을 다스리시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미가는 이제 베들레헴에서 다시는 이스라엘이 그러한 심판에 놓이지 않게 하실 한 왕이 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재판 자들이 세상의 힘의 원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등장하여 이 세상의 다스림 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원리로 세상을 다스려서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실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재판자의 뺨을 치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재판 자가 누구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가 3장에서 그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어떻게 표현을 하는가 보세요.


(미가3:9-11)  1 그러나 애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 간다. 2 그 연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돌아 오면, 


종교 지도자들이 돈을 받고 재판을 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해서 교훈을 하고, 예언자는 돈을 위해서 점을 치면서 야훼가 우리와 함께 하시니 절대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지도자가 돈을 보고 축복하고, 돈을 위해 예언을 해 주고, 헌금을 많이 내면 잘 산다고 가르치고, 봉사를 열심히 하면 하느님께서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잘 산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자들의 뺨을 갈기기 위해 예수를 베들레헴의 구유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그게 정말 승리의 모습으로 보입니까? 그게 정말 세상의 뺨을 치는 모습으로 보이나요? 그러나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가 승리이고  그 십자가의 삶이 세상의 뺨을 치는 모습이라고‘
여러분, 예수께서 탄생하시고 헤로데가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하지요?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원래는 ‘내 아들을 애굽으로 불러 들였다’가 맞지 않습니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애굽은 지리적 의미의 애굽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 다른 말로 세상 왕이 다스리는 곳을 ‘애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의 원리가 지배하지 않는 모든 곳을 ‘애굽’이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애굽’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탈출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끊임없이 그 출애굽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출애굽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루가 2:34-35)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어두움들이 드러나 버렸기 때문에 그 분은 늘 세상의 어두움들로 부터 비방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분의 삶이 표적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성도의 삶이 그러 한 삶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어두움이 드러나고 그들이 정죄를 받아 여러분을 미워하는 그 십자가의 삶이 여러분에게서 나오고 있습니까?


 (고전4:9-13)  9 내 생각에는 하느님께서 우리 사도들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여기시고, 그들 중에서도 맨 끝자리에 내세워 세상과 천사들과 뭇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신 것 같습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자이고 여러분은 강자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는데 우리는 멸시만 받습니다1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집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12  그리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고 우리가 받는 박해를 참아내고 13 비방을 받을 때는 좋은 말로 대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고 있습니다. 


(히브10:32-35) 
 32  여러분은 처음에 빛을 받고 나서 많은 고난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견디어 내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33 여러분 주에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된 사람들도 있고 그런 형편에 빠진 사람들의 친구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34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동정했고 또 자기 재산을 다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일을 기쁘게 당했습니다.  35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념을 버리지 마시오. 그 신념에는 큰 상이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 생명수의 강을 소유한 자들의 삶은 이 억지뿐인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성품과 그 분의 영광을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하는,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달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힘이 든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힘내십시오. 그 십자가 너머에 우리 하느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록 지금은 그 십자가 너머의 세 상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그 길을 가십시오. 그들이 진정 그들의 속 에 생명수의 강을 소유한 자들이며 그들이 결국 영원한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3,4,5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묵시22:3-5) 
3 이제 그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가 그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5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여러분이 가야 할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눈을 들어 이곳을 바라보십시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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