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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들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이었는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05 조회수378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예전부터 내용은 아주 간단하게 잘 아는 내용이지만 복음의 숨은 깊은 뜻을 논리적으로 이해를 하려면 상당히 복잡한 내용이 숨어 있습니다. 서너달 전에 우연히 이 복음의 내용에 대해 이웃 본당에서 저녁 미사를 봉헌할 경우가 있었는데 그날 그 본당 신부님께서 이 복음에 대해 자세하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미사 때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평소에 의문을 가졌던 복음인데 명쾌하게 순간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순간은 이해가 됐는데 미사가 끝난 후에는 또 개념이 불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여러 차례 이 본당에서 새벽미사를 드렸고 간혹 미사를 봉헌하기에 신부님과는 이미 안면이 있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같은 종씨입니다. 아무튼 그때 사실 왜 기뻤는가 하면 제가 가진 의문점에 대해 많은 책과 인터넷을 검색해도 자료를 찾을 수 없었기에 마침 신부님의 복음 해설이 마치 단비처럼 느껴졌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 언제 다시 한번 신부님께 부탁을 드려 설명을 듣고 진지하게 묵상한 자료를 올릴 기회를 가져보겠습니다. 실제 이 복음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면 상당히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보기엔 쉬운 것 같은데 깊이 들어가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늘상 이 복음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믿음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 2일 금요일 복음을 잠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눈먼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에서 치유가 이루어지는 내용의 복음입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눈먼 사람이 치유가 된 것입니다. 영어 성경의 뉘앙스를 자세히 보면 우리말 성경의 뉘앙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쉽게 전달하면 이렇습니다. 여기엔 계산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믿는 만큼 그 만큼의 크기로 치유가 이루어진다는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30프로 믿으면 30프로 정도밖에 치유가 되고 완전히 믿으면 완전히 치유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바로 단어 하나의 뉘앙스 때문에 이런 것입니다. 그 단어는 아주 간단한 단어이지만 그 단어의 특유한 뉘앙스를 읽지 않으면 이런 내용을 캐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이런 관점에서 이해를 한다면 조금은 다른 내용이 하나 첨가돼 있습니다. 금요일날 복음은 치유 당사자는 본인이었습니다. 오늘의 치유 당사자는 제 삼자입니다.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를 들어 하혈하는 여인의 일화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 내용의 복음도 금요일 복음의 내용과 같은 의미의 복음이 돼야 전체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일관성이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이 다른 복음과 이런 부분에서는 이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 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그들의 믿음에서 언급하신 그들의 믿음이 과연 어떤 믿음이었길래 죄의 용서도 받게 되는 믿음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깊은 내용은 다시 신부님께 전해듣고 정리할 기회가 있을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좀 더 색다르게 묵상하고자 합니다. 물론 치유자 입장에서는 그들이 제 삼자이긴 합니다만 그들 각자를 1인칭 시점으로 바라보고 즉, 다시 말해 우리 개개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신앙의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믿음을 한번 해석하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을 위해서도 신앙을 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타자를 위해 하는 것도 우리 신앙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 2계명과도 같은 이웃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중풍 환자를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의 곁으로 들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해도 대단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더구나 다른 이를 위해서 해 주는 일에 장애가 생겨 그 장애와 맞써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께 데리고 가려고 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말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셨을 때 얼마나 가상한가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의 믿음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으셨을 것 같다는 묵상을 해봅니다. 저는 사실 이 부분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집중적으로 새벽부터 묵상한 내용이지만 이걸 말로 전달하면 단순한데 글로 표현하려다 보니 아주 길어졌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믿는다는 동사의 명사형이 믿음이 아닙니다. 문법적인 내용은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은 믿음을 믿음이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바로 단순히 믿는 걸 넘어 어떤 장애를 극복해 그걸 초월했을 때 그때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그나마 믿음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도 그랬고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도 그랬습니다. 이런 일련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믿음을 새롭게 다시 한 번 더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수준은 아마 초보자의 믿음이 될 것 같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난관이 있다고 해도 그 난관에 좌절하지 않고 그걸 극복해서 예수님께로 가는 믿음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의 믿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이런 믿음을 가져보려고 무진장 노력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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