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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을 때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05 조회수421 추천수5 반대(0) 신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을 때>

 

세속화된 사회를 설명하면서,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성당에 일생동안 3번 간다고 한다. 태어나서 세례 받을 때, 결혼식 때, 그리고 죽었을 때. 농담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 인간 삶에서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세가지는 결국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탄생과 죽음은 인간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경험들 중의 하나이다. 모든 문화의 의례에서 죽음과 탄생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어떤 사고로 거의 죽을 뻔한 경험, 사랑하는 혹은 지인의 죽음, 살인 사건,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고민 등 등. 이러한 간접적 죽음을 대면할 때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있다. 죽음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상실의 아픔 등이다.

 

세익스피어의 대표적 비극적 인물인 햄릿은 괴로운 현실을 피해서 죽음으로 가고 싶지만, 그것 마저도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죽음의 불확실성 때문에: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잠이 들면 마음의 상심도, 육신이 물려받는 수천가지 타고난 고통도 끝나는 법. . . 죽음뒤의 세상에 대한 불안, 한 번가면 두 번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미지의 나라가 사람의 결심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저 세상으로 달아나느니, 차라리 이대로 이 세상의 고통을 참고 견디게 되는 거다.” 죽음 뒤에 찾아오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들도 사실 그러한 영원한 생명이 있을까?라고 고민한다. 하느님과의 깊은 내적 일치로 유명한 소화데레사 성녀도, 사실 죽음을 앞두고 정말 죽음 뒤에 영생이 있을까라는 의심, 하느님이 계실까라는 의심 등 무신론으로 무척 괴로워하시는 모습이 일기에 남아 있다. 물론 이 일기는 성인이 돌아가시고 나서,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토록 존경받는 성인의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마치 밀린 숙제처럼 우리 삶의 한 켠에 답답함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해야 할 때, 무엇보다 상실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 비통함의 경험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겪는 비통함은 내적로 외적으로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 소용돌이는 우리가 통제하거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힘에 휘둘리면서 우리는 일상의 의미를 동시에 잃게 된다. 즐거움과 의미를 주었던 일상과 삶들의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C S Lewis는 자신의 부인을 잃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녀의 부재는 하늘처럼 모든 것 위에 드리워져 있다.” W H Auden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나의 북쪽, 나의 남쪽, 나의 동쪽, 그리고 나의 서쪽이었다. 내가 일하는 주중이었고, 쉬는 일요일 이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상실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몇 가지 단계들을 경험한다. 부정, 분노, 무기력함과 우울함, 그리고 받아들임.

 

죽음의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 죽음의 상실로 겪는 비통함 등. 죽음은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들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가능하다면 피해야 하는 그런 금기시 되어야 하는 것일까? 비록 인간의 삶을 버겁게 만드는 어두운 면들이 있긴 하지만, 인간 삶의 총체적인 시각에서 죽음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생명과 죽음이 완전히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과 죽음은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위치를 차지한다. 생명은 삶의 시작이고,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다. 즉 생명과 죽음은 삶의 시작과 끝으로서, 우리의 삶을 완성시킨다. 

 

영국의 17세기 대표적 시인인 존 던은 <수태고지와 성금요일이 한 날에 겹치는 것>에 대한 매우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전례력 상으로 드물게,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소식을 성모님께 알리는 수태고지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성금요일이 한 날에 동시에 오는 때가 있다. 1608년 3월 25일이 그러했다. 수태고지 축일은 예수님의 잉태를 기념하는 축제이다. 그러나 성금요일은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절제와 금욕의 시간이다. 축제의 시간과 금욕의 시간이 동시에 겹치는 이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잉태의 소식을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십자가 죽음을 슬퍼해야 하나? 축제를 취소하고, 죽음을 슬퍼하나? 아니면 죽음을 무시하고, 축제를 즐기나? 시인도 이렇게 헷갈리는 이 날을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리고 가버린, 축제 혹은 금욕의 혼란스러운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은 이러한 상반된 면들을 경험하고 있다. 성모님은 “아들을 약속받자 마자, 그 아들이 떠나 버렸네; 탄생의 기쁨을 만끽하자 마자, 죽음의 슬픔. 예수님은 오셨는데, 가버리셨네. 그러나 존 던은 이러한 모순되는 측면들이 좀 더 큰 문맥에서 보면, 각 각 부분들로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축약된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마치, 펼쳐진 지도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곳이 동쪽이 되는 것처럼,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와 “이제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에서의 한마디는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서로 상반된 탄생과 죽음이 동시에 하나의 이야기를 이룰 수 있을까?

시인은 교회가 수태고지축일과 성금요일을 동시에 기념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과 탄생은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하느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동시에 최후의 심판 즉 죽음과 함께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생명의 창조는 죽음과 함께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지만 동시에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떠남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보여준다. 탄생과 죽음은 그냥 우연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잘 짜여진 대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러한 총체적 현실을 보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보물을 모두 내 영혼안에 쌓아둘 것이다. 그리고 매일 그것을 꺼내어 사용할 것이다.라고 한다.

 

존 던에게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태도는 보물이다. 그리고 이 보물을 매일 꺼내어 보겠다고 결심한다. 그렇다면 탄생과 죽음을, 생명과 죽음을 매일 꺼내어 보겠다는 것, 즉 보물을 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라는 에세이에서, 공간의 시각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200년 전 독일 검은 숲에 살았던 소작농의 집을 예로 들고 있다. 이 집의 구조를 보면, 집 안에 식당 테이블 뒤에 제단이 있고, 방 안에는 아이 분만을 위한 성스러운 공간과 관이라 불리는 죽음의 나무를 위한 성스러운 공간을 만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방 안에 탄생과 죽음을 위한 성스러운 공간을 동시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집에 살았던 소작농들은 매일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보며 살았을 것이다. 충만한 삶은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을 때, 더 충만해 질 수 있다.

 

현재의 우리 삶을 보면 존 던의 시처럼 수태고지와 성금요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얼마전 이태원 참사를 겪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엄청난 상실을 겪으며 비통해 하고 있다. 동시에 교회에서는 곧 세상에 오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시인의 노래처럼, 참으로 혼란스러운 날이다. 해체주의 대표적 철학자인 쟈크 데리다는 <죽음의 선물>이라는 저서에서 죽음을 희생과 연결시킨다. 데리다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로 들면서, 우리 각자의 죽음은 내어 주는 것, 우리 자신을 내어 주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였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각 개인들의 죽음 역시 살아 남은 자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다. 그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인간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알려준다. 존 던이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서 보물인 것 처럼, 모든 인간들의 탄생 그리고 죽음을 통한 삶의 마무리는 살아 남은 자들에게 선물이요 보물인 것이다. 그 보물을 매일 살아 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신이 창조해 주신 삶의 충만성을 매일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회 김 치헌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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