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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순교 영상을 묵상해봤습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21 조회수414 추천수1 반대(0) 신고

 

 

탄생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장면으로 마무리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새남터입니다. 저도 새남터 성지는 올해와 한 7년 전쯤에 가봤습니다. 그날도 가려고 마음먹고 간 게 아니라 본당에 오랫동안 계셨다가 서울로 이사가신 자매님을 용산에서 뵙고 또 그분이 용산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용산성당에서 만나뵙고 우연히 성당에 성직자묘지가 있는 걸 알고 참배를 한 후에 마지막에 헤어질 때 새남터가 여기서 얼마되지 않으니 순례하고 가라고 권유하셔서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지에서 영상으로 신부님의 삶을 보고도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순교하시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신부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를 어제 오늘 많이 묵상해봤습니다. 이건 그당시 신부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그 누구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이 묵상이 신부님의 생각과 완전 배치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묵상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일 먼저 제가 만약 신부님의 입장이었다면 하는 가정하에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솔직하게 표현하겠습니다. 인간적으로 먼저 원망아닌 원망을 했을 겁니다. 여기서 원망은 우리가 아는 그런 원망이 아니라 생명을 부지하고 싶어서 하는 원망이 아니라 물론 그 대상은 하느님이겠습니다. 그냥 일반 한 이름없는 민초와 같은 백성으로서의 신자였다면 그런 원망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기서의 원망은 이렇게 순교할 것 같으면 그것도 짧은 기간 사제로서의 삶을 살고 삶을 마감한다고 했을 때 그동안 사제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높은 산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고생고생 끝에 드디어 조선의 첫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해서 사제 한 사람의 가치를 놓고 봤을 땐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느님의 가호로 신부님 당신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지켜주실 수 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한 번 더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면 고작 1년 남짓 사제로 살게 하실 것 같으면 왜 이런 길을 가시게 길을 열어놓으셨는지 하고 원망아닌 원망을 충분히 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당시 신부님의 마음은 어느 누구도 모르긴 합니다만 만약 여기서 설령 그런 생각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건 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상황에 우리가 쉽게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쉽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순교하실 게 정말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신앙, 믿음의 가치와 시간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짧게 굵게'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요즘 시대는 흔히들 이제 백세 시대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백세시대라고 해서 백년을 산들 그게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인간적으로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죽음을 거부하려고 하는 본성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좀 더 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사람의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까요? 약간은 신앙 안에서는 조금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신앙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신앙인이라고 해서 일반사람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 오산일 수 있습니다. 저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모름지기 신앙인이라면 모든 걸 신앙의 눈으로 바라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은 쉬울 수 있지만 쉬운 게 아닙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신부님의 삶을 하느님과의 어떤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다시 바라본다면 신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그당시 신부님의 순교에 대해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순교를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하느님을 비웃기라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이런 논리를 내세울지도 모릅니다. "봐라, 만약 천주님이 계신다면 당신네들이 그렇게 염원하고 바랬던 사제가 탄생했는데 이렇게 죽게 내버려둘 수 있는가?" 하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여러 사제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어렵게 나온 사제를 이렇게 쉽게 죽음의 길로 간다면 당신들이 믿는 그런 천주님을 과연 천주님으로 모실 가치가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면 말입니다. 바로 이런 시각이 믿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충분히 그들은 그렇게 말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눈으로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시대의 우리 신자 중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잠시 서두에 말씀드린 표현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어렵게 어렵게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생각은 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분명 힘들게 간신만고 끝에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원망 아닌 원망도 나약한 인간의 생각으로는 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와 같은 생각을 김대건 신부님은 하시지 않으셨을 거라고 단언합니다. 제가 이렇게 단언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마카오로 유학가서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기까지의 그 여정을 생각해보면 이미 그 여정 과정에서 그와 같은 인간적인 생각은 초월할 수 있는 믿음과 신앙의 눈을 가지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부님의 순교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봐야만이 우리의 내면에 신앙과 믿음을 신앙이라는 토대 위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시간이 덧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냥 시간 흘려보내기 식의 신앙은 비록 그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었다고 해서 그게 자신의 신앙을 대변해주는 구심점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 대한 반증이 바로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으면 그 시간만큼 신앙의 성숙도가 비례하면 그 말이 맞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물론 아주 드물긴 드물지만 신앙생활 기간에 비례해서 자신의 신앙이 성화되는 분도 있긴 하지만 보통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까지 말씀드린 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신부님의 순교와 관련해서 그걸 우리의 신앙에 한번 접목해서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당시 시대적인 배경에서 신부님께서 그렇게밖에 순교하시지 않으면 안 될 하느님의 뭔가 섭리가 작용됐다면 그 섭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분명 그렇게 허망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게 됐다면 그건 우리가 아는 그런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은 분명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 땐 정말 아까운 한 사제의 죽음이지만 그 사제의 죽음이 이 땅에 신앙의 밀알이 되게 하시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거대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도록 하신 게 바로 하느님의 섭리이지 않았을까 하는 묵상입니다. 만약 이런 추론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없는, 또 이해가 되지 않는 크고 작은 십자가가 항상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물론 그게 십자가이지만 우리는 그 십자가를 단순히 십자가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쳐서 신앙 여정의 길을 끝까지 완주하기 힘들 것입니다. 

 

십자가가 십자가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는 신앙인의 눈을 가질 수 있도록 신앙의 내공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그 여정을 함께한 사람에게만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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