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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9 목요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28 조회수271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3-11
사랑하는 여러분,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5

하느님의 사랑이란 표현은 요한 1서에 여섯 차례 나온다. 이는 주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2.5의 경우,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뜻한다고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두 설을 합쳐서,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이라고 보는 설, 곧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적 사랑이라고 보는 제3설도 있다.

 

그럼 어느 설을 따른다? 표현과 내용에 있어 2.5와 가장 밀접한 4.12를 눈여겨보면, 2.5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5를 윤색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2.5를 윤색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느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결실(완전)을 맺게 된다. 본디 사랑은 받고 주는 것, 교호작용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요,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6

5ㄷ절의 하느님 안에 있음6ㄱ절의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음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내밀한 관계를 가리킨다. 쉬운 표상으로, 보면 되겠다. 동서고금의 신비가들이 흔히 말하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뜻하지 않고 내밀한 친교를 뜻한다. “...안에 머물러 있음은 요한 1서에 열네 번, 요한복음에 열 번 나오는데 용법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음: 1요한 2.6; 3.24; 4.13; 16

그리스도인인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음: 1요한 2.27.28;3.6; 참조; 요한 6.56;15.4.5.6.7

그리스도인이 예수와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음: 1요한 2.24

하느님이 그리스도인 안에 머물러 있음: 1요한 3.24; 4.12.13.15.16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머물러 있음: 요한 6.56;15.4.5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음: 요한 14.10

 

예수께서 거니신 것처럼 그도 그렇게 거닐어야 합니다의 취지인즉, 예수의 역사적 생애가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삶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상 또는 이 사상의 변조가 2.27;3.3.7;4.17에 있다. 바오로와 바오로 학파의 경우, 같은 사상이 1고린 11.1; 로마 15.2-7;에페 5.1-2에 나온다.

 

7

사랑하는 여러분호칭은 3.2.21;4.1.7.11에도 나온다.

 

8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형제애를 명하면서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셨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되 예수께서 자기네를 사랑하신 것처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처신을 본보기로 삼을 일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어떻게 처신하셨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최후만찬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식으로 형제애를 실천하여 마땅하다. 예수식, 이 점이 새로운것이다.

 

8ㄴ절을 직역하면 그것은 그분 안에. 그리고 여러분 안에 참됩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이미 실천하셨고 요한계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실천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복음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5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정결례-속량

22.24절에서는 정결법을. 22-23절에서는 속량법을 다룬다. 여기 정결법은 다음과 같다. 남아를 낳은 산부는 40일간, 여아를 낳은 산부는 80일간 불결한 것으로 여겼다. 남아의 산모는 40, 여아의 산모는 80일이 지난 다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가세가 가난한 때는 제물로 비둘기 한 쌍만 바쳐도 되었다. 이를 빈자의 제물이라 하는데 마리아도 그렇게 했다. 출산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부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요셉은

 

정결례를 치를 필요가 전연 없었는데도 그도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그 예를 행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맏아들을 속량할 때 부모나 아기가 성전에 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들이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는 것은 엘카나와 한나가 어린 자식 사무엘을 실로 성전에 바쳤다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3

출애 13.2.12.15.

 

24

레위 12.8.

 

25

즈가리야와 아리마테아의 요셉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처럼 시므온도 의로웠다고 한다. 여기 의롭고 경건하다는 다같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뜻이다. 위인 탄생에는 흔히 시므온 같은 사람이 나타나 아기의 장래를 예언하는 법. 불교의 원시 경전 숫다니파아타를 보면, 석존이 탄생하자 아시타라는 선인이 나타나 아기를 안고 샤아카 족에게 이렇게 예언했다 한다: “이 왕자님은 정각의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이분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청정을 보시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불쌍히 생각하는 까닭에 법륜을 돌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뜻과 행동이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제 여명은 중도에 저에게 죽음이 찾아 올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위로받기를은 직역하면 이스라엘의 위로를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뜻한다.

 

26

주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이다.

 

29

루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 세 편을 1,46-55,68-79;2.14에 옮겨실은 바 있다. 이 노래들은 본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노래한 것 같은데, 루카는 마치 마리아가 예수 잉태를 노래한 양, 즈가리야가 요한 출생을 노래한 양, 천사들의 예수 탄생을 노래한 양으로 꾸몇다. 이제 29-32절에 또 한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의 용어.문체.보편적 구원사상은 제2 이사야서와 매우 비슷하다. 이 노래의 출처를 정확히 밝히기란 어렵다. 다만,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두고 민족적 자부심을 지닌 교회(“당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한 교회(“뭇백성 앞에 마련하신구원.“이방민족들에게는 계시하는 빛”)에서 만들어 부른 노래라 하겠다. 아마도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의 노래였으리라.

 

주재자은 그리스어 데스포테스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생사 대권까지 쥔 절대 지배자라는 뜻이다. 29; 사도 4.24; 묵시 6.10에서는 하느님을, 2베드 2.1; 유다4에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다.

 

풀어 주다는 쉬게 하다. 죽게 하다. 두 가지 뜻이 있다.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에서 부른 노래에서는 쉬게하다는 뜻이었으리라. ,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학수고대하느라 몹시 긴장한 유다인들에게 그 일을 이룩해 주시어 이제 쉬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주인이 수직 임무를 마친 종을 쉬게 하듯,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시므온이 자기 심정을 토로한 셈이다. 늘그막에 예수님을 뵈었으니 이제 편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30

당신의 구원”. 곧 하느님의 구원은 해외 유다인 노래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읊었으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뜻한다.

 

31

이방인들도 구원의 혜택을 입는다는 보편적 구원관이 루카복음에는 여기 31-32절에 처음으로 명백히 나온다.

 

34

시므온의 예언은 유다인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역사적 체험을 참작하여 루카가 창작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다인들은 구원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멸망할 것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배척당하는 표징이 되셨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암시하는 상징이셨다. 불행히도 유다인들 절대다수는 연약한 상징만 보았지 상징의 크나큰 뜻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35

마리아가 혹독한 고통을 겪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멸망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숨은 생각, 곧 믿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36

예언자 시므온에 이어 예언녀 안나가 나오는데 루카는 종종 남녀를 차례로 등장시키곤 한다.

 

37

1세기에는 교회에서 공인한 과부단이 있었는데, 루카는 안나의 삶을 그 과부들의 귀감으로 제시한 것 같다.

 

과부 된 지 여든네 해일 수도 있고 처녀생활, 결혼생활, 과부생활을 다 합쳐 여든네 해일 수도 있다.

 

38

직역하면 예루살렘의 속량을”. 이는 이스라엘의 위로와 같이 메시아의 구원을 뜻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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