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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1-08 조회수583 추천수2 반대(0) 신고

230108. 주님 공헌 대축일.

 

“그분의 별”(마태 2,2)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이사 60,5)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벅찬 기쁨을 찾아, 동방박사와 함께 임을 찾아나서는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길’은 성경의 핵심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프란치스코 교종은 친구인 ‘한 랍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그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걸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느님을 찾으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 나서도록 허락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길을 떠난 이들’이요, 또 한 부류는 ‘길을 떠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길을 떠난 이들’은 빛을 따라나선 동방박사들과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온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멀리 하늘에서 길을 떠나온 아기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는 왕궁에 머물러 있는 이들,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빛과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일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편리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나요?
지상이 화려한 왕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아기 예수 왕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의 ‘길 떠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터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길 떠남이요, <두 번째>는 헤로데 왕궁에서 마구간으로의 길 떠남이요, <세 번째>는 마구간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떠남입니다.
 
‘길 떠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우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빛을 볼 수 있으며, 그 별을 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고 고대하는 자만이, “그분의 별”(마태 2,2)을 따라 그분을 만나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첫 번째> 길 떠남을 위해 우리는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과 위기의 십자가도 져야 했습니다. 이 길을 오면서 때로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때도 있었고, 빛을 놓치고 어둠에 쌓여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반항할 때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고, 그분이 계실만한 화려한 하려한 왕궁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는 왔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찾아 만나는 데에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빛이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를 이미 “말씀”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언자 미카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리하여, 마침내 동방박사들이 “말씀”을 따라 다시 <두 번째>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말씀을 따라’ 여행 중입니다. 잠시 착각하고 머문 허황한 왕궁인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여 갑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 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은 곳, 마구간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비로소 ‘참된 빛’이 낮게 엎드린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 낮아져 예물이 되면, 우리 안에 참 빛이 들고, 우리 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번째> 길을 떠남이 바로 오늘 주님의 공현이 우리에게 이끄는 “길”입니다.
 
이제는 빛이 되어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꾸미고 있는 왕궁을 향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과 동행하여 빛을 비추며 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의 별”(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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