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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 일(화) 연중 제1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1-09 조회수213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5-12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인간의 형제이신 그리스도

앞의 1,5-14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지위를 하느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밝힌 반면, 2,5-18은 그분과 사람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밝힌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운명에 놓는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고난과 죽음의 운명에 놓인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맛보시는 등 모든 점에서 비천한 존재인 사람을 사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구원의 창시자와 대제관이 되게 하셨다. 이 항목의 사상이나 순서는 시편 110장을 따르며, 그밖에 초대교회가 메시아 예언으로 여기던 시현 8.22; 2사무 7.14는 부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5

장차 올 세상은 모든 원수로부터 해방되는 새롭고 천상세계로서, 후기 유다교가 가르치던 메시아 왕국이 바로 그러한 세상이다.

 

6

인용문의 발설자와 책 이름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이 말씀이 널리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필로 등 당대의 저자들이 성대한 증언을 시작할 때에 옮겨 쓰던 표현이다.

 

6-8ㄱ절은 시편(LXX) 8,5-7의 인용, 시편 자체에서는 사람”,“사람의 아들을 일반적인 뜻으로, 곧 위대함과 비천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뜻으로 이 단어들을 사용하면서도 이를 참 사람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그 의미가 다르다.

 

7

시편에서는 잠시라는 말을 조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여 사람의 아들 신분과 연결시키나, 여기서는 짧은 기간을 뜻하는 시간적 의미로 사용한다. 천사들은 칠십인역의 표현이고 히브리어 원문에는 하느님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칠십인역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잠시 천사들보다 낮은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다가 다시금 영광스럽게 되셨음을 설명한다.

 

8

시편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통치권을 예수께 적용하여, 그분이 천사를 포함한 만물의 지배자이심을 밝힌다. 그러나 그분의 완전한 통치는 1고린 15. 25-28;에페 1,20-22에서도 증언하듯이 종말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9

앞의 시편 내용을 직접으로 예수와 연결시킨다. 예수께서는 육신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사라믕로 사셨고, 특히 고통을 받고 죽음까지 체험하시는 등 천사들보다 일시적으로 낮아지셨다.

 

일부 그리스어 사본과 시리아서 사본, 그리고 오리게네스. 암부르시오. 히에로니무스 등 교부들의 저서에는 하느님의 은총대신에 하느님 없이”. “하느님을 제외하고로 되어 있다. 반면에 주로 사본들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되어 있다. 문장의 내용으로 보아선 두 단어가 다 가능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많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 없이로 기록된 사본이 많다고 지적하면서도 완전한 졀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라킨 교부들과 안티오키아 교부들은 하느님 없이로 읽으면서, 이를 예수께서 하느님의 신분으로는 고난을 받으실 수 없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설한다. 일부 현대 학자들도 하느님 없이가 어려운 문장이기 때문에 본문비평의 원칙상 원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느님 없이로 읽을 경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아닌 인간으로서 희생되셨다. 하느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위해 희생하셨다. 하느님께 버림받은 듯한 상태에서 희생하셨다등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로 읽을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도와주시어 모든 사람이 겪는 죽음을 체험하게 하셨으며, 그분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과 영광이 디딤돌 되게 하셨다는 뜻이 된다. 문맥상으로는 후자가 원문일 가능성이 더 많지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10

하느님은 만물의 기원이며 최종목적이시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느님의 아들로서 만물의 기원이고 상속자이며 완성자이시다.

 

9절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동기 또는 타당성을 설명한다. “완전하게 하다는 이 구절뿐 아니라 책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어로서, 동사 형태만으로도 열네 번이나 쓰인다. 어원상의 의미는 목적으로 인도하다”,“완성으로 이끌다등이지만 예식에서는 축성하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 특이한 점은 히브리서에서는 이 단어가 항상 하느님과 관계되는 문장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사람이 윤리적으로 완전해진단느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께 접근하도록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사제로 축성하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완전하게 하셨다는 뜻이 된다.

 

11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은 문맥상 아들이며, “거룩하게 된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한 근원은 누구를 가리킬까? 창조주 하느님 일까,. 아니면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일까? 또는 신앙인들의 조상이자 그리스도의 조상이기도 한 아브라함일까? 정확히 가리기는 매우 어렵다. 문맥으로 보아서는 하느님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초대 교회는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햇기 때문이다. 또 누구를 거룩하게 하다는 하느님께 더 잘 사용되는 단어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사람의 신분을 초월하는 하느님이면서도 사람과 한 뿌리, 한 부모를 둔 형제이시다. 게다가 사람을 위해 당신 몸을 바치고 피를 흘리셨는데 그들을 형제로 대하기를 끼리고 싫어하시겠는가.

 

12

시편 22,23. 이 시편은 박해와 고통을 겪는 어느 의인이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구원을 미리 내다보고 하는 고백이다. 초대교회는 수난사화에서 보듯이 이 시편을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였는데, 히브리서도 같은 노선을 따른다. 극심한 고통을 겪고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사람들에게 나타나 당신 부활로 완성한 구원을 형제들에게 알리라 하셨다. 이 말씀에는 인간을 형제로 삼고 수난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극진한 사랑이 들어 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회당에서 미친 사람을 고치시다

1,21-39을 일컬어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 하는데, 예수님이 실제로 그렇게 하루를 보내셨다고 볼 것이 아니라, 마르코가 몇 가지 단편 사료를 모아서 꾸민 일지로 봐야 한다. 곧 사실보고가 아니고 의도적 서술이라 하겠는데, 그 줄거리는 이렇다. 앞서 선정한 네 제자를 데리고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안식일 낮에는 회당과 가정에서, 저녁에는 문 앞에서 사람들을 가르치키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이튿날 새벽에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고 이어서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그런데 그분의 가르침이 너무나 새롭고 그 치유행위가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청중과 목격자들은 놀란 나머지 이게 웬일이냐?”고 큰 반응을 나타낸다. 아울러 그분의 명성이 가파르나움 읍내와 갈릴래아 지방에 널리 퍼지니 무수한 사람이 예수께 모여온다. 또한 그분은 당신 신분을 숨기고자 하셨기 때문에 귀신들의 입을 틀어막으신다. 그러니까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에는 마르코의 예수관이 집약되어 있는 셈이다. 마르코는 우선 예수님의 일과를 서술하여 장차 그분이 어떻게 활약하실 것인지 미리 알려준다. 그러므로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는 예수 활약 전체의 본보기인 셈이다.

 

21

마르코는 가파르나눔에서의 하루을 엮으면서 먼저 당신 신도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구마사화를 채집, 수록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용어. 문체, 사상에 따라 더러 개작했는데 21-22,27-28절에 편집요소가 뚜렷이 드러난다. 구마사화는 3.1과 비슷하게 본디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리다, “그리고 그분은 안식일에 회당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그들의 회당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 하나가 있었다 ...” 유다인들은 안식일(토요일)마다 회당에 가서 신앙고백, 기도, 모세 오경과 예언서 봉독, 설교 순으로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했다. 예수님도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셨다.

 

가파르나움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에서 서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포구, 거기에는 로마군 편제를 본뜬 헤로데 안티파스의 소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가파르나움에 관해 세 번 언급하나, 어록의 불행선언을 보면 예수님은 그곳을 활동 근거지로 삼으셨다. 거기에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어 예수님은 그 집에 묵으셨다. 마르코는 이런 사실을 상기하여 그들은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갔다고 했을 것이다.

 

21절 마지막 낱말과 22절에서 마르코는 예수님이 가르치셨다고 할 뿐 그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의 문맥을 살피면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다. 사실 예수님은 신국을 기록하여 주제로 삼으셨다. 22절에서는 청중의 반응을 기록하여 그분은 율사들과는 달리 권위를 지닌 분으로서 그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에매우 놀랐다 한다. 사실 율사들은 언제나 구약성서와 조상전통을 근거로 율법을 가르친 데 반해, 예수님은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신국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조상전통을 근거로 율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 내용과 양상이 매우 새롭고 힘찼다.

 

그러나 마르코는 예수님이 권위있게 가르치신 까닭을 달리 설명하여, 그분은 당신 말씀을 구마활동으로 뒷받침하셨기 때문이라 한다.

율사를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기원전 450년경 예루살렘에서 활약한 에즈라를 율사의 시조로 삼는다. 예수시대 율사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에 속했다.

 

그들은 12,28-34를 제외하면 언제나 예수님의 적수로 등장한다. 예수시대 바리사이파 율사들 가운데 힐렐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양대 산맥을 이루어 맞섰으나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부터는 힐렐 학파가 우세하게 되었다. 율사들은 주로 규범과 사화를 익히고 전하기를 업으로 삼았다. , 율법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는 결의론을 전개하고 송사를 판결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전설을 학당이나 회당에서 가르쳤다.

 

24

그리스 구마사화를 보면 귀신이 쫓겨나지 않으려고 구마자의 신분을 폭로하는 방어사가 있다. 우리 구마사화의 이야기꾼은 그 영향을 받아 방어사를 만들었는데,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를 상대로 항변한 말을 참고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은 내 죄를 일깨워 주고 아들을 죽게 하러 오셨습니까?”

 

방어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더러운 영은 자신을 일컬어 우리라 하는데 귀신은 그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귀신들의 두목이 사탄이다. 여기서 귀신은 이렇게 항변한다. 예수는 거룩한 신계에, 자기네는 더러운 사탄계에 속하여 엄연히 소속이 다른데 무슨 상관이냐, 왜 자기네를 거세하려 하느냐, 당신 신분을 나는 파악하고 있다라고, 그런데 예수님을 일컬어 하느님의 사람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매우 드문 존칭

 

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 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나자렛 사람은 고행을 하기로 서원한 나지르와 발음이 비슷하다. 그런데 칠십인역에서는 히브리어 나지르를 의역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 했다. 그래서 구마사화를 전한 이갸기꾼은 나자렛 사람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풀이했던 것이다.

 

25

우리 복음서의 첫 함구령. 이것은 구마사화에 흔히 나오는 소재다. 그러나 마르코는 자신의 메시아 비밀사상에 따라 그 함구령을 재해석하여 예수님은 평소에 당신 신분을 숨기려 하셨기 때문에 함구령을 내리셨다고 보았다. 귀신에게 내린 함구령이 1.34;3.12에도 있다.

 

27

구마사화와 치유이적사화는 으레 목격자들의 반응으로 끝맺는 법인데 흔히 여기서처럼 경탄사를 발한다. 다만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만은 마르코가 덧붙인 것 같다. 그는 구마행위를 가르침으로 평가했다. , 구마행위는 하느님의 왕정이 마력을 물리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드러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뿐 아니라 구마행위를 하느님 왕정의 위력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 처사를 일컬어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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