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일(목) 연중 제1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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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11 | 조회수26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십시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3,7-14 12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주해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자세 앞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분을 천사와 비교하여 밝힌 다음, 그에 알맞은 훈화를 했다. 마찬가지로 3,1-8에서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성실한 대제관이심을 설명한 다음, 이제 3.7-4.13의 문단에서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실한 신앙인이 되라고 훈화한다. 이 항목은 다시금 경고 약속 겸 권고, 교리 부분으로 나뉜다. 이 훈화는 시편 95.7-11에 대한 해설과 실생활에의 적용으로 구성된 전형적 강론이다. 유다 랍비들은 이러한 형식의 강론을 발전시켜 미드라쉬 문학을 탄생시켰다. 훈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느님을 불신하고 시험했기 때문에 겪었던 불행을 상기하라는 경고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순종하여 그분이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라는 권고다. 7절 유다 랍비들은 강론중에 가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라는 말로 성서를 인용한 다음 그 내용을 설명하고 현실에 적용했다. “성령의 말씀”은 인용하는 성서의 권위를 높이어 강론자의 말을 신뢰하게 만든다. 3,7-11은 시편 95,7-11의 인용문이다. 원문과는 다소 다른 점으로 보아 저자는 이 시편을 기억에 의존하여 인용한 것 같다. 이 시편의 역사적인 배경은 출애 17,1-7에 나오며, 그밖에 민수 14.23; 신명 12.9의 내용도 다소 가미되었다. 이들 성서에서 전하는 사건의 개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여행을 하는 동안 겪은 많은 시련을 견디지 못하여 거듭 하느님을 불신하고 배반했다. 하느님은 이러한 백성에게 분노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셨고 결국 그대로 이행하셨다. 8절 히브리어 시편 원문에는 “므리바에서처럼 마싸 광야에서의 그 날처럼”으로 되어 있어 지명을 나타내지만 칠십인역에서는 이들 지명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도 칠십인역을 따라 “므리바”와 “마싸”라는 지명과 관계없이 “반역”과 “시험”이라는 의미에 관심을 두고 있다.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 시면서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그분을 시험했을 뿐 아니라 그분께 대들 정도로 마음이 완고하고 고집이 세었다. 9-10절 시편 본문에서는 40년이라는 기간이 하느님께서 이집트를 탈출한 세대를 지겨워하신 기간이지만, 이 편지에서는 의미가 다소 변경되어 조상들이 하느님의 업적을 보고도 그분을 시험한 기간이다. “지겨워하다”는 마음에 들지 않아 싫어하고 역겨워한다는 뜻이다. 11절 직역하면 “내가 분노중에 맹세한 대로, 만일 그들이 나의 안식에 들어올 것이라면”, 히브리이어 성서는 맹세. 서원. 축복. 저주 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맹세하거나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사악은 야곱을 에사오로 잘못 알고 축복해 주었다가 이를 취소하지 못했으며 발락도 자기가 바랐던 것과는 달리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자 이를 저지 하지 못했다. 12절 시편 95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살피고 들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다음 하느님을 불신하고 거역한 사건을 전하는 민수기 14장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 역시 이러한 사건을 거울로 삼아 영원한 안식처인 하늘나라를 향해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독자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불신과 반역을 경고한다: “여러분은 생명의 하느님을 불신하여 그분을 멀리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끊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3절 직역하면 “오늘이 불리는 동안” 또는 “오늘이 불릴 때까지”, 저자는 독자들을 훈계하기 위해 “오늘”을 매우 강조한다. 4.7에 보면 하느님은 새로운 “오늘”을 다시 정하시고 또 한번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 이 새로운 “오늘”은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이 길이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오늘은 영영 사라질 것이다. 오늘은 은총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한정된 현재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일시적인 안락으로 유인하는 악의 꾐에 빠지지 말고 오늘을 안식을 준비하는 날로 삼아야 한다. 14절 원어는 휘포스타시스, 문맥에 따라 본질, 기초, 실체, 확신. 기본태도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때에 지녔던 기본자세, 곧 희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말한다.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참여자” 또는 “그리스도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의 태도를 굳게 지킨다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하여 마련하신 영광과 완성에 동참하는 자가 된 것이다.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주해 나병환자를 고치시다 마르코복음에 다 한 번 나오는 나병 치유 이적사화다. 그 서술 양식은 그리스인들이 치유이적을 이야기할 때와 같다. 즉, 상황묘사, 기적적 치유, 치유 실증, 치유된 사람의 반응 순으로 엮어져 있다. 함구령은 이 서술양식에 불필요할뿐더러 마르코의 메시아 비밀사상과 잘 어울리므로 복음사가 자신이 형성. 삽입한 것 같다. 나병 치유 이적사화에는 시간. 장소. 환자의 이름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목격자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따라서 이 사화는 예수님의 일정한 치유행적을 전하기보다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위대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아 꾸민 이야기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40절 성서에서는 문둥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한다. 나병은 불결할 뿐 아니라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불결, 불결”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곳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 41절 대부분의 사본에서는 “측은히 여기시며”. 베자 사본에서는 “화를 내시며”라 한다. 이해하기 쉬운 사본보다 어려운 사본을 택해야 한다는 본문비판 원칙을 따라 후자를 선택했다. 화를 내신 것은 나병을 유발한 귀신을 향하여 기적의 힘을 드러내신 것이다. 42절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다음 “그에게 호통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함구령을 호되게 내리셨다는 뜻이 있을 뿐이다. 44절 나병환자가 다시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려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관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은 다음 제사를 바쳐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 나병을 고쳐주신 사실을 유다인들에게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44ㄴ절은 치유이적사화에 흔히 들어 있는 “치유 실증”에 해당된다. 45절 여기 이적사화는 본디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그 일을 선전했다”라고 끝맺었을 것이다. 이 끝맺음은 이적사화에 흔히 나오는 “목격자들의 반응”에 해당된다. 나머지는 마르코가 덧붙인 것 같다. 우선 그는 나병환자의 “선전”을 “선포”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이제 그 청중 가운데서 처음으로 나병환자가 선포활동에 가담한다. 아울러 마르코는, 조용히 숨어 계시고자 하나 결국은 널리 알려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돋보이게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요즘은 담배를 피는 것이 죄인냥 되어갑니다. 이것이 죄라면 담배를 피는 사람이 많은 것은 남자이니, 남자들은 죄인으로서 천국과는 거리가 멀고 그 수효가 적은 여자들은 천국을 가는 사람이 많겠습니다. 그리고 폐병이 걸린다는 말은 폐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담배를 피는 사람보다 많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미국에서는 예전에 금주법이 있었으나 결국은 그 법이 무너져버렸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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