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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6 목요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1-25 조회수272 추천수1 반대(0) 신고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며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다.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다.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둘째 서간티토에게 보낸 서간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지켜야 할 지침에 도움이 되는 권고가 많이 담겨 있다.

 

 

 

 

 

 

 

 

1독서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시작입니다. 1,1-8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2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3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5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6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생명의 약속이란 사도 바오로의 설교 내용을 요약한 말이다. “생명이란, 예수께서 성취하시고 사도의 선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제시된 구원 전체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2

이 구절은 사도 바오로와 티모테오의 따뜻하고 친근한 관계를 나타낸다. 이로써 필자는 그들의 가르침이 일치함을 강조한다.

 

티모테오의 굳은 신앙심과 충실함에 대한 감사

바오로의 친서에서와같이 여기서도 인사 다음에 감사의 정을 표시한다. 여기서는 티모테오 전서와 전혀 다른 어투가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전서보다 개인적 관계를 강조하고, 또 구체적 상황이나 사건에 관한 말이 많기 때문에 바오로의 친서 같은 인상을 더 짙게 풍긴다. 그러나 이 편지가 가명서한임을 전제로 하면 오히려 그 구체적 상황이나 사건의 서술의도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 필자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후대 교회에 권위있게 전하며 강조하려고 되도록 바오로 전서를 흉내낸 것이다. 전서와 티토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교회 지침으로 제시하여 강조했다면, 후서에서는 바오로 자신의 모습을 훌륭한 귀감으로 부각시켰다고 하겠다.

 

3

1디모 1.13과 달리 필자는 바오로의 개종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전래의 오랜 전통에 따라 하느님을 충실히 섬긴 사실만을 말한다. 그 이유는 필자가 전통적 믿음 안에서의 충실한 생활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후대 교직자들의 귀감이다.

 

이 구절은 고대 서간문에 자주 사용된 표현으로서, 서로간의 친숙한 관계를 나타낸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면 특히 기도중에 친근한 사람 생각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4

작별 때의 눈물일 것이다.

 

5

바오로처럼 티모테오도 조상, 즉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믿음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사목서간 필자는 이미 그리스도인 가정의 전통을 알고 있다. 바오로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역사상 티모테오를 생각한다면, 이 그리스도인가정의 전통에 관해 거론함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티모테오는 그리스도교 믿음을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티모테오를 다만 그리스도교 전통을 간직한 가정에서 나온 교직자의 모범으로 내세우려 했을 따름이다.

 

6

1디모 4.14에서는 티모테오가 장로들에게 안수를 받았다고 했다.

 

교직자가 안수를 받을 때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은사가 내린다. 교직자는 이 은사를 선물로 받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활용해 나가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7

하느님이 주신 은사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기 때문에, 그런 은사를 받은 교직자는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비겁하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8

주님이 하신 증거인지 혹은 주님께 대한 증거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어서 그분 때문에 갇혀 있는 나라고 했으니, “주님의 증거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동료와 함께 고난을 나누지않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의 수난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복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9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일흔() 제자들을 파견하시다

ㄹ카는 주로 마르 6,6-13을 따라 열두 제자 파견사화를 소개한 바 있다(9,1-6). 이제 그는 어록을 따라 일흔 또는 일흔두 제자 파견사화를 전한다.

 

1

1.17절의 제자 숫자가 사본에 따라 다르다. 시나이.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70, 파피루스 75. 바티칸, 베자 사본에서는 72명이라 한다. 루카가 70명 또는 72명 숫자를 어록에서 따왔는지 또는 루카 자신이 만들어 넣었는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당신에 앞서는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에 앞서로서 이런 표현이 7.27;9.52; 사도 13.24에도 나온다,

 

2

2절과 같은 말씀이 마태 9,37-38에도 있다. 또한 그 변체가 요한4,35에 나온다. 이 말씀은 본디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따로 발설하신 것으로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원래 추수는 종말심판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그리고 종말 심판인 추수의 일꾼들은 본디 천사들을 뜻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지금이 추수할 때라고 하셨으니 지금이 종말이라는 것이요, 제자들을 추수 일꾼이라 하셨으니 그들이 곧 천사들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3

마태 10.16에 변체가 있다.: “이제 내가 여러분을 보내는 것은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시오.” 마태 10,16ㄴ은 마태오복음에만 있는데, 이는 본디 10.16과 상관없이 전해온 훈계였을으리라. 짐작건대 마태오가 그것을 수용하여 10.16ㄱ에 덧붙였을 것이다. 루카 10.3 상징어의 뜻인즉, 세상은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요, 그리고 세상에서 전도하는 제자들은 정당방위도 할 수 없으리란 것이다.

 

4

4ㄱ절은 여행 채비에 대한 훈시다. 마르 6,8-9에서는 지팡이와 샌들을 허락하시는데 어록에서는 그것들조차 금하신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시오라는 훈시는 여기에만 있다. 예수시대 근동인들은 인사할 때 두루두루 안부를 물으면서 여러 가지 소식을 주고받았다. 제자들은 이런 예의범절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곧장 전도하러 가라고 하신다.

 

5

5-7절은 남의 가정에서의 처신에 관한 훈시로서, 그 병행문이 마태 10.12-13.10ㄴ에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변체가 마르 6.10에 전해온다. 유다인들은 인사할 때 으레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상적 인사말을 넘어서 하느님 날의 평화를 비는 축원이다.

 

6

어느 누가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은 그와 함께 계실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은 그에게서 떠나가실 것이라는 뜻이다.

 

7

7ㄱ절의 변체가 마르 6.10에 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으시오.” 변체의 뜻인즉 처음 집을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좀더 좋은 집을 찾아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7ㄷ절에도 같은 뜻의 말씀이 있다.

 

일꾼은 제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의 병행문이 마태 10.10ㄴ에 있다. 여기 7ㄴ절과 똑같은 말이 1디모 5.18에도 있다. 1고린 9.14에는 그와 비슷한 말이 있다.

 

8

9-12절은 도시에서의 처신에 관한 훈시로서, 그 병행문이 마태 10,7-8,14-15에 있다.

 

9

병행문 마태 10.7에서는 하늘(하느님)나라가 다가왔습니다”, 루카 11.20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설교주제였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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