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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6주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2-12 조회수361 추천수1 반대(0) 신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운전에 비유한다면 그렇다면 운전을 할 때는 지켜야 하는 규정과 법규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율법인 계명이 있습니다. 마치 안전 속도를 준수하는 것이 서로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면도 있지만 생각의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걸 아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도 완전히 이해를 한 건 아니지만 조금은 어렴풋하게나마 부족하지만 그런 수준에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일복음을 묵상하면서 고해성사와 관련해 묵상해봤습니다. 특히나 모고해입니다. 모고해와 모령성체의 의미를 알고는 있지만 이 부분과 관련해서 미묘한 부분이 섞여 있어서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많은 고민을 해왔습니다. 2년 전에 수도원 가려고 할 때 총고해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총고해를 지금까지 두 번 했습니다. 문제는 일반 고해와 총고해를 떠나서 고해할 때 그당시 의도하지 않게 고해할 정도의 죄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다시 말해 그냥 소죄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의 죄라고 생각해 하지 않았는데 그게 지나서 다시 성찰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깊이 찾아서 성찰해보면 고해를 하는 것이 더 완전한 고해가 될 것이기에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모고해의 조건이 충족되고 또 교회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고해를 해서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무효가 되는 것이고 더불어 그동안 모령성체를 하게 된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성사생활을 계속하여도 이미 중간에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계속 잘못 끼워지게 되는 그런 경우와 같게 되어 이 부분을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엄청 고민을 많이 했고 어제 친분 있는 신부님과 통화를 해서 나름 해결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본다면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단순히 이런 사실만 놓고 본다면 계명이라는 게 율법이라는 게 족쇄처럼 느낄 수가 있을 겁니다.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 말입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는 것과 양심성찰을 할 때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하는 그 바탕에는 십계명과 죄 칠종을 바탕으로 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분명 족쇄와 같은 것이 됩니다. 가령 신앙을 갖지 않은 무신론자라면 아무런 죄도 아닌데 이게 신앙 안에서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신앙을 하지 않으면 모를까 신앙을 가진 범위 내에서는 의식적으로 아무리 세상은 죄가 되지 않더라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만약 지키지 못했을 땐 고해를 해야 하는 부담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족쇄 아닌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지할 땐 이런 생각이 맞습니다. 우리는 세상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경우에는 아는 만큼만 보이고 아는 만큼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일 복음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에도 나오더군요. 신부님께서 언어의 습득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봤습니다. 제가 언어를 지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을 해야 하는 경우를 보면 단순한 영어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우리말 실력이 뛰어나야 하고 여기서 우리말 실력은 단어의 의미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어떻게 우리말로 표현하는 게 가장 적확한 표현이 될지 그걸 잘 선택해야 탁월한 번역을 할 수가 있는 것이 됩니다. 언어를 표현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으면 다양하게 표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처럼 자신이 표현하는 경우의 수에 한계가 있으면 당연히 번역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마치 우리가 무지하면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지는 우리가 율법을 안다고 할 때 그 율법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받아들이게 될 경우와 같은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할 때, 성찰의 기준이 되는 죄를 판단할 때 성찰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또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잘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판단력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판단력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게 된다면 우리의 영혼이 만약 병들게 됐을 때 그 병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병으로 악화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런 것에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나도 민감한 반응을 하게 된다면 영적인 세심증에 걸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만약 무디게 된다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식할 수 없는 영적인 장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율법과 하늘 나라를 결부시켜서하늘 나라에 가는 조건의 구체적인 예시를 크게 세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의 경우만 먼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처음 나오는 살인입니다. 살인은 우리가 아는 그런 살인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 해석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확장해석 한 게 율법의 의미를 좀 더 완성하려고 하셨다는 의미와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좀 더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바보라고 말하는 것을 지옥까지 연결시켰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도 하면 되지 않겠지만 이게 사실 지옥까지 갈 정도의 죄가 되는지 하고 조금은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부분이 아주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 설사 과장된 표현이라고 해도 여기에 그렇게 표현한 숨은 뜻이 만약 있다면 그게 무엇일지 한번 묵상해본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복음에도 나오듯이 화해를 강조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좀 더 의미를 세분해서 생각해본다면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는 남을 낮추어 판단해서 던지는 말도 살인을 저질렀을 때만큼 버금가는 죄라는 사실과 살인이라는 게 꼭 사람을 죽이는 결과가 나는 것만 살인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말로써도 얼마든지 살인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화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이런 부분을 고해성사와 연관해 묵상해본다면 여기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지만 우리는 이때 이 사람이 우리의 눈에는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바로 하느님, 예수님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를 예수님의 벗에 비유한 부분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가장 작은이라는 표현에서 그 사람을 예수님과 동일시 여기시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화해는 우리가 고해소에서 고해를 할 때도 적용이 될 것입니다. 죄라는 것으로 인해서 하느님과의 단절이 됐을 때 하느님께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과의 단절이 다시 복원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성사에 접목해서 묵상해보면서 묵상한 것을 간략하게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계명과 율법을 단순히 액면 그대로 문자 그대로 자구적인 해석만 해 그 율법이 가지는 의미 속에 숨은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잘못 이해한 의미 속에 자신을 구속시킬 땐 그게 족쇄처럼 작용할 수도 있지만 본질을 잘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가 몰라서 무지해서 죄를 저지르게 되는 그런 경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돼 우리의 영혼이 좀 더 건강하게 될 수도 있기에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도 이런 부분까지도 고려해서 묵상해야 우리의 영혼이 제대로 하느님께로 향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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