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3-03-06 조회수709 추천수6 반대(0)

사제가 되면 요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한다. 강론을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 어른들에게 공손해야 한다. 미사를 성심껏 봉헌해야 한다. 재정에 투명해야 한다. 수도자들에게 잘 해야 한다. 이렇게 요구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은 그런 요구사항을 채우지 못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오솔길에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읽고 마음에 새기라는 뜻입니다. 사제에게 요구되는 것들 중에 연습해서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판단력입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교우들은 사제의 의견을 묻곤 합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사제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세상의 일이 무를 쪼개듯이 확실하면 좋은데 그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덧셈과 뺄셈처럼 딱 떨어지면 좋은데 미분과 적분처럼 복잡할 때가 많습니다. 관계의 문제는 수학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는 이익과 손해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념과 사상의 문제처럼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방식이기에 죽거나 살거나 입니다. 그곳에는 이해와 화합이 자리 잡기가 어렵습니다.

 

제게 의견을 물었던 때가 몇 번 있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를 천마산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비가 더 내릴 것 같으니 안전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지금의 자리에 머물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안전을 위해서 자리를 옮기자고 했습니다. 시흥 5동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태풍 곤파스로 성당 뒷산의 토사가 밀려와 아파트의 옹벽이 무너졌습니다. 서울시장이 방문했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뒷산의 높이를 깎아 내자고 했습니다. 시장도, 구청장도 저의 의견을 존중했고 뒷산이 9m 정도 낮아졌습니다. 덕분에 성당에 마당이 생겼습니다. 사목위원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돈이 들더라도 마당을 좀 더 넓히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지금 정도의 마당도 거져 생겼으니 이쯤에서 만족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본당신부인 저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책임을 지더라도 조금 더 마당을 넓히자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입니다. 왕은 남한산성에 피난을 갔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명분을 택한 신하들은 끝까지 항쟁하자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겨울이 깊어지고, 먹을 것은 없고 왕도 신하들도 궁색하였습니다. 실리를 택한 신하들은 쿨하게 청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은 궁궐로 돌아갈 수 있고, 전쟁도 끝나니 백성들도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왕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역사는 왕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도 명분과 실리에 때문에 의견이 둘로 나뉘었던 일을 보았습니다. 명분을 택하면 조금의 손해를 감수 할 수 있었습니다. 실리를 택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 이전에 감정이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 이전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의 골이 채워지면, 오해가 풀리면 명분도, 실리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랑과 겸손이 만나면 명분과 실리는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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