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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3-14 조회수295 추천수2 반대(0) 신고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 18,21-35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런 고민을 털어놓기까지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용서의 최대 한계를 ‘일곱’ 번으로 설정하기까지도 수많은 갈등과 고뇌를 거쳐야만 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이 고민 안에는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고자 하는 그의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하는게 어찌 베드로 사도 뿐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여 그분을 닮은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우리들이지만, 이 세상에서 정말 별의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면 그 다짐이 자꾸만 약해지고 마음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천불이 올라오곤 하지요. 내 진심을 왜곡하며 모함하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많고, 또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웬수’ 같은 놈들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럴 때면 일곱 번은 고사하고 ‘삼 세번’이라도 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어떤 때엔 마음이 ‘욱’해서 내뱉은 가시돋힌 말들로 오랫동안 어렵게 쌓아올린 소중한 관계를 한 순간에 ‘파탄’내고서는, 그 화가 가라앉은 뒤에야 땅을 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용서가 더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웬수’가 되듯, 나 역시 누군가에게 ‘웬수’가 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백 데나리온’ 정도씩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천 만원’ 정도니까 그 빚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큰 빚을 탕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만 손해보는 것 같은 억울한 마음이 들어 망설여지는게 사실이지요. 그러나 내가 그에게 탕감해줄 그 빚은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수없이 탕감받아온 ‘일만 탈렌트’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께 탕감받은 빚을, 내가 살면서 그분으로부터 받아 누려온 용서와 자비, 은총과 사랑을 화폐가치로 따져보면 대략 ‘십 조원’에 해당합니다. 그것이 대체 얼마나 큰 가치인지 제대로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돈을 빌릴 때에도 그 금액만큼의 ‘담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잘 안빌려주는게 세상 이치인데, 하느님은 대체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대체 뭘 보시고, 대체 뭐가 예쁘다고 그런 큰 은총을 아무 조건 없이 덥썩 내어주신건지, 그분의 사랑은 정말 생각할수록 놀랍게만 느껴집니다. 그 놀라움이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진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대로 내 이웃 형제 자매에게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푸는 일이 그다지 어렵다거나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겠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직까지 마음 속에 억울함과 분함이 남아있다면 오늘 비유에 나오는 임금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는지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일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제발 참아달라고 애원할 때에는 한 없이 자비로운 모습으로 그를 대하지만, 그가 자기 동료에게 차갑고 매정하게 굴었음을 알고난 뒤에는 단호하고 엄한 모습으로 그를 대합니다. 그가 단순히 변덕을 부리는게 아닙니다. 그 임금의 상반되는 두 모습은 우리가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상반된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당신께 자비를 구하면 하느님께서 한 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를 대하시지만,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큰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을 망각한 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할 사명을 나몰라라하면 준엄한 ‘심판관’의 모습으로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이지요. 

 

아직 종말에 이르지 않은 ‘지금’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심판 때가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를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행실대로 정확하게 갚아주신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입니다. 그 소중한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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