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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일 가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3-26 조회수371 추천수0 반대(0) 신고

[사순 제5주일 가해] 요한 11,1-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시인이 쓴 <봄길>이라는 시입니다. ‘길이 끝났다고 주저앉아 절망하지 않고 스스로 길이 되는 사람’의 모습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그리스도인과 닮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끝장난 듯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포자기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끝’ 너머에 영원토록 이어지는 참된 행복의 세상이 있음을 희망하며, 나를 그 세상으로 이끌어주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분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여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사랑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힘겹게 걷고 있는 이 길이 더 이상 ‘가시밭길’이 아니게 됩니다. 그 길은 ‘봄길’, 즉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의 길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님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입니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그런 믿음을 지니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그의 세상이 끝나버리기 전에, 중병에 걸려 아픈 오빠를 치유해주십사고 주님께 청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예수님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즉시 그에게 달려가지 않으십니다. 마르타 자매의 속은 근심과 걱정으로 시커멓게 타들어가는데, 원래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다가 뒤늦게야 베타니아를 향해 출발하십니다. 그 사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라자로는 죽고 말았고, 예수님이 그곳에 도착하셨을 땐 이미 그가 죽은지 사흘이 지난 뒤였습니다.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날 가망이 사라진 ‘완전한’ 죽음을 맞게 된 겁니다.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우는 마르타 자매를 보며 사람들은 말합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마르타 자매의 마음도 그들과 같았습니다. 수많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얼른 와주신다면 자기 오빠가 병에서 치유되어 살아날 수 있으리라 간절히 기대하며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늑장대응으로 인해 그 기대와 바람은 산산조각 나버렸고, 마르타 자매는 예수님께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지요. 주님 당신이 제 때 와주셨다면, 그래서 오빠 곁에 계셨더라면 오빠는 그리 허망한 죽음을 맞지 않았을거라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느냐고, 당신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속상하다고.

 

예수님은 그런 마르타를 위로하시며 ‘라자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당신이 라자로를 죽게 놔두신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깊은 불신의 늪에 빠진 유다인들에게 ‘믿음의 표징’으로 삼으시기 위함임을, 그의 소생을 통해 많은 이들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알려주신 겁니다. 하지만 오빠의 죽음으로 크게 실망한 마르타는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해도 ‘죽음’이라는 절망은 이겨낼 수 없다는 한계 안에 스스로 갇혀버린 탓이지요. 그래서 세상 종말의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답합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이 언젠가는 부활하리라는 가르침을 머리로 알고는 있지만, 그 부활이 주님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앎’과 ‘믿음’ 사이의 괴리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주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물이 천천히 데워지면 개구리가 그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안주하다가 쪄죽는 것처럼, 믿음과 앎이, 신앙과 삶이 분리된 채로 안주하는 동안 하느님과 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결국엔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믿음’을 지니라고 촉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신앙의 진리를 그저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로 ‘아는’ 수준을 넘어, 그 진리가 나의 삶 속에서 매 순간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어야만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 말씀을 따라야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믿음의 보상이 참으로 ‘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하는 소극적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적극적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을 믿다보면 언젠간 나에게 좋은 일이 있겠지’라는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실천해서 그분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해야지’라는 수준까지 나아기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하느님 나라에 언젠가는 가고 싶지만, 지금 당장 가고싶지는 않은 어정쩡한 믿음으로는 신앙의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살아나거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리 나오라’는 말씀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라자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참된 행복의 세상까지 다스리시는 하느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을 사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목숨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여기며 두려워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진짜 죽음은 죄를 짓고 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안에 모시고 그분 뜻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망이 이끄는 대로 막 살다가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이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자비로 육체적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됩니다. 이런 부활에 대한 희망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그분을 사랑하게 하며,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니 이 희망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다른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주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와 함께 걸어주실 겁니다. 그분과 함께 걷는 그 길은 기쁨과 설레임이 가득한 ‘봄길’일 겁니다.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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