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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1) 창조(創造)의 신앙(信仰) 2023. 3. 29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3-29 조회수398 추천수1 반대(0) 신고

 

창세기(1) 2023. 3. 29

 

창조(創造)의 신앙(信仰)

 

(창세1,1-2)

1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창조경제란 무엇인가를 보면 현대의 경제발전은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나오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업의 창조적 파괴과정을 거쳐 경제를 성장시키며 창조적 파괴는 창조성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창조성 없이 경제발전은 없다! 이와 같이 창조성을 강조하는 경제를 창조경제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완전히 이해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창조라는 말은 성경적 용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제일 먼저 펼치면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도 제일 먼저 나오는 신앙고백이 어떤 것입니까? “전능하신 천주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는 고백입니다.

 

성경에서 창조란? ()에서 유()의 창조(創造)를 뜻합니다.

하느님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세상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1절의 내용입니다. 어떤 분들은 11절을 단순히 창조의 서론으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창11절을 원래의 창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11절에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 무엇을 만드셨습니까? 그것이 12절입니다.

그래서 처음 창조하신 세계의 모습이 12절에 있습니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창조란 흑암(黑暗)이고, 혼돈(混沌)이고, 공허(空虛)한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는 뜻 입니다.

 

그래서 2절에 나타난 원래의 창조와 대조적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창조의 사역이 3절부터 나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또 암흑가운데 빛을 만드신 것이 창조입니다. 혼돈가운데 질서를 만드시는 것이 창조입니다. 또 공허가운데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창조의 사역(使役)을 믿으신다면 먼저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으세요. 이런 창조의 신앙은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은 많은 하느님의 자녀가 있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1130절에 “(아브람의 아내)사라이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많은 하느님의 자녀를 계획하시고, 하필이면 불임여성인 아내를 두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아가 아닌 다른 사람들로 통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171절에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믿음으로 이사악을 낳았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4,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느님은 창세기22장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이사악을 바치라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히브1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진정으로 전능하시어 천지(天地)를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내 삶 가운데서 아무 것도 없어도 있게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1)철저히 무()가 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케고르는 하느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느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철저히 무가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왜 하느님은 이렇게 내 삶을 이토록 짓밟으십니까?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시고 왜 내 인생을 무로 만드십니까? 하느님은 내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했는데 왜 모든 것이 안 되게 하십니까? 하느님은 내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왜 지금까지 내 삶 가운데는 무수한 고난(苦難)만 주십니까? 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은 우리의 삶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하느님 앞에서 철저히 우리를 무로 만드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여, 저를 절망케 하소서 주님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미혹의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온갖 모욕을 겪도록 하여 주시고 내가 스스로 지탱해 나감을 돕지 마시고 내가 발전하는 것도 돕지 마소서 그러나 나의 자아가 송두리째 부서지거든 그 때에는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주님이 불꽃과 고뇌를 낳아 주셨다는 것을 기꺼이 멸망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하나 나는 오직 주님의 품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육신의 복만 주시는 하느님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복()을 받다가 조금이라도 하느님께서 고난(苦難)을 주시면 그때부터 하느님께 대하여 의심(疑心)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느님을 부인(否認)하기까지 합니다.

 

(이사45,7) 7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느님은 빛만 창조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빛과 함께 어두움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안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환난도 우리에게 창조하여 주신 분이십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빛과 함께 어두움도, 평안과 함께 환난을 창조하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느님은 나를 환난과 고난의 풀무가운데 철저히 무가 되게 하신 다음에 이제는 하느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의 삶에 환난(患難)을 주시고, 그 환난으로 인해서 하느님께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신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 내 삶을 철저히 무()가 되게 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철저히 절망하고, 더 철저히 깨어지고, 더 철저히 무()가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손에 의해서 하느님 앞에서 아무 것도 없는 삶이되세요.

이렇게 하느님에 의해서 우리 인생이 무()가 되었다면, 그래서 절대 절망했다면, 이제는 하느님에 대해서 절대 희망(希望)을 가지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내 인생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내 인생의 완전한 절망에서 희망의 빛을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내 삶에 공허가운데 하느님의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그 어떤 어두운 절망에서라도 희망의 빛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내 인생을 반드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하느님은 내 인생을 철저히 다 공허하게 비우게 하신 후에 하느님의 충만하신 것들로 충만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2)두 번째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의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험(冒險)으로 사는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안정된 자리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손에 의해서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폴투니에르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책의 부제로 인생은 하느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친척집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안정된 삶의 자리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느님에 의해서 완전히 새로운 창조적인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스라엘백성들은 이집트에서 편안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라는 보금자리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느님께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곳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였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느님께 대하여 원망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하느님에 의해서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광야에서 만나를 경험하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놀라운 창조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역사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가나안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모험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느님은~

 

(신명1,29-31)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들을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마라. 30 너희 앞에 서서 가시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집트에서 하신 것과 똑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것이다. 31 너희는 마치 사람이 제 아들을 업고 다니듯,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업고 다니시는 것을 광야에서 보았는데, 그 광야에서도 그렇게 싸워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느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였던 것처럼 앞으로 가나안땅에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광야에서 내가 너희를 안은 것처럼 내가 너희를 안아서 가나안땅으로 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1,32-33) 32 “그런데도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33 너희가 천막을 칠 곳을 찾아 주시려고, 또 너희가 갈 길을 보여 주시려고, 밤에는 불 속에서, 낮에는 구름 속에서 앞장서 가시는 주님을 너희는 믿지 않았다.’”

 

여기서 그런데도란 가나안에 들어가는 모험적인 삶을 살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 일에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모험하기를 싫어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 그 자리에서 40년 동안 고생만 하다가 한 사람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한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항상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성향들이 있습니다. 모험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또 실패를 할 수도 있습니다.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것이 네 인간적인 야망에서 나온 모험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소명(召命)에서 나온 모험이라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함께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안정된 자리에서 안주하고 있어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고난이 있으면 그것을 겨우 이겨내는 방식으로만 살아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제 우리에게 한걸음씩 더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것에도 도전하는 모험하는 인생과 신앙이 되리고 말씀하십니다.

역사(歷史)를 잘 살펴보면 끊임없이 도전하고 모험하지 않는 나라나 단체는 결국 멸망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입니다. 폴 투니에르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모험하려는 본능을 선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모험은 인생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사항이자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느님을 믿음으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모험할 수 있는 인생과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창조적 신앙을 가졌다면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어야합니다.

어느 농부에게 놓아서 기르는 닭이 수백 마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어린 새끼 때부터 닭들과 같이 살아온 독수리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독수리는 당연히 닭처럼 행동했습니다. 닭과 같이 모이를 쪼아 먹고 모이를 두고 먼저 먹겠다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는 독수리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독수리를 손끝에 앉히고는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Your are an eagle. Fly, fly, fly to the end of the sky!(너는 독수리야. 날아가라, 날아가라, 하늘 끝까지 날아가라)"

미국인들에게 투투 대주교는 "당신들은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고신 사람들도 독수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까? 마치 우리가 닭인 것처럼 그렇게 모이를 쪼아 먹으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손이라 자처합니다. '신앙의 정통''생활의 순결'을 우리는 자랑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저는 많은 닭 가운데 한 마리의 닭이 아니라 저 창공을 향해 비상하는 독수리이기를 소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항상 우리가 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세상의 것들만을 쪼아 먹는 닭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옆에 분에게 당신은 닭이 아니라 독수리입니다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40장부터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포로에 들어간 상황을 염두 해 두고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된 상황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바벨론이 믿고 있던 우상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은~

 

(이사40,26-27)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여러분들도 27절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하느님은 더 이상 내 인생의 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거나 더 이상 내 인생을 돌아보지 아니하신다. 하느님은 더 이상 나의 간절하고 억울한 간구에 대해서 듣지 않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너는 눈을 들어 누가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40,28-31)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야훼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우리가 사도(使徒)신경으로 매주 신앙고백을 하듯이 정말 전능하신 천지를 지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참으로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분은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닭이 아닙니다. 독수리입니다.

천지(天地)를 지으신 야훼 하느님을 우러러 날마다 새 힘을 얻기 바랍니다. 그래서 닭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하늘을 향해서 날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힘들도 어렵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천지를 지으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날마다 영적으로 날아오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4)창조의 신앙으로 운명에 메인 삶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삶은 각본처럼 꾸며진 기계적 운명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하느님을 찾고 의지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내게 어떤 배우자가 올 것인가? 운명적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신앙인격이 준비된 만큼 그에 적합한 배우자를 내게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앙적으로 준비된 만큼 배우자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결혼은 절대 운명이 아닙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현재 얼마나 하느님을 의지하며 그 말씀 가운데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요하게도 하십니다. 계속 가난도 아니고 계속 부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또 높이기도 하시지만 한 순간에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하느님은 잃어버리게도 하시지만 얻게도 하십니다. 우리 인생은 운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능하신 손에 달려있습니다.

또 내가 얼마나 그 하느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순종했느냐에 따라서 내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운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은 우리의 인생은 얼마든지 창조적 삶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계(家系)의 저주(詛呪)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비 성경적이고 비 복음적 입니다.

 

(갈라3,13“)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모든 저주(詛呪)를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가계(家系)의 저주(詛呪)가 운명적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은 운명적(運命的) 삶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창조적(創造的)인 삶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어, 키가 너무 작아, 너무 못생겼어, 우리 집은 조상 때부터 너무 못살아---거기다가 머리도 나빠--- 그런데 이것은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고, 또 하느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았어 그래서 어쩔 수 없어라고 하지 말기 바랍니다. 키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못생기면 못생긴 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하느님을 의지하고 바르게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하느님 앞에서 더 새롭고 풍성한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과거와 경험의 노예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몇 십년 동안 그렇게 하려고 해봤어, 그런데 한 번도 안 되었어, 그러니 앞으로도 절대로 되지 않을 거야, 아마 그렇게 안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봐?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정의 문제에 있어서, 교회에 대해서 과거의 노예로 살아가지 말기 바랍니다. 교회가 과거에 잘 안 된 것이 있으니, 앞으로도 잘 안될 것이다 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운명주의지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하느님을 바로 믿기만 하면 우리들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풍성하고, 새롭고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실패의 과거를 주님의 십자가가 못박으라.고 합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그것을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리 속단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절망적 형편에 처해있더라도 주님만을 바라고 의지할 때,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천지를 지으신 하느님을 믿음으로 창조적인 삶을 사는 성도(聖徒공덕이 높은 자)들이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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