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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3) 당신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3-31 조회수342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제1독서(창세1,20~2,4ㄱ)

창세기(3)

 

당신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2023. 3. 31

 

(창세1,26-28)

2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이스라엘백성들은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들의 아버지, 또 그 위의 아버지 때로부터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자신들의 조상의 족보를 보니까 자신들은 애굽의 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를 하면서 끊임없이 배웠던 거짓된 신화가 파라오는 신의 아들이고 너희들은 종이라는 거짓된 신화(神話)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강과 태양과 곡식과 가축들이 그들의 신()이라는 거짓 가르침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파라오의 종일뿐 아니라 물질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런 거짓 신화와 거짓 가르침 때문에 그들이 영원히 종이라는 사실을 마치 신앙처럼 받아들이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북한에 사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지금 북한에 사는 사람들은 조선왕조 500년을 지난 뒤에, 일제 강점기 36년을 살았고,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3대 부자세습(父子世襲)을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독재정권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지금 현존하는 세계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북한에 사는 노년층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릴 때는 무능한 조선왕조를 경험했고, 또 일제 강점기를 경험했고, 지금은 세대부자 세습이라는 독재정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북한 주민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진실을 아는 것입니다. 또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미국의 항공모함이나 우리나라의 국방력이 아닙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도 진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대북방송입니다. 확성기를 통해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외부세계의 실상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대북방송은 정말 통일을 앞당기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그들이 430년 동안 잘못 알았던 진실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430년 동안 너희들은 종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무가치한 존재라고 믿어오고 배워왔던 사실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누구냐를 바르게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들은 애굽 왕 파라오의 종이 아니라 천지를 만드신 왕이신 하느님의 아들들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들로 내 아버지 때로 부터 나는 이렇게 살았으니 나는 이제 아버지의 유전을 이어받아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느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천지를 지으신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또 나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나는 전혀 왕의 아들다운 모습이 전혀 없다고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서 창세기 11절을 통해서는 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너희의 삶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일은 성부하느님의 사역(使役)이라고 했습니다.

 

또 창세기 12절을 통해서 구원받았을 때 처음 너희들의 모습이 희망의 빛도 없고, 혼돈스럽고, 공허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성령으로 너희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창세기 13절부터는 성자예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새롭게 창조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때 아무 희망이 없던 우리의 삶에 희망의 빛이 생깁니다. 또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때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질서가 생깁니다. 또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때 공허하고 허무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것으로 충만(充滿)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절망의 삶에 희망의 빛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또 외롭고 고독하고 공허하고 무언가 텅 빈 것 같은 삶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있어서 제일 필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로 아는 일입니다.

 

왜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그렇게 축복의 땅인 가나안땅에 대해서 말을 해도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으며 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유는 그들은 내가 누구인가?” 아직까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아무리 축복의 땅인 가나안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여전히 그들은 애굽의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임하여진 하느님나라를 누리며 짧은 인생을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자고 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렇게 말을 한다고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느님은 오늘 본문 26절에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너를 보니 내 발가락을 닮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보시고 내가 너를 보니 너는 나를 얼굴을 닮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말씀해주시지요. 당신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왜 우리가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꽃보다 더 아름다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은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태6:25-31)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공중의 새를 귀하게 여겨서 먹여주시고 길러주셨는데, 너희는 그 공중의 새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느님께서 들의 아름다운 백합화를 자라게 하시는데, 너희가 이 꽃보다 아름답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바로 입니다. 우리만한 크기의 황금이 더 존귀(尊貴)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더 존귀합니까? 바로 내가 더 존귀합니다.

출애굽기 194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백합화가 더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내가 더 아름답습니까? 바로 내가 더 아름답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늙었는데, 어떻게 이런 나를 보고 백합화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십니까? 라고 말씀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가면서 익어 가는 것이다우리 자신에게 나는 늙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따라서 익은 것입니다고 해주세요.

어떤 이는 나는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 그런데 이런 내가 어떻게 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정지현 시인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시를 개사(改詞)한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만 생각하는데, 그 가사를 생각하면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고난)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430년의 종살이를 하면서 무수한 외로움과 고난과 고통과 슬픔을 다 맛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수한 고난과 고통을 격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너희는 그 모든 외로움 고난 고통을 다 이겨낸 사람들이기에 너희가 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백성들과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 나는(사람이란) 하느님의 형상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제외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이 세상에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사랑을 받아야하는 이유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창조된 하느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받아야할 사랑의 총량이 있습니다. 사랑의 총량을 100이라 했을 때, 90만 받았다면 그 나머지 사랑받지 못한 10 때문에 상처가 생깁니다. 우리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100의 사랑을 받지 못할 사람이 단 한 분도 없습니다. 돈이 없어도 나는 100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건강하지 않아도, 나이가 많아도 나는 이 세상에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우리에게 필요한 100이라는 사랑의 총량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배우자에게, 또 지도자에게, 또 친한 사람들에게 다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100이라는 사랑의 총량을 다 채워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100이라는 사랑의 총량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사랑은 절대 그 사람에게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사랑은 절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100이라는 사랑의 총량을 충분히 채워주실 뿐 아니라 더 풍성히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주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를 행하고, 또 돈을 많이 벌고, 일에 성공을 해야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존재 그 차제,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부어주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상처를 통해서 부어주고 계십니다.

 

(시편34,18) 18 “그들이 울부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하느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더 가까이 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상처는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사랑을 받지 못한 부분이 50입니까? 그러면 하느님은 그 50을 채워주십니다. 또한 사랑을 받지 못한 부분이 70입니까? 그러면 하느님은 그 70을 채워주십니다. 사탄은 우리의 상처에 낙심과 절망과 우울과 자기비하, 좌절의 씨를 뿌립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상처가 사탄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참석한 모든 성도(聖徒)들은 우리에게 있는 상처가 사탄의 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상처는 하느님의 사랑의 통로다라고 외치십시오.

그래서 우리에게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하느님께 감사하기 바랍니다. 내가 사람들로 인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하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만큼 우리에게는 우리를 향하신 더 풍성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시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임을 굳게 믿기 바랍니다.

 

둘째는, 나는(사람이란) 하느님의 형상으로 기억과 돌봄의 대상입니다.

 

(시편8,4) 4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우리는 항상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왜 나를 잊어버리셨는가? 왜 하느님은 나를 생각하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나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혹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은 여전히 나를 생각하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사49,14-16) 14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16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

혹 이 세상에서는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잊어버리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절대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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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8,5) 5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여기서 돌보신다는 말은 주의 깊게 돌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가장 쉽게 말하면 나를 염려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내가 나를 염려하는 것보다, 부모가 나를 염려해주는 것보다 더 나를 염려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느님아버지가, 저 들풀도 입히시는 하느님아버지가, 모든 만물이 각자의 색깔을 나타나게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돌보아주시고 염려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사탄의 위협과 도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담과 실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생각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의 깊게 돌아봐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가 되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세요.

천지(天地)만물(萬物)을 지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지금도 돌보고 계십니다.

 

세 번째, 나는(사람이란) 하느님의 형상으로 하느님의 축복의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또 기억하시고 돌보시면서, 하느님에게 있는 모든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창세1,27-28) 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하느님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은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충만하신 복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은 시집간 딸을 둔 친정어머니의 모습과 같다고 했습니다. 시집을 간 딸이 잠시 집에 왔을 때 친정어머니는 모든 것을 주고 또 주어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복은 완전하신 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복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먼저 영적인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땅의 모든 복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은 받은 우리가 하느님은 영육 간에 모든 일에 잘되고 형통하게 되기를 하느님은 원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의 형상인 사람에게 복을 주시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하느님께서 이르신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신명기282절에 보면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형상인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복하고 다스리다는 말을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스리다는 말은 라다라는 말로서 나보다 약한 생물이나 사람들을 나의 희생과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이후 이 세상 사람들은 희생과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는 하느님의 형상의 모습을 지금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물질의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나 혼자만 복을 받기 위해서 나보다 약한 사람들의 복을 갈취하여 가고 있습니다. 또 인간 혼자 복을 받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들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 복 받으면 되고 나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가장 큰 불행과 비극의 원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도 이 세상에 대하여 충분한 물질의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께서 나보다 약한 생물과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기 위해서 나누어주시라고 하신 복을 일부의 몇 사람들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은 결핍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복 복 복 하지 말기 바랍니다.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가 가지고 있는 복은 복()이 아니라 저주(詛呪)입니다. 또 하느님이 주신 복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것도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또 하느님의 형상대로 내게 주신 복을 나누어주면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랑으로 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지금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요한묵시록에 보면 하느님의 보좌 우편에 계서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묵시5,6) 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과 섬김으로 이 세상을 완전히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하신 형상으로 지금도 희생과 사랑과 섬김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더 사랑하고 더 섬기고 더 희생함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복된 성도(聖徒)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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