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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4) 에덴성전을 회복(回復)합시다. (창세2,1-17)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01 조회수337 추천수0 반대(0) 신고

 

창세기 에덴동산과 네강의 생생한 흔적

 

창세기(4)

 

에덴성전을 회복(回復)합시다.  2023. 4. 1.

 

(창세2,1-17)

1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4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은 이러하였다. 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 5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흙을 일굴 사람도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다.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0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 11 첫째 강의 이름은 피손인데, 금이 나는 하윌라 온 땅을 돌아 흘렀다. 12 그 땅의 금은 질이 좋았으며, 그 고장에는 브델리움 향료와 마노 보석도 있었다.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에티오피아 온 땅을 돌아 흘렀다. 14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흘렀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15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가운데서 특별히 에덴동산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8절에는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이 땅에 에덴동산을 만드시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에덴동산이 성전(聖殿)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3,8)라고 하는데, 여기서 거니시는이라는 말이 미트말렉인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성전에 임재(臨齋)하여 계시다고 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레위26,12).

또 오늘 본문 15절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경작) 돌보게 하셨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경작하다는 말이 아바드라는 말로서 하느님께 예배하다라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돌보다는 말은 제사장이 성전에 사탄이나 악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다고 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민수3,6-7). 그러니까 아담은 최초의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쫓겨났던 곳이 에덴동산의 동쪽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에덴의 동쪽에 에덴동산을 지키는 천사들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도 동쪽이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었습니다.

또 에덴동산에 강들이 나옵니다. 에제키엘서에서도 성전에서 강물들이 나와서 온 세상을 적십니다. 그 외에서 구약시대의 성전과 에덴동산을 비교하면 에덴동산이 성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이라고 하면 건물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이 전부 하느님께서 거니시고 임재하시는 성전이었습니다.

이것은 요한 묵시록(黙示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묵시록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옵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건물로서의 성전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도 모든 곳이 다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이 성전이라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왕 파라오가 모세에게 왜 출애굽을 하려고 하느냐고 했을 때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성막 즉 성전에 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서는 전체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말씀입니다. 민수기는 성전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목적이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구원받은 자로서 하느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에덴성전을 회복합시다.

 

우리가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의 삶이 예배(禮拜)가 되어야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땅을 갈고 경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들에는 초목(草木)이 나지 아니하였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흙을 일굴(경작) 사람도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창세2,5) 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군다. 또는 경작한다.”는 단어는 아바드라는 단어입니다. 아바드라는 단어는 일한다, 노동한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 이 아바드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을 예배한다고 했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에덴동산에서는 삶이 예배였고, 일이 예배였습니다.

우리가 제일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땀을 흘려서 일을 하는 것은 인간이 범죄 한 후에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도 땀을 흘려서 일하는 노동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17-19절을 보면 인간이 범죄 한 이후에 땀을 흘려서 일하는 노동이 고통이 되었습니다. 또 인간이 범죄 한 이후에 일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지 않아도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생육(生育)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充滿)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후에는 출산이 고통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초(太初)에 에덴동산에서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은 일의 목적은 예배(禮拜)였습니다. 태초에는 밭을 경작하고 채소를 심고 가꾸는 그 일이 예배였습니다.

 

태초(太初)의 안식일이 창세기121-3절에 나옵니다.

1장에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 는 말을 하는데, 일곱째 날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범죄(犯罪)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 땅을 갈고 경작한다고 하는 것도 인간이 영원토록 하느님의 안식에 동참(同參)함으로 하느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기뻐함으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안식일의 예배란 하느님 안에 있는 안식과 평화, 하느님 안에 있는 기쁨, 하느님 안에 있는 즐거움을 인간이 누리고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에게 열심히 일을 하라고 하신 목적은 하느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예배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이후에 일속에는 하느님으로 인한 즐거움과 평안이 없어졌습니다. 범죄 한 이후에 이제 일이란 죽도록 수고하고 고생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또 하느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서 일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잘 먹고 살기 위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일속에서 하느님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까? 일하는 것이 예배(禮拜)입니까? 수고(愁苦)와 고생(苦生)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이제 에덴성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음으로 우리의 일이 단순히 수고와 고생이 아니라 하느님께 예배함입니다. 또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일속에서 하느님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이 회복됨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속에서 하느님으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가운데 참된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야합니다. 예배의 회복이 있기 위해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합니다. 3절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일이 안식일입니다.

일주일동안 힘들고 어렵고 속상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럴수록 주일미사예배를 통해서 하느님 안에 있는 참된 안식과 평화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미사예배를 통해서 누렸던 하느님의 안식과 기쁨을 가지고 일주일 동안 일합시다.

주중에도 일상의 삶속에서도 하느님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말고 일상적인 삶속에 하느님으로 기쁨을 회복함으로 태초의 에덴성전을 회복하는 성도(聖徒)들이 됩시다.

 

두 번째,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호흡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재료가 흙입니다. 그런데 흙이 다 같은 흙이 아닙니다. 동물이나 식물도 흙으로 만드셨는데, 이때 흙은 아레츠입니다. 이것은 그 속에는 영양분이 있고, 생명의 가능성이 있는 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든 흙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2,7)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땅의 흙에서 인간을 만드셨는데, 여기서 흙이란 아파르인데, 그 흙 자체로서는 전혀 영양분이 없고, 생명의 가능성조차도 전혀 없는 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람을 만든 흙인 아파르’ (민수19,17), 가루(2열왕23,15), 부스러기 (1열왕20,10), 티끌(1사무2,8), 또는 먼지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19절을 공동번역에서는 너는 먼지(아파르)이니 먼지(아파르)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을 만든 흙은 동물이나 식물보다 못한 재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7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무 생명력이 없는 먼지와 같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하느님의 생기(生氣)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생명체는 하느님의 호흡, 또는 성령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티끌과 먼지 같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호흡이 들어가서 비로소 사람이 생명체, 즉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호흡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사람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람에게 하느님의 호흡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사람은 단순하게 동물과 같이 단순히 먹고 마시고 성적인 욕구만을 추구하는 육신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하느님의 호흡이 들어가서 이제 단순한 생물이 아니라 생령 즉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끊임없이 하는 이야기는 사람은 동물에서 진화(進化)가 된 단순한 생물, 즉 육신적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聖經)은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하느님의 호흡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호흡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생물(生物)이 아니라 생령(生靈)입니다.

사람이란 단순히 먹고 마시고, 성적인 욕구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호흡이 필요합니다. 이 하느님의 호흡을 성령(聖靈)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하느님의 호흡은 어떤 호흡이겠습니까? 또 사람에게 부어주셨던 성령은 어떤 성령이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단순하게 아무 의미 없는 호흡을 부어주셨겠습니까? 또 아무 의미 없는 성령을 부어주셨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호흡은 하느님의 사랑의 호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호흡을 불어넣어주실 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호흡을 불어넣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또 인간에게 부어주셨던 하느님의 성령도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성령하느님이십니다.

 

(로마5,5) 5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티끌과 먼지에서 나온 우리 사람이 어떻게 육신적인 동물이 아닌 생령(生靈)으로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호흡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의 호흡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마치 공기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공기를 마실 때 마다 하느님의 사랑을 흡입해야합니다. 또 우리가 숨을 내 쉴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하느님께 내어 놓아야합니다. 이것이 기도(祈禱)입니다.

기도(祈禱)는 하느님의 사랑을 흡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내 뱉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상의 삶속에서 쉽게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하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숨을 들이 쉬시면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또 숨을 내쉬면서 나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는 지금 대부분 먹고 사는 문제에 메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가 전혀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에제키엘 골짜기의 마른 뼈(37장참조)와 같은 우리가 다시 영적인 생기(生氣)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왜 삶에 기쁨이 없고 매일 무기력하고 왜 우리에게 하느님을 섬김에 자원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육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날마다 하느님의 사랑의 숨결이 충만하게 임해야 합니다.

티끌과 같은 나, 먼지와 같은 나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바라볼 때 그 어떤 생명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날마다 충만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느님의 사랑을 호흡하심으로 영적으로 살아있는 삶 가운데서 에덴성전이 회복되어야지요.

 

세 번째,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잡아야합니다.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에덴동산의 강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왜 에덴에서부터 강들이 흘러 나왔다는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출애굽 전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있을 때 그들의 일상적인 삶속에서 제일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 애굽에 있었던 나일강입니다. 나일강물이 너무 넘치면 그것 때문에 홍수가 일어나 일상적인 삶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또 나일강물이 부족하면 그것 때문에 그들의 일상적인 삶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다보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첫 번째 신()으로 섬겼던 우상이 나일 강의 신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애굽에 내린 재앙 중에서 첫 번째 재앙도 나일 강의 신을 치시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너희들이 애굽에서 신처럼 섬겨왔던 나일 강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에덴동산의 강들 중에서 두 번째 강인 기혼 강이 나일 강의 원줄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에덴동산의 강들을 통해서 너희가 그렇게 신처럼 섬기고 있었던 나일 강도 나일 강의 신이 아니라 에덴동산의 강들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에덴동산의 강들을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제 삶의 중심을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 붙잡아야할 삶의 중심은 이제 나일강이 아니라 그 나일강을 만드신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서 제일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경제입니다. 경제가 호황이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지금 같이 경제가 좋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너무 힘이 듭니다. 또 주부의 경우에는 자녀들과 가족의 건강입니다. 가족들이 건강하면 우리는 즐겁습니다. 그러나 가족 중에서 누구라고 아프면 그것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있어서 나일 강은 경제이고, 건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나일 강에 따라서 울고 웃었듯이 우리들은 온통 경제에 따라서 울고 웃습니다. 또 건강에 따라서 울고 웃습니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우리의 삶을 보면 우리들은 경제문제와 건강문제를 쫓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나일 강이 우상이듯이 우리에는 경제문제와 건강문제가 우상(偶像)이고 신()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께 이 에덴동산의 강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삶의 곁가지들을 붙들지 말고,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이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가 경제적 회복이고, 또 건강의 회복이고, 또 자녀문제이고, 그 외에 여러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계속해서 그 삶의 열매들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떨어지기를 기다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삶의 열매를 한 순간에 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열매를 하나씩 따려고 하지 말고 나무의 밑둥치를 붙들고 흔들어야합니다. 그러면 열매는 떨어집니다. 바로 우리의 삶의 나무의 밑둥치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이 시편에 나오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우리인생에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서 이렇게 가고 또 저렇게 가는 삶을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이리 저리 분주하게 쫓아가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삶이 하느님 앞에서 정말 복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삶의 문제들을 따라 가지말기 바랍니다. 제발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주야로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에게 더 집중하고 제발 세상의 소리 사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살아갑시다.

하느님만 바라보고 하느님만을 묵상하고 있으면 하느님이 밥 먹여줍니까? 예 하느님이 밥 먹여 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의 근원이시고 뿌리이시고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모든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만을 더욱 굳게 붙들고 살아가세요.

 

네 번째, 에덴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느님만을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아니라 생명나무열매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먹으라고 했던 생명나무열매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엄청난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왜 아담이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먹었습니까? 왜 먹으라고 했던 생명나무열매를 먹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에덴동산을 만드신 목적은 사람이 하느님의 복()을 받고 잘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과 에덴동산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도 절대 우리를 유혹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와 같은 나무들이 에덴동산에 깔려있습니다. 또 생명나무도 우리가 갈수 없는 저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나무도 너무 쉽게 먹을 수 있도록 동산중앙에 두셨습니다. 선악과는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먹지 않으면 됩니다. 또 생명나무열매는 먹으라 했기 때문에 그냥 먹으면 됩니다.

사실 이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가 굳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고, 먹으라고 한 생명나무열매는 먹지 않았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신명기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인 가나안땅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 앞에서 가서 너희들을 위해서 대적(對敵)을 다 물리치고, 너희들이 거()할 곳을 예비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내 품에 안고 그곳으로 인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여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신명1,31-32) 31 너희는 마치 사람이 제 아들을 업고 다니듯, (야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업고 다니시는 것을 광야에서 보았는데, 그 광야에서도 그렇게 싸워 주셨다. 32 그런데도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오늘도 똑 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절대 우리가 잘못되기를 유혹하시거나 시험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잘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은 내가 하라고 하는 일을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세상은 하느님이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먹으라고 하신 생명나무열매는 선택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선택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시 에덴성전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가정이 에덴성전이 되고 우리교회가 에덴성전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행복하고 복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내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만을 굳게 붙들고 날마다 하느님의 사랑을 호흡하며 삶 가운데서 하느님으로 기쁨을 회복하며 살아가시오.

  

[스크랩] [성경의말씀(07)] 창세기--에덴동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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