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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02 조회수463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마태 26,14-27,66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수 있는 모습이지만,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을 통해 배불리 먹고, 치유의 은총을 입으며, 심지어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까지 목격했던 군중들은 그분의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겠다고 기대하여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추앙하게 됩니다.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소중한 재산인 자신의 겉옷을 내어 바닥에 까는 일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원하는 물질적 번영과 정치 사회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왕’이 되기를 거부하시자 차갑게 돌아서 버립니다. 그분을 노예처럼 팔아넘기는가 하면, 그분의 겉옷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게다가 적대자들의 모함과 박해에 저항하지 않으시고 무력하게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는 그 분을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결국 목숨까지도 빼앗아버리죠. 이것이 오늘 복음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감탄고토’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이기심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당신이 갈 길을 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라고 왜 두려움과 불안, 고민이 없었을까요. 그분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기에 죽음은 두렵기만 하고, 고난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고뇌와 번민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에게 바치는 처절한 기도로 드러납니다. 하실 수 있다면 이 고통의 잔이 당신에게서 비켜가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당신을 집어 삼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다지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수난의 과정을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점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수모와 고통을 당한게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그런 상황에 휘말리신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원하셨다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하늘에서 ‘열 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들을 불러내어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소중한 아들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기 위해, 성경에 기록된 아버지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해치려는 자들의 손에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된 주님의 ‘라스트 댄스’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슬픈 결말’로 마무리 될 것을 뻔히 아는 그 길을 가시면서도 절망하지 않으십니다. 뼈와 살을 파고드는 극심한 고통에 까무려쳤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시면서도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고, ‘왜 나를 이런 절망 속에 그냥 내버려두시느냐’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뢰와 희망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씀은 슬픔에 빠져 ‘시린 한숨’과 함께 내뱉는 절규가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구원하시리라고 믿으며 부르는 ‘희망의 노래’의 도입부입니다. 그런 주님의 굳고 한결같은 믿음을 되새기며, 우리의 ‘갈대’같은 마음을 다잡아보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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