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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7) 사탄의 유혹과 극복 (창세3,1-10)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03 조회수392 추천수1 반대(0) 신고

 

유다교(유대교) 기독교 야훼의 에덴 동산 뱀 유혹 인간 아담 이브(하와) 선악과 분별 타락 저주 배밀이 피조물재미있는 성경 이야기 창세기 3장 에덴동산 선악과를 먹게된 하와와 아담 뱀의 유혹에 넘어가다

 

창세기(7)

 

사탄의 유혹과 극복  2023. 4. 4.

 

(창세3,1-10)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8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신 것을 보았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것은 기쁨의 삶이요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또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정말 행복한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불행이 들어왔습니까? 왜 우리의 삶이 행복해야하는데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설명해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창세3,1)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요한묵시록 202절에 보면 이 뱀을 가리켜 사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2 그 천사가 용을, 곧 악마이며 사탄인 그 옛날의 뱀을 붙잡아 천 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뱀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중에 하나인 실제 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사탄이 뱀을 통해서 여자에게 접근해서 유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불행이 들어오게 된 것이 사탄의 유혹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너희가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무엇이 사탄의 유혹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해야합니다. 그러면 사탄이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첫째, 사탄은 항상 부정적인 부분들을 부각시키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창세3,1)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하느님께서 원래 에덴동산에 있던 각종 열매들을 먹는 것에 강조점을 두셨습니까? 아니면 먹지 않는 일에 더 강조를 두셨습니까?

(창세2,16-17)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에 먹지 말아야할 것보다 먹을 것을 더 많이 두셨습니다. 그리고 먹지 말아야할 것보다 먹을 것에 더 많이 강조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수많은 과일보다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에 집중하도록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에 마음대로 먹을 수 열매가 10000개라고 하면, 먹지 말아야할 열매를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에 사탄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10000개의 열매보다 먹지 말아야할 한 개의 열매에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항상 우리의 삶 가운데서 부정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부각시킴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행복과 불행의 혼합물입니다. 우리가운데 100프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100프로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50은 행복한데, 50은 불행한 부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50의 행복한 부분을 확대해서 나머지 50프로의 불행을 극복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최악의 상황 속에서라도 최선을 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에덴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도 우리가 보기에 100프로 완전하게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땅을 만드셨지만, 그 땅은 아직 딱딱하여 사람으로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황무지와 같은 땅을 옥토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또 에덴동산에 처음부터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만드시고 우리가 그 생명나무열매를 따 먹음으로 영생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사람을 만드실 때도 처음에는 남자 혼자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남자 혼자서 하느님께서 맡겨두신 일을 감당하기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셔서 함께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수많은 과일은 먹게 하셨지만, 선악과는 하느님의 주인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처럼, 우리의 삶도 행복과 불행, 좋은 점과 부족한 점,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들이 항상 함께 섞여져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행복하고 좋고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에 집중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 부정적인 부분을 집중하게 함으로 결국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애가3,19-20) 19 내 고통과 내 불안을 생각함은 쓴흰쑥과 독초와 같은데도 20 내 영혼은 생각을 거듭하며 안에서 녹아 내리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가운데서 그가 당하고 있는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고 생각할 때 그의 마음가운데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래서 나는 말하였네. “나의 영광과 주님께 걸었던 나의 기대는 사라져 버렸구나.”(18)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들고 낙심해도 하느님께 대한 소망은 끊어지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인생의 어두운 부분들만을 생각하니까 심지어 하느님께 대한 희망조차도 끊어졌습니다. 그랬던 예레미야가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소망과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 회복합니까?

 

(애가3,21-23) 21 하지만 이것을 내 마음에 새겨 나는 희망하네. 22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23 아침마다 새롭다네. 당신의 신의는 크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가운데서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와 자에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가운데서 아직 하느님께서 그들을 죽이지 아니하시고 살려두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그를 죽지 않고 살려두신 것을 다시 마음에 담았습니다.

이성적인 머리로서는 여전히 어렵고 힘든 상황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가운데서는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께서 아직 그에게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삶에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희망이 생기니까 이제 하느님께 대한 희망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애가3,27-33) 27 젊은 시절에 멍에를 메는 것이 사나이에게 좋다네. 28 그는 홀로 말없이 앉아 있어야 하니 그분께서 그에게 짐을 지우셨기 때문이네. 29 그는 제 입을 먼지 속에 박아야 하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지. 30 그는 자신을 때리는 이에게 뺨을 내주며 수치를 가득히 받아야 하네. 31 주님께서는 마냥 버려두지 않으시네. 32 고통을 주셨다가도 당신의 크신 자애로 가엾이 여기시네. 33 그분께서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억누르지도 슬프게 하지도 않으시네.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어떤 고난과 고통이 있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삶 가운데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고난과 고통이 있더라도 하느님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근심하게 하시고 고통하게 하심이 절대 하느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삶의 어두운 부분만을 기억했을 때는 삶에 대한 희망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소망조차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께서 남겨두신 삶의 긍정적인 부분을 마음에 두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희망만 아니라 삶에 대한 소망까지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제일 큰 문제는 처음에는 그들은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문제는 철저한 패배의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들은 할 수 없다 해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패배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보고도 가나안땅의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에 더 강조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칼렙은 민수기1327절에서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를 보내신 그 땅으로 가 보았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곳 과일입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기들이 정찰한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그 땅은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모두 키 큰 사람뿐이다. 우리는 또 그곳에서 나필족을 보았다. 아낙의 자손들은 바로 이 나필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민수13,32-33)

 

같은 땅을 두고도 여호수아와 칼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거주민조차도 삼켜버리는 땅이라고 합니다. 열명의 정탐꾼의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보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나팔족(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의 뼈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니까 지금 사람들보다 몇 배나 큰 두개골과 전신 뼈였습니다. 그러니 조금 과장된 면은 있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의 이야기가 전혀 틀린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과 같이 가나안땅도 100프로 완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과일들이 있는 땅이었지만, 또한 여전히 개척을 해야 하는 거친 땅이었습니다. 이때 대부분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땅의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들을 더 부각시켰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에덴동산에서의 사탄의 시험을 말하면서, 그것이 사탄의 유혹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우리 인간의 본성은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을 더 확대해서 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게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에 주목하지 아니하시고, 있는 것이 주목하십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와 같이 우리에게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하느님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도바오로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오로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그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바오로를 절망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고 죽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바오로에게 있어서 약점을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이 머무는 통로(通路)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의 주위에 100프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100프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나를 잘 이해하지 않아서 나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집중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너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하는 부정적인 말들에 집중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믿음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둘째, 사탄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함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창세2,17)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런데 2절에서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라고 하느님의 말씀에 의심을 제기합니다. 이때 하와가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선악과는 절대 먹지 말라하셨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고 했다면 사탄은 절대 하와를 유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가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3,2-3) 라고 합니다.

그때 사탄이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3,4-5)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1절에 참으로3절에 죽을까4절에 결코라는 말에 줄을 치세요. 이와 같이 사탄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하느님의 말씀이 정말 맞냐?” 라고 의심을 제기합니다.

이때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 정말 그럴까?”라고 하면서 말씀에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사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와 같이 태초(太初)부터 지금까지 사탄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탄이 예수께 나아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마태4,3)라고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6) 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사탄이 유혹하기 직전에 317절에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탄은 네가 만일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의심을 제기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 반드시 네 삶을 책임을 주겠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내가 너를 반드시 복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 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상황을 나쁜 쪽으로 유도를 하고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사탄이 5가지의 나쁜 상황으로 욥을 유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소유물이고, 둘째는 자녀이고, 셋째는, 건강이고, 넷째는 아내이고, 다섯째는 친구입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욥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있는 소유물을 빼앗아 가면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내게 있는 물질을 빼앗아 가시는가 하느님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라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그래 내게 물질이 없어도 내게 내 사랑하는 자녀가 있지 그래도 역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라고 사탄의 시험을 이깁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가 어떠했습니까? 사탄은 심지어 사랑하는 우리 자녀를 빼앗아가면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때도 사탄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자녀가 없어졌는데 과연 하느님이 사랑하시겠냐?” 라고 합니다. 이때도 처음에는 괴롭다가도 그래 나에게는 그래도 육신의 건강이 있지, 그래 하느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셔라고 하면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처럼 사탄은 건강조차도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때 사탄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고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는 의심을 들게 합니다. 그러다가 또 그래도 내게는 사랑하고 나를 지지해주는 아내가 있지 않는가하면서 사탄의 유혹을 이깁니다.

그런데 사탄은 사랑하는 아내조차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때도 사탄은 욥의 아내의 말처럼그럴 바에는 하느님을 부인하고 죽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때 정말 죽고 싶은 고통이 있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위로해주는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하면서 사탄의 유혹을 이깁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를 사랑하고 위로해 주어야하는 친구들에게서 도리어 배신을 당합니다. 친구들은 우리를 위로하기는커녕 그것이 너희 죄 때문이라고 추궁합니다.

이것이 욥기에 나타난 사탄의 유혹입니다. 우리가 미사(예배)시간에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는 절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집에 돌아갑니다. 그래서 욥이 당한 유혹가운데 한 가지라도 당하면 그 상황을 통해서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돈을 잃어버리고, 자녀를 잃어버리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아내를 잃어버리고,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탄의 유혹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물질문제로, 자녀문제로, 건강문제로, 가정문제, 인간관계문제로 끊임없이 나쁜 상황으로 인도하고, 그 가운데 우리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사탄은 그 나쁜 상황을 통해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내게 물질이 없어도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기 바랍니다. 육신적으로 건강을 잃어도 하느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건강을 잃어버린 이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게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반드시 이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아멘 믿습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가장 무서운 재앙은 자연적인 재앙이나 물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재앙)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8,1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제일 큰 사탄의 유혹은 마음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어렵고 힘든 상황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사모(思慕)고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勝利)할 수 있는 하는 성도(聖徒)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째, 사탄은 항상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되어 주인노릇하게 함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사탄은 오늘 본문 5절에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세상주인)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운데서 이 말씀을 보면서 아니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하는 것이 무슨 사탄의 유혹이란 말인가?’ 주인노릇이란 주인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가정의 가장으로 주인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가장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기서 사탄의 유혹은 주인노릇이란 나의 주인 됨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책임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아담에게 왜 먹었느냐 하니까 그 책임을 여자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책임을 뱀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자신의 주인 됨에 대한 권리주장만 있고, 책임의식이라고는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느님과 같이 주인 노릇하여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서 내 기준에서 선이다 악이다 판단만을 합니다. 그리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아무 책임도지지 않고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려 하는 것이 사탄의 유혹,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나라 국회를 보세요. 모두 주인노릇만을 하려고 합니다. 모두 자기가 역사에 있어서도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 서로를 판단하고 단죄하고 또 염려만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어떤 누구도 그 어떤 문제에 있어서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탄의 시험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진짜 우리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은 3년 동안 밤낮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30년 넘게 제자훈련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제자는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만을 꾸미고 있습니다. 또 나머지 제자들은 서로 누워서 자신의 발만 씻겨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짜 주인이신 예수님은 너희들이 왜 그러느냐고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왜 이런가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희생하고 책임지고 섬기려 하지 않는 상황가운데 혼자 조용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섬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팔려는 제자조차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들이 다 네 탓이라고 하는 세상가운데, 아무 잘못도 없이 모두 내 탓이라고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랬을 때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펴주심으로 온 세상의 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으로 다스리시고, 희생함으로 봉사하고, 끝까지 누구라도 사랑함으로 충성함으로 사탄의 모든 유혹에서 승리하고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 행복의 에덴동산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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