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현세에서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모의고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08 조회수441 추천수2 반대(0) 신고

 

개종 후 부활성야 미사 후에 신자들끼리 나누는 인사 가운데 하는 인사가 "부활축하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인사를 하는 모양이다 하고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지나면서 이 인삿말에 대해 묵상을 많이 해봤습니다. 단순히 액면 그대로 말한다면, 그렇다면 부활을 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봤습니다. 그럼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부활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부터 따져봐야 될 것 같습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사전적 의미와는 별개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의미와 신앙 특히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종교적인 의미와는 미세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의미에서만 바라본다면 부활은 죽음이 전제됐을 때 성립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그건 일차적으로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하신 그 말씀 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부활을 이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할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실제 생물학적인 죽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광의적인 해석을 했을 때 현세에서 부활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만이 우리가 매년 기념하는 부활절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냥 단순히 매년 교회가 하는 전례의 일부분이까 단순히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만 기념을 한다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도 수없이 이것에 대해 묵상을 하고 또 교회 문헌을 바탕으로 많은 고민을 해봤지만 뾰족한 답을 찾기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 신부님께 질문을 드려도 명확한 답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이유가 신학적으로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난해한 부분이 있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세계를 완전히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세계는 최종 공심판이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공생활을 하실 때 말씀하신 가르침에 근거해 논리적인 추론으로 그게 무엇을 말씀하실지 그저 추측만 할 따름입니다. 이 추측은 달리 표현해서 묵상이 될 겁니다. 

 

이런 모든 사실을 우선 전제한 상태에서 부활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현세에서 매년 기념하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겁니다. 다시 반복된 표현입니다만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은 죽음 이후의 부활을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그때 제정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에는 부활은 언급돼 있지 않지만 그 말씀에는 부활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활의 전제가 죽음이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며 또 이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고 부활은 죽음이라는 연장선 상에 있기에 다시 죽지 않는 몸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표본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걸 이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단순히 그렇다고만 말씀만 하셔도 되는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그 누가 그런 사실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또 그걸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있는 것입니다. 공자의 말을 빌리면 공자에게 죽음의 세계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을 때 공자는 이 세상의 일도 모르는데 죽음의 세계를 어찌 알겠는가 하는 그 말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제 의문의 범위가 조금은 좁혀졌습니다. 우리는 매년 이 세상에서 해마다 전례적으로 부활을 기념합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그 의미와 연관지어 생각해본다면 부활 이전에 죽음이 반드시 수반되듯이 그 죽음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과 같은 죽음이 아니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당신께서 맞이하는 죽음이 있기 전에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고난의 의미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런 고난도 상징하겠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고난을 현대적인 의미에서 한번 재해석해본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영적인 전투와 같은 고난이 될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전투에서의 승리는 역설적인 의미가 되겠지만 잘 죽어야 하고 확실히 죽었을 때만이 얻을 수 있는 승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죽어야 제대로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정쩡하게 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 '자아'는 바로 예수님을 따르르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을 때 그때의 '자신'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쩌면 예수님의 죽음을 매 미사 때마다 기억을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기억만 한다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실지는 당연할 것입니다. 그건 죽음을 기억하면 당연히 부활도 따라오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은 덤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결론이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현세를 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것은 마지막 때 제대로 부활을 하기 위해 부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이 연습을 이 지상에서 부지런히 잘 한 사람은 영생의 몸으로 잘 부활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과연 마지막 날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몸을 입기 위해서는 단순히 매년 치르는 부활 미사에 참례해서 그 전례가 주는 의미에서 부활의 의미를 찾는다면 어쩌면 참으로 형식적이고 허망한 부활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를 잘 되새겨봐야 진정한 의미의 부활절을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절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그 의미에 합당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열심히 산 사람에게만이 마지막 때 부활의 영광을 얻는 수혜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실전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많은 모의고사를 치른 사람이 그게 경험이 되어 여러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듯이 시행착오를 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게 되면 실전에서 좋은 점수를 얻을 수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매년 부활절을 이런 각오로 임해야 마지막에 영광스런 부활의 영예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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