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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부활 대축일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09 조회수373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 부활 대축일 가해] 요한 20,1-9 

 “그리고 보고 믿었다.“

 

 

신학교 입학 시험과목 중에 교리시험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금새 답을 적었는데, 한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드러내는 증거는 무엇인가?" 여러분은 이 문제의 답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문제의 모범답안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묻혀있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가리킨다는 겁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빈 무덤’ 자체는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100% 명확하게 입증하는 ‘객관적 증거’가 되진 못합니다. 객관적 증거로 따진다면 부활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멀어질 뿐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주님의 ‘빈 무덤’을 바라본 세 인물의 관점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주님의 부활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이성과 상식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부활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조망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관점입니다. 주간 첫날, 즉 주일 꼭두새벽부터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그녀는 그분의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이 치워져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는 “블레포”(blépein)로서 대상을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 무덤덤하게 쳐다보는 육체적인 ‘봄’을 의미합니다. 즉 그녀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아 시야가 어두운 상황 속에서 무덤 입구에 있던 돌이 치워져있다는 사실만 대략적으로 확인하는데에 그친 겁니다. 물론 아직 날도 컴컴한데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두렵고 놀라서 그랬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갔다’는 잘못된 결론을 성급하게 내려버린 것은 큰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베드로 사도의 관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은 베드로는 한달음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그 현장을 유심히 바라‘보지요’.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는 “테오레오”(theoréin)로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나 사물을 꼼꼼하게 ‘살펴봄’을 의미합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상황을 대충 훑어보고 잘못된 결론에 빠진 마리아 막달레나보다는 분명히 나은 모습이지만, 그의 ‘봄’은 우리가 본받고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숨은 그림 찾기’를 하면 제대로 찾아낼 수 없는 것처럼, 주님께서 생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언급하셨음에도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베드로는 주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메시지’와 ‘의미’를 찾아야 할지를 알지 못했기에 더 깊은 믿음을 향해 한 발 더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린 겁니다.

 

마지막은 요한 사도의 관점입니다. 그는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고 자기는 나중에 들어갑니다. 성서신학자들은 그러한 요한의 행동이 베드로 사도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저는 그의 행동에 단순히 ‘양보’의 미덕을 넘어선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주님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중요한 말씀들과 가르침들을 하나씩 상기해봄으로써, ‘빈 무덤’이라는 표징 안에서 자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찾아야 할지 차분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지요. 그랬기에 그저 눈에 보이는 사실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는 “호라오”(oràn)로서 의미와 이유를 생각하며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을 통찰하여 봄을 의미합니다. 즉 요한은 주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사실을 통해 주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와 깨달음을 주고자 하시는지를 적극적으로 헤아려보려 노력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의 ‘봄’은 사실 확인에 머무르지 않고 참된 ‘믿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의지와 결단으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부활의 신비’를 자기 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고 했습니다. 요한이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주님께 사랑받은 만큼 그분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신앙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없습니다. 주님을 깊이 사랑해야만,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께서 맡기신 계명과 십자가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참된 사랑의 힘으로 부활의 신비를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는 구원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되어 삶의 모든 순간을 기쁘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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