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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활묵상: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법언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13 조회수647 추천수1 반대(0) 신고

 

어떤 자료를 보다가 신앙과는 전혀 관련없는 것이지만 떠오르는 묵상거리가 있어서 공유를 하고자 합니다. 이를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법언이 있었고 그 법언을 생각하다보니 신앙으로 확대된 묵상이었습니다. 우리는 권리라는 말을 듣게 될 때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까요? 그 말이 가지는 뉘앙스에는 해야 할 의무감이 존재함과 동시에 권리를 가지게 되면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누릴 특권을 가지게 되는 일반원리가 있습니다. 특권이라는 말은 말 액면 그대로 그 뜻만 생각하면 단순히 생각해서 특별한 권리일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특권은 특별한 권리라서 특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가지지 못하는데 그만이 가지고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유보됐기 때문에 그 권리가 특권이라고 보는 게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권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특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우는 일반적인 기초 사실이 있습니다. 권리와 의무입니다. 권리가 있으면 그에 합당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를 다해야 그 권리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요?

 

원론적으로 접근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리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입니다. 이건 인간세상에서 말하는 천부적인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 권리는 그 어떤 사람도 배제할 수 없는 권리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각자 개인과 맺은 하나의 계약입니다. 이 계약이 언제 체결돼서 그 효력이 발생하는 것인가요? 바로 그건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되는 그때입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권리를 하느님으로부터 권리를 수권받았음에도 그 권리를 잘 향유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걸 생각하는 걸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해 성찰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찰을 했을 때 이게 잘못되면 그건 하나의 직무유기와 같은 것입니다. 권리가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 의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반드시 해야 하는 사항입니다. 얼마 전 부활성야 미사 때에도 했지만 우리는 세례 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또 기억하기 위해서 '세례갱신서약'을 다시 하게 됩니다. 이 갱신서약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세례 때 하느님께 약속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상기를 하고자 하는 뜻만 있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와 함께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게 있을 겁니다. 그 약속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이행에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그에 맞는 행동을 하며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됐는가 하는 것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지 못했을 땐 하느님의 자녀라는 특권이 있지만 그 특권은 그냥 맹목상의 특권으로 전락하고 말 그런 특권이 되게 됩니다. 수많은 강론을 통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서 하느님과 마주할 때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느냐 하는 것보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실천했는지가 최후의 심판 잣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강론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하나 더 책임을 물으신다고 한다면 그게 과연 무엇일까 하는 걸 묵상해봤습니다. 그건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그 사람만의 달란트를 어떤 누구에게나 다 맡겼을 것입니다. 각각의 은사에 따라 그건 다 다를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우리가 말하는 어떤 능력만을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달란트는 제가 서두에 언급한 '특권'과 같은 권리도 포함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그 결과물이 성과와 이득으로 판단을 합니다. 장사로 말하면 이윤이 될 것입니다. 이에 한정하지 않고 권리라는 개념도 포함을 시키면 우리에게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떤 책임을 물으실 것 같습니까? 권리에 맞게 얼마나 그 권리를 잘 사용해서 유용하게 잘 활용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걸 잘 활용하지 않으면 달리 표현하면 그걸 게을리했다면 당연히 그 결과물이 한 달란트일 수도 있고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도 있는 것처럼 그게 성과가 없으면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권리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직무유기'를 범하는 것과 동일할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직무유기 개념과는 조금은 성질을 달리할 겁니다. 세상에서도 법을 적용할 때 어떤 권한이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그 직무에 대해 더 소흘히 직무를 수행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법적인 책임이 더 가중됩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의 법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해 모든 책임을 들기 위한 회피수단으로 만약 생각하게 된다면 그건 하느님의 자비를 악용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하긴 하지만 이와 함께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도 같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그외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권리를 잘 사용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책임은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분명히 하느님께서 물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에게는 세상 법언인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에서 이때 이 말 속에 있는 '잠자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건 아주 간결한 표현을 한다면 신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교회법에서 말하는 그런 의무를 적용하는 것보다는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예로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극단적인 예이긴 예입니다만 주일신자와 평일신자를 저는 예를 들고 싶습니다. 이건 이해를 돕고자 하는 표현이지 절대적인 설명은 아닙니다. 

 

가령 주일만 지키는 주일신자와 주일도 잘 지키지만 평일에도 미사를 할 수 있으면 적극적인 노력으로 미사를 참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천국에 가는 여정이 어떨까요? 주일만 지키는 신자도 크게 나눠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말 주일만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일만 지키는 신자도 있을 것이고 주일 외에도 미사를 참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최소한의 의무만을 이행해 신자로서의 자격만 유지하려고 하는 신자도 있을 겁니다. 저는 전자의 신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한 번만 주일을 지키는 결과물은 같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다른 평가를 하실 것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이걸 간단히 생각해보면 '과부의 헌금'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게 될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은 액수 그 자체로 평가를 하는 게 아니고 그 과부가 처한 현실을 감안했을 때 그 과부의 헌금 가치가 더 중요한 의미라는 게 복음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주일만 지킬 수밖에 없는 신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주일을 지키는 게 바로 과부의 헌금처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주일을 한 번만 지킨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럼 주일만 지키는 신자 두 부류와 또 평일 미사까지 지키는 신자 이렇게 세 부류가 천국을 가는 여정에서 비교를 해본다면 그 모습이 어떨까요? 

 

세상에서도 어떤 목적지를 갈 때 그 목적지를 자주 간 사람과 자주 가지 않은 사람은 조금은 차이가 날 것입니다. 자주 간 사람은 상대적으로 봤을 때 자주 가지 않은 사람보다는 좀 더 목적지를 잘 찾아 갈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르긴 몰라도 평일미사도 열심히 참례하며 주일도 성실하게 지킨 신앙인이 이런 예처럼 만약 천국을 가는 그 여정이 단순히 주일의무만을 지키는 신앙인과 비교해서 천국을 향해 가는 그 여정이 더 확실하게 선명하게 잘 여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이치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은 바로 주일 외에도 얼마든지 하려면 평일에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게을리한 신자가 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이런 사람에게까지 하느님의 자비가 똑같이 적용이 된다면 그건 하느님의 정의에 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게 정의에 반하지 않게 된다면 굳이 항상 깨어있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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