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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4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13 조회수288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1-12

그 무렵 불구자가 치유받은 뒤, 1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이 다가왔다.
2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
3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미 저녁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5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6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다.
7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

 

8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성전 경비대장은 성전 경비와 질서를 유지하는 총책임자로서, 대제관 다음으로 높은 제관이 그 직책을 맡았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들이 예수 부활을 인정하지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 사도들이 전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는 구약의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들이 처형한 나자렛 예수의 부활이라는 실체였다. 동시에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3

최고의회는 저녁에 즉시 소집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마티아을 사도로 뽑을 때 모인 이들으 120명 가량이었고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3,000명 가량이었으며, “주께서는 그 모임에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늘려 주셨다”. 이제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설교를 듣고 장정 수효만도 5,000명 가량이 입교한다. 루카는 교세가 날로 확장해 간다는 사실을 점진적으로 묘사한다.

 

5

사두가이계 고급 제관들. 평신도 원로들, 그리고 바리사이계 율사들이 최고의회를 구성했다. 정원은 71명이고 의장은 대제관이다. 70년 이후에는 바리사이계 율사들이 주축이 되어 야니아에서 최고의회를 새로 구성했고, 2차 독립전쟁 이후에는 갈릴리 지방의 우샤- 벳 세아림-세포리스- 티베리아로 거리를 옮겼다.

 

6

대제관은 원래 조ㅇ신적이었으나, 헬라시대,로마시댕는 정교간 알력과 권모술수로 파직, 면직되는 일이 잦았다. 안나슨,s 6~15년에 봉직했다. 그는 퇴직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야파는 안나스의 사위로서 18~30년에 봉직했으니, 사도시대의 현직 대제관이다. 요한과 알렉산드로는 정체불명의 인사들이다.

 

7

이런 일은 어떤 일인가? 앞 문맥 2절은 보면 사도들의 예수 부활 설교이고, 뒷 문맥 9절을 보면 앉은뱅이치유 사건이다. “이런 일은 설교의 치유를 합쳐 사도들의 활약상 전부라고 보면 무난하다.

 

8

베드로는 자력으로가 아니고 성령으로 가득 차서 ... 말한다”, 예수를 비롯해서 성령을 중만히 받은이들은 세례자 요한, 성모 마리아, 엘리사멧, 즈가리야, 사도들, 베드로, 예루살렘의 교우들, 스테파노, 바르나바, 바오로 등이다.

 

11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구약성서 가운데 시편 118,22를 인용한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류구원의 사건인 까닭에, 구약성서 어디엔가 이 사건이 예견되었을 것으로 믿고 해당 성서 단락들을 찾았다. ,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될 듯한 구절들을 찾아내었다. 그들이 찾아낸 한 구절이 곧 시편 118.22(-23)이다.

 

그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같이 여겨 죽였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부활시키시어 모퉁이의 머릿돌마냥 가장 중요한 사람, 곧 구원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12

명시적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이 확실하지만 자신도 므르는 중에 그분을 믿는 사람도 구원받는다는 것이 신학계의 통설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바지 않았어도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정신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구원의 길이 열려야 한다는 견해다. 루카는 신약성서 저자들 가운데 가장 폭넓은 구원관을 가졌지만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진 동양의 종교들 안에서도 구원의 표지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에게 알려진 세계는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뿐이었고 그가 만난 종교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다신교적 신앙뿐이었기 때문이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21장은 저자의 후계자들 이른바 요한학파가 복음서의 최종 편집 때 첨가한 부록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티베리아 호숫가 발현사화가 교회론적, 사목적 중점을 두고서 전개되고 일종의 결말로서 복음서 증인의 신빙성이 강조된다. 이 대목의 발현사화는 앞의 두 발현사화와 여러 차이가 있다. 우선 자소가 구별된다. 그리고 앞의 두 대목에서는 제자들이 한데 모인 상황에서 부활한 예수의 발현이 이루어진 데 반해, 여기서는 오히려 제자들이 흩어진 상황이 돋보인다.

 

또한 문맥과 내용상 상충되는 점도 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부활발현을 두 차례나 체험했으므로 부활한 예수를 즉시 알아볼 수 있었을 밥한데도 이 대목에 그런 내용은 전혀없다. 오히려 앞에 보도된 두 사건의 전단계인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체험에 직결되기에 더 적합한 인상을 준다. 아무튼 앞의 두 대목과는 독립된 전승자료임에 틀림없다. 이 대목의 발현사화는 두 전승이 섞여있다. 제자들이 예수로 인해 고기를 많이 잡게 된 기적과 부활한 예수와 함께 나눈 식사 이야기다, 그리고 제자들이 두 번에 걸쳐 그들을 뭍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상응하여 부활한 예수를 두 번이나 알아본 것으로 보도된 점도 유의해 볼 만하다.

 

1

부활한 예수의 또 다른 발현을 시사한다.

예수의 자기계시로서 부활발현을 특징짓는다.

 

2

여기서 열거한 제자는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 일곱 제자는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 일곱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고 또한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시사한다.

 

3

고기잡이 기적과 관련된 상황설명이다. 당시 티베리아 호수에서는 보통 밤에 고기를 잡았다. 낮에는 고기들이 호수 바닥에서 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

제자들이 고기잡이하던 상황에서 부활한 예수의 발현상황으로 연결되는 역할을 한다,

20,14: 루카 24.16 참조.

 

5

직역하면 어린애들아!“ 신뢰가 두터운 관계를 시사한다. 요한 교회에서만 사용된 특별한 호칭인 듯하다. 여기서는 문맥상 의역했다.

생선은 원래 빵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구운 고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먹을 껏(생선) 좀 가지고 있소?“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 문맥에서는 생선을 잡았는지를 묻는다. 원문의 표현을 살리자면 오히려 생선을 잡지 못했소?“라고 의역할 수 있다.

 

6

행운의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잡을 것입니다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명령과 약속의 형식으로 표현된 말로서 예수의 명령에 따르면 제자들은 고기를 잡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루카 5,6-7 참조).

일종의 기적사화 묘사다. 부활한 예수는 이제 기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 기적은 사랑받는 제자가 예수를 알아보게 하는 한 표징이다.

 

7

애제자가 베드로보다 먼져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았다는 데 역점이 있다. 문맥상 베드로의 애제자에 관한 보도와 관련되고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사실상 고기잡이의 기적사화는 11절에 더욱 매끄럽게 연결된다.

 

우선 베드로의 성급한 모습이 시사된다. 그물에 가득 담긴 고기들은 생각지도 않고 즉각 반응을 보인 베드로의 모습은 그가 예수를 부인하던 장면을 상기시킨다. ”알몸이었던 베드로가 겉옷을 즉시 걸쳤다는 말은 죄를 범한 후 알몸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의 이런 반응은 참회를 우의적으로 뜻한다.

 

베드로가 호수로 뛰어든 것은 부활한 예수에게 제일 먼저 이르게 되는 베드로의 우선권을 시사한다. 문맥상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목권을 부여하는 장면과 관련된다.

 

8

원문에는 200페퀴스, 한 페퀴스는 45.8센티미터 또는 52.5센티미터에 해당한다.

 

9

부활한 예수가 발현하여 제자들을 위해 마련한 식사의 기적을 시사한다.

 

10

예수의 모습을 시사하는 말로서 고기잡이의 기적과 제자들을 식사로 초대한 발현사화를 연결하고자 하는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

 

11

베드로에게 부여된 사목권을 시사하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알 수는 없으나 상징적 의미를 내포된 듯하다. 분명한 것은 큰 물고기들이 그물에 가득 찼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내용과 함께 이 숫자는 기적사화 안에 보도되어 고기잡이 기적의 놀랍고 위대함을 시사해 준다는 점이다. 교부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시도된 가설들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 종류의 수자로서 충만함을 뜻한다. 부터 17(=10+7)까지의 수를 모두 합한 것으로 충만함을 뜻한다.

 

153=3x50+3 으로서 3은 삼위일체를 뜻한다. 100은 이방인 전체를 50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3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문자가 표시하는 숫자에 상응한 의미를 지민다. 153이란 정확한 숫자는 목격자의 증언임을 시사한다. 아무튼 물고기들이 그물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는 말과 함께 이숫자는 충만성과 보편성을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로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물고기들사람을 낚는 어부들인 사도들의 인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 민족과 모든 신앙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부활한 예수의 어린양들이 언급된 대목과도 맥락이 같다.

 

12

그물은 예수 활동의 결실이니 보편교회를 상징한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보편교회의 일체를 뜻한다. 예수는 이 일치를 위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드렸다.

 

발현사화의 절정으로서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가 마련한 아침식사에 초대되었다는 내용이다, 사실상 고기잡이 기적사화는 11절로서 끝난다.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의 부활발현과 부활한 예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을 시사한다.

 

 

13

6.11 참조. 부활한 예수는 식사 초대의 주인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또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계시한다. , 제자들을 새로운 식사 공동체로 형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성찬례 공동체와 직결된다기보다 지상 예수와의 공동체가 부활 이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지속됨을 뜻한다. 고기잡이 기적과 연결된 이 보도에서는 부활한 예수의 이 행도은 자신의 풍요로운 사랑과 권한에서 연유된다. 부활한 예수가 지상 삶에 필요한 빵과 생선을 배불리 먹여 주었다는 점보다는 부활한 예수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와 부활한 예수가 주는 신적 생명에 관한 관점이 지배적이다. 부활한 예수는 신앙공동체에게 언제나 새롭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그런 시각의 실존에 더 역점이 있다.

 

14

예수의 부활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이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발현한 예수의 부활사화를 앞의 두 사화와 같은 맥락에서 보도하려는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때는 무교절이었으니 3_4월경입니다. 바로 지금의 때이며 시간들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았다는 것은 산란기때는 고기들이 밖으로 얕은 곳으로 몰려 나오지만 산란이 끝나면 다시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모를 베드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호수에는 물길이 있어서 물길 양쪽은 언덕처럼 둔덕이 있어서 물길은 깊습니다. 그러나 둔덕들은 얕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해서 그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당연히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시다라는 말에는 더욱 놀라워 벗었던 몸에 겉옷을 걸치고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렇습니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물고기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는 큰 물고기들이 나오는 시간이고 아침에는 모든 물고기들이 몰려다니면서 먹이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산란때는 육지에서 멀지않은 곳으로 물고기들이 몰려오지만 산란이 끝나면 다시 깊은 곳으로 돌아갑니다. 특히 큰 물고기들은 그렇습니다. 4월 중순인 현재 우리들도 산란이 끝나가는 때이니 이제는 깊은 곳에 올바름의 그물을 던져볼 일입니다. 독서가 사도행전이  병행됨을 유의해  새겨봅니다.

 

저는 주해서처럼 오른쪽을 행운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대사제의 종 말코스의 오른쪽 귀를 시몬이 칼로 쳐서 자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왼쪽 귀가 아니라 오른쪽 귀입니다. 올바른 소리가 들려오는 오른쪽 귀였으니 그는 그 귀가 잘린다면 왼쪽 귀만 있게 되니 왜곡된 소리만 들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쪽귀가 다 잘 들려야 스테레오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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