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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10장) 노아의 자손(子孫)들 (창세10,1-32)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28 조회수358 추천수2 반대(0) 신고

 

창세기 PS: 23. 4. 28

 

노아의 자손(子孫)

 

(창세10,1-32)

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펫의 족보는 이러하다. 홍수가 있은 뒤에 그들에게서 자식들이 태어났다.

2 야펫의 아들은 고메르, 마곡, 마다이, 야완, 투발, 메섹, 티라스이다. 3 고메르의 아들은 아스크나즈, 리팟, 토가르마이고, 4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아, 타르시스, 키팀, 도다님이다. 5 이들에게서 바닷가 민족들이 퍼져 나갔다. 이들이 지방과 각 언어와 씨족과 민족에 따라 본 야펫의 자손들이다.

6 함의 아들은 에티오피아, 이집트, , 가나안이다. 7 에티오피아의 아들은 스바, 하윌라, 삽타, 라아마, 삽트카이다. 라아마의 아들은 세바와 드단이다. 8 에티오피아는 니므롯을 낳았는데, 그가 세상의 첫 장사이다. 9 그는 주님 앞에도 알려진 용맹한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니므롯처럼 주님 앞에도 알려진 용맹한 사냥꾼이라는 말이 생겼다. 10 그의 왕국은 신아르 지방의 바벨과 에렉과 아카드와 칼네에서 시작되었다. 11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아시리아로 가서 니네베와 르호봇 이르와 켈라를 세우고, 12 니네베와 큰 성읍 켈라 사이에 레센을 세웠다. 13 이집트는 루드인, 아남인, 르합인, 납투인, 14 파트로스인, 후에 필리스티아족이 나온 카슬루인, 캅토르인을 낳았다. 15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 히타이트, 16 여부스족, 아모리족, 기르가스족, 17 히위족, 아르케족, 신족, 18 아르왓족, 체메르족, 하맛족을 낳았다. 그 뒤에 가나안족의 씨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19 가나안족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라르 쪽으로 가자까지 이르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츠보임 쪽으로는 레사에 이르렀다. 20 이들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민족에 따라 본 함의 자손들이다.

21 셈에게서도 자식들이 태어났는데, 그는 에베르의 모든 아들들의 조상이며 야펫의 맏형이다. 22 셈의 아들은 엘람, 아시리아, 아르팍삿, 루드, 아람이다. 23 아람의 아들은 우츠, , 게테르, 마스이다. 24 그리고 아르팍삿은 셀라흐를 낳고 셀라흐는 에베르를 낳았다. 25 에베르에게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펠렉이다.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 동생의 이름은 욕탄이다. 26 욕탄은 알모닷, 셀렙, 하차르마, 예라, 27 하도람, 우잘, 디클라, 28 오발, 아비마엘, 세바, 29 오피르, 하윌라, 요밥을 낳았다. 이들이 모두 욕탄의 아들들이다. 30 그들의 거주지는 메사에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 쪽까지였다. 31 이들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민족에 따라 본 셈의 자손들이다.

32 이것이 민족 계보에 따라 본 노아 자손들의 씨족들이다. 홍수가 있은 뒤에, 이들에게서 민족들이 세상으로 갈라져 나갔다.

 

창세기10장은 성경이 이스라엘인들의 역사서일 뿐이라는 혹자들의 그릇된 성경관을 불식시켜 줄 만한 확실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즉 성경 기록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엮어져 가기 전에, 온 인류가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음과 인류 번성을 말씀하신 하느님의 약속(9:1)이 어떻게 실현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본장은 각 인종의 기원과 그 분파를 제시함과 동시에 인류의 구속을 추진해 가시는 하느님과 언약을 맺었던 인류의 대표자 아브라함(12:1-3)의 뿌리와 출생 배경을 알려 주는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온 인류가 노아의 세 아들을 각각의 조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방인들도 근원적으로는 선민 이스라엘과 한 형제이며 하느님의 권위 아래 동일하게 머문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이에 관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사도 17,26)라고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10장은 노아의 세 아들들에 따라 크게 3분 되어 1-5절은 야벳의 후손들이 6-20절은 함의 후손들이, 그리고 21-32절까지는 약속의 백성들인 셈의 후손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땅이 하느님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때 우리는 국수주의적이며, 폐쇄성이 짙은 지역감정과 인습과 문화의 틀을 벗어버릴 수 있으며 참된 평화와 화합과 신앙을 이뤄갈 수 있을 것이다(묵시7,9).

 

1. 야펫의 후손(10,1-5)

대홍수 후 이 땅에 생존했던 인간은 단지 8명에 불과했다(8,18; 베후2,5). 그러나 인간의 번성을 약속하신 하느님께서(9:1.7) 풍성한 번식과 삶의 터전을 허락하셔서 인간들이 이 땅에 퍼져나가게 하셨다.

이러한 하느님의 섭리를 밝혀 주며 특별히 각 지역에 산재한 모든 종족들의 원뿌리가 노아의 세 아들임을 강조한다. 즉 셈(Shem)은 오늘날 근동 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는 셈족의 조상이며, (Ham)은 아프리카를 중심한 흑인들의 조상이고, 야펫(Japheth)은 아리안 족 또는 인도-게르만족이라 부르는 유럽 중심 민족들의 조상이다.

그런데 이들 각각의 조상들 중 본문에서처럼 야펫과 그 후예들이 초두에 먼저 기록되고 아울러 그 기록이 매우 간략히 언급된 이유는, 성경이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가장 미미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노아의 예언대로(9,27)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스페인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해 갔다. 그러나 그들은 야훼 신앙과 무관한 채 영토와 인구의 팽창및 지적(知的) 우월성(철학, 과학, , 정치, 군사 등)을 과시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 수 없었으며 '셈의 천막에 안에 살게 하시'(9:27)겠다는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하느님이 계시는 영적 천막에 초대되는 영광을 얻었다(이사42,4).

이처럼 하느님은 노아시대부터 벌써 이방인의 구원 계획을 계시하셨으며 그 일을 주도해 오셨던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하느님은 인류의 육적 생명과 더불어 영적 생명도 풍성케 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시다.(민수16,22; 요한5,24).

 

* 고대 국가의 태동. - 국가 형성의 3대 요소는 주권, 영토, 국민이다. 성경역사에서 이 3요소를 완전히 갖춘 최초의 국가 형태가 본장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창세기417절에 카인이 성()을 쌓고 정착과 군집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것을 국가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창세기 10장에 언급된 제 국가는 타민족의 지배를 받지않은 '주권'국가들로서 자주적으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넓혀갔고, 타민족과 엄연히 구분되는 '영토'를 소유하며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뤄갔다. 그리고 대부분이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국민'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였기에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시간적으로 본장 초두에 삽입되어야 한다) 국가의 통합을 신속하고 확고히 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태동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하느님의 명령의 성취이자 인류를 풍성하게 하셔서 각자 삶의 처소에서 독특한 문화와 생활을 영위케 하신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이런 가시적(可視的)인 국가의 태동과 더불어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원하며 참 평화와 바른 질서가 정착된 당신의 나라 건설도 함께 추진해 가셨다. 그 같은 계획의 일환으로 하느님께서는 많은 민족과 나라들 가운데서 당신의 뜻을 받들며 구원의 은총을 세상에 전달할 도구로 한 나라를 예비하셨다(12,1-3).

이처럼 가시적이든 불가시적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의 출발은 하느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 국가들의 운명 역시 하느님의 주권에 따른다는 것을 암시한다(신명32,8 욥기12,23 사도17,26).

 

*인종과 성경 기록. -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啓示)역사를 담당해 온 이스라엘 민족 외에 그 주변의 수많은 민족들에 대해서도 필요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인종 분류의 기준으로 성경에서 사용된 '민족'(, )은 원해 유전적인 한 혈족의 의미로 사용되며, 국민(, 고이)은 지리적 제한성을 지닌 정치적 집단의 뜻으로 널리 사용된다.

그런데 본장에서는 지리적 제한의 의미를 지닌 ''(, 에레츠- 5.11.20.31), '언어'(, 라손)를 주요 분류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인종 분류에 있어 후자의 뜻이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국 성경의 인종 분류는 문화 인류학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외형에 따른 생물학적 분류(피부, 골격 등)에 따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인류학자들 중 일부(형질 인류학자)는 본문에 기록된 인종 기원론을 일고의 과학적 가치도 없는 신화(神話)로 처리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인류 기원에 관한 한, 성경의 기록보다 더 모호한 개념을 갖고 있다. 특히 외관상으로 나타난 생물학적 형질에 따라 코카서스인(백인), 몽골리안(황인), 니그로족(흑인)으로 크게 삼분하고 다시 신체적 특질에 따라 수백종족으로 세분하는데, 이러한 현상적 파악은 자칫 인종 편견만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나 인종 형태를 연구하는 형질 인류학(Antropolography)은 인간의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 인류학과는 다르다.

사실 인종이란 말에는 지리적, 문화적, 언어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슬라브족, 게르만족). 어떤 경우에는 인종이 민족적, 국가적 형태를 지칭하기도 한다(중국인, 멕시코인). 그러므로 피부색이나 신체 골격 등 유전인자에 따라 인종을 분리하려는 자연 과학적 접근보다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인 정치, 문화, 언어, 지리적 요인으로 인간을 분리하는 인문 과학적 접근이 앞서 성경에서 제시된 분류기준과 상호 부합한다.

성경에 기록된 민족 기원론은 바로 10장에 기록된 노아 아들들의 후예를 근거로 한다. 특히 11장까지는 세상에 인간이 퍼진 이유르 설명하는 자료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민족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홍수 후에 살아남은 자들로부터 출발한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대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은 인류의 뿌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며, 아울러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민족의 씨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은 오늘날의 문화 인류학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현대적 연구 형태를 모두 포괄한 인종의 기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함의 후손(10,6-20)

창세기 10장은 아비의 실수를 조롱거리로 삼은 패역으로 아비 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들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함의 후손은 넓은 영토와 많은 수의 사람, 그리고 강건한 체력을 가짐으로써, 세상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나 그들의 번영은 이 세상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더욱이 순간적인 것에 불과했다. 즉 그들이 팔레스틴과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기름진 땅을 차지하였고, 하느님의 일반 은총에 따라 이 땅에서 성공과 번영을 누리며 살았던 것을 초기 역사는 보여 준다.

그러나 그들의 번영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그들을 해롭게 한 것이었으며(잠언21,4), 그들의 번영과 더불어 저주와 심판이 예비되어 있었다. '제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9,25)는 노아의 저주는 그들의 잠깐의 번영 뒤에 곧바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 시대 때 함족인 가나안 족속은 셈족인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하였고,(여호9,3)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복속되고 말았다.(1열왕9,20-21) 그 후 그들의 세계 역사의 맨 끝 행렬에 위치하여 수동적이며 보잘것없는 존재로 타 종족의 지배 아래서 많은 수모와 비참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저주 아래 있는 이라도 일시적으로는 물질과 영예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하느님의 부름 받은 자녀들과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역사라는 배의 키를 잡고 당신의 공의로우신 뜻대로 항해(航海)하시는 하느님은 현상적인 풍요와 자신의 힘에 눈이 먼 이들의 어리석음을 끝내 징벌하시고, 대신 당신의 약속을 간직했던 민족을 융성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번영의 척도를 떠나 무엇이 궁극에 가서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가를 영적인 통찰력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 세상의 첫 영걸(英傑) 니므롯. - 홍수 이후 시대의 당시 사회는 각각의 혈연을 통한 부족(附族) 혹은 도시 국가의 형태를 띠었기에 그 부족이나 도시 국가를 통치하는 권력자가 요청되었고 아울러 그에 따른 각종 전투가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힘만이 횡행하던 때로서 자연히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하느님의 권위가 전혀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때에 '반역자', '대적자'란 뜻의 이름을 지닌 니므롯이 야훼를 거스리는 힘 있는 자로 등장하여(9), ()적 권위에 도전할 뿐 아니라 무력으로 백성들을 압제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해 갔다. 그의 그러한 포악한 기질은 그가 '특이한 사냥꾼'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짐승을 무자비하게 포획하는 특이한 사냥꾼으로 비유된 바, 사람의 육체를 사냥하는, 즉 전쟁을 즐기며 그 전쟁을 통해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자였다.

당시 그는 바벨에서 아시리아까지의 방대한 영토를 넓혀 갔으며 후에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력을 떨쳤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이를 건축하기도 했다. 특히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니므롯이 바벨탑 건축을 주동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바벨 곧 바벨론은 성경의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세속 제국의 대명사로 묘사되고 있다.

하느님을 떠난 힘의 질서, 그리고 세상 나라의 기원은 바로 이 반역자요 대적자인 니므롯에게서 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을 떠난 그의 이상과 번영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끝이 났으며 그가 남긴 것은 결코 힘만으로 세상을 송두리째 삼킬 수 없다는 교훈뿐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제아무리 세상을 호령할 만한 힘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가 결국에 맞이하는 것은 허무와 멸망일 뿐이다(예레17,5).

 

* 인종 차별의 부당성. - 일부 잘못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 세월 동안 이방인을 멸시해 왔으며, 특히 노아의 저주에 근거하여(9,25) 가나안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 왔다. 이러한 인종 차별은 왜곡된 선민의식과 독선에 젖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역사 이래로 전 세계에 걸쳐 자행되어 왔다.

심리학자들은 대체로 이러한 차별 의식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문화, 인습, 종교, 사상, 용모 등이 자신과 다를 때 생겨나는 인간의 배타적(排他的) 성품 때문이다. 이러한 배타심은 인간 타락 이후 생겨난 서로 간의 불신에 기인하며 역사상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끝없는 분쟁을 조성하였다. 불건전한 우월성 때문이다.

남들보다 뛰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심리이지만, 이것이 지나칠 때 타인을 멸시하고 심지어 학대와 학살까지를 자행한다. 독일 나치 정권하에서 자행된 유대인학살이 그 좋은 예이다. 잘못된 종교적 편견 때문이다.

종교가 진리의 영역이 되지 못하고 어느 지역적 문화권을 대변하는 분파 의식에 사로잡힐 때, 타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차별하는 종교적 광신으로 치닫기 쉽다.

그러면 과연 인종 차별은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것이 성경의 정신인가?

가나안 정복 정신을 오해한 일부 이스라엘인들은 잘못된 선민의식에 빠져 자신들의 사고를 철저히 폐쇄시켰으며 극단적으로는 자신들만이 생존의 특권을 가진 자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은 이스라엘을 성경 역사의 중심으로 삼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류 전체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스스로 선민이라고 생각게 만든 모세의 율법에서조차 이방인들의 신분과 권리를 인정하며, 멸시받는 자들에 대한 배려가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신명15,11. 16,11. 23,7-8).

또한 많은 예언자들이 이방(異邦)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책임 있는 민족임을 밝히고 있다.(아모1,3-2,16) 뿐만 아니라 예수와 사도들 역시 온 세상이 한 가족임을 역설하였다.(마르3,5 사도17,26) 그리고 초두에서 밝힌 가나안에 대한 노아의 저주는 인간 차별이라는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가정의 질서와 타인의 인격을 무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패역한 자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역사적 교훈이었을 뿐이지, 결코 인간 상호 간의 지위와 신분을 규정지은 조처는 아니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들에게 누구도 업신여길 수 없는 고유한 인격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이러한 성경의 올바른 정신을 깨닫게 될 때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종적 자만과 학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3. 셈의 후손(10,21-32)

본문은 노아로부터 영적인 축복을 받았던 셈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성경에 언급된 족보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이어갈 무리를 중심 하여 기록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해서 이스라엘과 깊은 연관이 있거나 언약을 계승할 자들의 가계를 여러 가계(家系) 중 마지막 부분에 기록하는 것이 통례였다(4,25. 36).

본장에서도 그러한 관점에서 셈 계통의 족보를 맨 뒤에 위치시키고 앞으로 역사가 셈 계통의 인물들에 의해 주도될 것임을 암시하였다.

사실 하느님의 선민(選民)인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 계통에서 나왔으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이룩하실 메시아께서도 바로 이 혈통을 빌어 탄생하셨다. 이처럼 성경의 족보들은 단순한 인명들의 배열이 아니라, 그 순서에서 조차도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 구속사의 간략한 축소판이며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도(科程圖)이다.

 

*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 - 인류 구속사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했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았던 민족을 흔히 '히브리인' 또는 '이스라엘인'이라 일컫는다. 이 두 호칭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으나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히브리인 - 어원적으로 '히브리'라는 말은 '강 저편 땅'이라는 의미의 '에벨'(Eber)이라는 말(25)에서 파생했다는 견해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최초로 입국할 때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왔다는 사실에 유래하여 '건너다'는 뜻의 서부 셈어 '아비루'(Abiru)에서 파생했다는 견해, 그리고 가나안에 체류한 '무리'라는 측면에서 가나안어 '하베르'(Haber, 무리)에서 왔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사회적 하급 계층을 지칭하는 아카드어 '하비루'(Habiru)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하여튼 '히브리'(Hebrew)란 말은 '셈 계통의 가나안 이주자'를 가리키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이 '히브리인'이란 말이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동부 셈족의 아람족(아카드, 아시리아, 바벨론)이 아니라 서부 셈족 계통(베니게, 아모리, 모압)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러한 지역적 분류 개념에서 탈피하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누구나 히브리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수 혈통을 고집하며 자랑해 온 히브리인들은 혈통적인 순수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대를 잇거나 타민족을 집단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혼혈족을 만들고 말았다(40,50-52; 민수12,1).

이스라엘인 - '히브리인'의 조상을 아브라함으로 본다면, 에돔, 모압, 암몬 족속도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인'이란 '야곱의 혈통과 신앙을 전수받은 자'라는 뜻으로 더욱 축소적이고 편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그들이 야곱의 후손이라면 애굽의 노예 생활을 거쳐 가나안에 돌아온 사람만이 '이스라엘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인 중에는 가나안에 계속 거주하다가 이들과 합류한 자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혈통적인 의미보다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라는 의미가 짙다.

한편 혈통적, 신앙적 우월성을 내세우며 왜곡된 폐쇄성에 젖어 교만했던 그들은 '히브리인' 또는 '이스라엘인'이라는 이름의 뜻이 지니는 신앙적 의무를 망각함으로써 예언자들과 예수로부터 강한 책망을 면치 못했다. 사실 구속사(救贖史)의 일익을 담당했던 그들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혈통적 조건에 의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사도4,12). 신약 시대에 이르러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인의 특권은 상실되고, 오직 예수 안에 임하는 자가 새로운(영적) 이스라엘인이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1베드2,9-10). 죽음의 길을 걷고 있던 이방인을 영적 이스라엘인으로 삼으신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나라 건설에 모든 인류를 동참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聖徒)는 영적 이스라엘인이 된 것을 교만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과 감사와 헌신의 동인(動因)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아의 아들들 (10,1-32)

서술의 이 시점에서 이름의 목록을 나열하고 있는 저자의 목적은 10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 "홍수가 있은 뒤에, 이들에게서 민족들이 세상으로 갈라져 나갔다."(32).

이 이름들은 독자에게 창세기와 오경(五經)의 나머지 사건들에 대한 배경으로서의 나라들에 대한 개관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 이 목록은 복잡하며 한 전형을 이루기 위한 선택과 구성의 많은 흔적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전형은 칠십이라는 숫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목록에는 정확히 칠십 개의 나라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속의 다른 족보들의 경우와 같이 이 목록의 형태는 나라들의 전체적 개념이 칠십이라는 숫자에 의해서 표현되는 일종의 숫자적 상징주의에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나라들'은 그 궁극적인 기원을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전체 인류는 엄밀하게 한정되고 있다. 저자는 독자가 인류 사이의 통일성에 대한 관점을 놓치기를 원치 않는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한 인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저자는 비록 '아브라함의 씨''이스라엘'에 그 초점을 한정시키려는 전환점에 있지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확고한 기초를 놓고 있다. 그것은 곧 아브라함의 ''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이 '땅의 모든 족속(族屬)'들에게 회복될 것이라는 점이다(12,3).

저자가 창세기 마지막 부분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의 전체 숫자가 또한 칠십임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46,27: 탈출l,5) 아브라함 이전에 나라들의 수는 칠십이었다. 아브라함 후에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의 수도 역시 칠십이었다. 나라들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그 나라들의 숫자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자세한 부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때에 우리는 창세기의 저자가 아브라함의 ''의 역할에 대하여 특별한 이해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나라들의 숫자와 아브라함의 자손의 숫자를 연결시킴으로써 독자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을 새로운 인류로서 제시하며 아브라함 자신은 '만국의 아비'(창세17,5)인 두 번째 아담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된 ''를 통하여 하느닙의 원래의 축복은 회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창세기의 처음 부분들의 형성 뒤에는 많은 신학적인 고찰이 놓여 있다. 신명기 328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민족들에게 상속 재산을 나누어 주실 때 사람들을 갈라놓으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에 따라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다.” 라고 모세는 이 부분올 암시하는 언급을 하고 있다. (로마서416절에서의 아브라함에 대한 바오로의 관점을 참고하라: "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0장은 단순히 칠십 명의 이름의 목록이 아니다. 이 목록을 통하여 저자는 또한 몇 개의 역사적 기술을 덧붙이고 있다(8-12,14,19,25). 이 각각의 기술들은 창세기에 기록될 특별한 사건과 특별한 연관성을 지난다.

예를 들면 니므롯과 바벨론에 있는 그의 왕국에 대한 기록은 다음 장에서의 '바벨탑' 서술에 대한 넓은 배경을 제공해 준다. 대체로 이 기록들은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나라들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면 8-12절의 바벨론, 14절의 블레셋, 19에서의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한 가나안인들).

 

1. , , 그리고 야벳 (10,1)

10장은 '노아의 아들들'의 이름의 목록과 '홍수 후에'라는 시간적 언급에 의해서 처음과 나중이 묶인다(1.32). 저자는 10장의 목록이 홍수로부터 출발되는 서술선상에서의 문맥을 떠나서 읽히도록 의도하지 않았다. 문맥에 대한 이러한 분명한 주의는 저자가 이 서술 속에서 밝히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가 독자가 그것을 놓치기를 원치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2. 야펫의 자손들 (10,2-5)

이 족보는 '바닷가의 땅'으로 여겨지는 나라들로 시작된다(5). 이 나라들은 저자의 지리적 한계 곧 알려진 세계의 테두리를 형성하는 것으로서 함(가나안)과 셈의 나라들을 넘어서는 일종의 제3세계를 의미한다. 그 초점이 하느님의 우주적인 왕국의 설립에 맞추어지는 후기 성경 문학 속에서 이 나라들은 하느님의 계획의 범위가 온 인류를 포함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다시 나타난다.

"8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9 적들은 그 앞에 엎드리고 그의 원수들은 먼지를 핥게 하소서. 10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시편72,8-l0). 이미 모세오경 속에서 저자는 미래의 관점으로부터 이 나라들에 자신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발람의 예언에 의하면 미래의 왕이 임할 때에 이 나라들은 다시 하느님의 다스림 속으로 포함될 것이다.(민수24,23-24.)

저자의 선택에 있어서의 전형은 야펫의 자손의 족보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두 열네 명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그것은 야펫의 일곱 아들들과(창세10,2) 일곱 명의 손자들이다(3-4). 저자는 야벳의 일곱 아들들 중에서 다섯 아들들(마곡, 마다이, 투발, 메섹, 티라스)은 생략하고 오직 고벨과 야완의 아들들만을 열거한다(3-4).

그리하여 저자의 의도는 명단 전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일곱이라는 숫자로부터 얻어지는 대표적인 명단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3. 함의 자손들(10,6-20)

저자는 함의 자손의 족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다루었다. 그것은 단순히 함의 네 아들인 에티오피아, 이집트, , 가나안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6) 야펫의 자손의 족보와 같은 방법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또한 야펫의 족보의 경우와 같이 첫 번째 언급된 아들의 손자들을 열거한다(에티오피아, 7a).

그러나 다음 아들(.이집트,13)로 넘어가기 전에 그는 증손자들을 열거한다( 라아마의 아들은 세바와 드단라아마의 아들들, 7b). 그 결과는 또다시 '일곱 아들들'의 이름을 열거함으로써 완전한 족보의 효과를 가져왔다. 저자는 이들 일곱명의 이름에 뒤이어서 니므롯의 업적과 그의 성에 대한 서술을 삽입시킨다(8-12).

이것은 지금까지의 족보의 특징을 이루었던 일곱의 형태를 깨뜨리고 들어온 것이다. 이 작은 서술의 증요성은 그것이 다음 장의 주제가 되는 바벨론 성()(11,l-9)에 대한 서론이 된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밀접한 연관성 역시 중요한데(10,11-12) 뒤이어 나오는 명단 속에서 아시리아는 셈의 아들들과 연결된다(10,22). 그렇다면 저자는 이러한 서술의 삽입을 통하여 중요한 도시인 바벨론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아시리아를 셈과의 자연적인 연관성으로부터 이끌어내어서 그것을 새롭게 바벨론과 동일시한다(아시리아가 또 다시 바벨론 (에벨)과 연결되는 민수기2424절을 참고하라.

그리하여 저자는 어떠한 성도 바벨론과 연결되거나 동일시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것은 바벨론의 실제 모습보다 더 큰 상징적인 중요성을 처음부터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의미는 이사야서에서 충분히 발전되며 (아시리아가 바벨론과 동일시되는 13-14장 참고) 또한 묵시록 17장의 '큰 비밀의 바벨론'의 모습 속에서 역시 발전되고 있다. 미가 예언자 역시 아시리아를 '니므롯 땅'으로 말할 수 있었다.(미가5,6).

저자는 또 다시 일곱 명의 이름을 포한하는 이집트의 자손들의 목록과 함께(창세10,13-14) 함의 자손들의 족보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의해서 그 형태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목록이다. 나머지 이름의 목록들은 전체 이름의 목록을 지배하는 '칠십 개의 나라들'이라는 전체 숫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정 숫자에 의해서 영향 받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칠십명의 이름을 통하여 최종적인 형태를 이루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일곱 명의 이름의 목록으로 이루어지는 더 작은 형태 역시 의도적이다. 칠십이라는 숫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칠이라는 숫자 뒤에도 완성의 개념이 놓여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곱명의 이름을 포함하는 목록들에 대하여 저자가 실제로 모든 아들들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고 그 집단의 자손들의 완전한 숫자를 제시하기를 의도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더 이상의 언급 없이 그들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저자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목록들로 말미암아('일곱'이라는 숫자를 지니지 아니한 것들,15-29) 그 초점은 훨씬 포괄적인 것이 된다. 그 이유는 가나안인들과 셈족이 된 이 자손들이 창세기와 모세오경의 서술들에 있어서 훨씬 두드러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특별히 가나안 지역의 정확한 구역에 관심을 기울이는데(19. 민수34,l-12) 그 이유는 그 땅의 지역이 오경을 기록함에 있어서의 자신의 핵심적인 목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록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살고있었지만(12,6)'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이었다.

 

4. 셈의 자손들(10,21-31)

저자는 서사적인 도입부와 함께(10,21) 셈의 자손들의 목록을 시작한다. 이 도입부의 목적은 10장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중요한 연계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셈과 야벳의 관계와('셈은.. 야벳의 형이다') 셈과 그 후에 나오는 족보들과의 관계에('셈은 에베르 온 자손의 조상이요') 시선을 집중시킨다.

함에 대한 언급 없이 셈과 야펫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데 이것은 아마도 926-27절에서 셈과 야펫에 대한 노아의 축복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의도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가나안은 제외되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저자가 독자의 시선을 서술의 중요한 관점에 - 이 경우에 있어서는 축복의 자선 - 유지시키기 위하여 과거의 서술들을 상기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에베르의 자손들'에 대한 언급은 앞에 놓여있는 족보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출생을 가져왔다(11,10-26, 민수24,24 참고). 그러므로 노아의 자선들의 목록을 완성시키기 이전에 저자는 이 목록을 그 이전과 이후의 서술의 문맥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이 짧은 요약을 삽입시키고 있다.

비록 그것이 그 이전의 목록들의 경우처럼 어떤 특정한 숫자적 형태를 따라가지는 않지만 셈의 자손들의 목록 또한 매우 선택적이다. 오히려 셈의 가계(家系)는 에베르의 두 아들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기에서 둘째 아들인 욕탄의 가계를 계속해서 따라간다(10,26-29).

바벨론의 건설에 대한 서술(11:1-9) 이후에 셈의 또 다른 족보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중요한데 여기에서 족보는 에베르의 첫째 아들인 펠렉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로 연결된다(11:10-26). 이러한 방법으로 셈의 족보를 열거함으로써 저자의 자손들을 바벨론 성의 양쪽으로 나누어 놓는다.

그 분기점은 에벨의 두 아들인 펠렉과 욕탄 사이에 놓인다. 한 선은 바벨론의 건설에 이르렀고 다른 선은 아브라함의 가계에 이르렀다. 저자는 펠렉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음'(10,25)을 언급함으로써 셈의 가계에 있어서의 이러한 분리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은 때때로 '땅의 거주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땅은 언어의 혼잡으로 인하여 나뉘었을 뿐만 아니라(11,1) 더 근본적으로는 인류의 큰 두 계통이 셈의 자손들의 중간에서부터 나뉘었다. 그것은 곧 바벨론의 건설을 통하여 스스로 자기의 이름(11,4)을 높이려고 했던 자들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통하여 그 이름(12,2)을 높이려는 자들이다.

 

5. 노아 자손의 씨족들 (10,32)

10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나라들의 나누임에 대한 주제를 다시 다루고 있다: "이들에게서 민족들이 세상으로 갈라져 나갔다."

저자의 목적은 다음에 나오는 바벨론 서술에 대한 배경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그는 10장에서 연대기적이요 언어적으로 묘사했던 것을 11장에서는 신학적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그것은 곧 바벨론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나라들의 나누임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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