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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48) 삶을 어떻게 해석(解釋)할 것인가? (창세35,16-21)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16 조회수426 추천수2 반대(0) 신고

 

라헬의 죽음

 

창세기(48) 23. 5. 16.

 

삶을 어떻게 해석(解釋)할 것인가?

 

(창세35,16-21)

16 그들이 베텔을 떠나 에프라타까지는 아직 얼마 더 가야 하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었는데, 산고가 심하였다. 17 이렇게 라헬의 산고가 심하자 산파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셔요. 이번에도 아들이에요.” 18 라헬은 마침내 죽게 되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아기의 이름을 벤 오니라 하였다. 그러나 아기의 아버지는 벤야민이라 불렀다. 19 라헬은 이렇게 죽어, 에프라타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 묻혔다. 20 야곱은 라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서 있는 라헬의 묘비이다. 21 이스라엘은 다시 길을 떠나 믹달 에데르 건너편에 천막을 쳤다.

 

어떤 사람이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계속해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어디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삶은 계란이요그래서 그 사람은 계란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신앙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삶의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두 사람이 똑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 속에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 상황을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인데,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 상황을 불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벌어진 일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들은 눈앞에는 가나안 땅이라는 같은 상황이 있습니다. 이때 열 정탐꾼은 저 가나안 땅은 두려운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여 죽이시려고 이곳으로 보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 가나안 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저 가나안땅으로 들어 가자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은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야곱이 베텔을 떠나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35,16) 16 그들이 베텔을 떠나 에프라타까지는 아직 얼마 더 가야 하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었는데, 산고가 심하였다.

 

이렇게 야곱이 베텔에서 하느님을 만난 후 베텔에서 길을 떠나서 에브라타에 가까운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는 일이 생깁니다.

 

(창세35,17) 17 이렇게 라헬의 산고가 심하자 산파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셔요. 이번에도 아들이에요.”

 

라헬은 요셉을 낳았을 때 한 아들만 더하여 달라는 뜻에서 이름을 요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아이를 낳으면서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낳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산파는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지금 또 아들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라헬이 아들을 낳다가~

 

(창세35,18) 18 라헬은 마침내 죽게 되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아기의 이름을 벤 오니라 하였다. 그러나 아기의 아버지는 벤야민이라 불렀다.

 

라헬은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그 아들의 이름을 벤 오니라고 부릅니다. 벤 오니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벤은 아들이란 뜻이고 오니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이 아들이 어머니가 없이 살아갈 것을 생각해서 너무 슬퍼서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자신이 살아서 이 아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아야하는데, 그렇지 않자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이 베텔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텔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베텔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또 그 후에 야곱의 아들인 르우벤이 라헬의 시녀로 야곱의 첩인 빌하를 범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참으로 야곱에게 수치스럽고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창세기 35장 마지막에는 아버지 이사악이 죽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면 아내가 죽는 일도 벌어집니다. 아들이 속을 썩이는 일도 벌어집니다. 아버지가 죽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라헬이 죽으면서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나 야곱은 이 아들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벤오니가 아니라 베냐민이라고 부릅니다. 베냐민이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른 손이란 하느님의 권능을 뜻합니다. 또 오른 손이라 축복을 뜻합니다. 그래서 축복을 할 때도 오른 손으로 축복을 합니다. 또 오른 손이란 행복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 동안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한 번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경우만 야곱은 즉각적으로 나서서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말고 행복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이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야곱은 베텔에서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내 현실은 슬픔이지만 하느님께서 현재 나의 슬픔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아들이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축복의 아들이고, 행복의 아들이 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슬픈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슬픈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을 세상 사람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행복하냐?’ 는 내가 살아온 객관적인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좋은 환경에 살았다 하더라도 내가 불행하게 해석을 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살았더라도 행복하게 해석하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한 인생인가 아닌가는 객관적 사실이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해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의 사건과 아픔들을 겪습니다.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 모든 사건들과 상처들과 아픔들을 세상적이고 인간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에 와서 미사예배를 드릴 때만 감사하고 찬송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감사하고 찬송을 하고, 집에 들어가서는 원망,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감사와 찬송은 가정에서 나와야합니다. 또한 우리의 처절한 삶속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속에서 어떻게 항상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신앙적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늘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축복의 아들이고 행복의 아들이라고 해석했을 때, 베냐민을 낳은 곳이 에브라타라고 합니다. 19절을 보면 “19. 라헬이 죽어서 에브라타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葬事)하였다라고 합니다.

에브라타는 베들레헴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다윗 왕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이 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그래서 미카서 52절에 보면~

(미카4,2) 2 수많은 민족이 모여 오며 말하리라. “, 주님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올라가자.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에브라타가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 아들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축복의 아들, 행복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그 베들레헴이 나중에 다윗의 출생지가 되었고, 예수님의 출생지가 되었습니다.

 

(룻기1,22)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출신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부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이 아들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축복의 아들이라고 하고 행복의 아들이라고 하였을 때 그가 태어난 곳이 슬픔이 변하여 회복이 시작이 되는 곳이 되었습니다. 또 이 베냐민의 자손 가운데서 사도바오로가 나왔습니다. 이 사도바오로를 통해서 이방인인 우리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슬픔의 삶이 아니라 행복한 삶이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첫째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느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저의 차지로 좋은 땅 위에 측량줄 내려지니 저의 재산에 제 마음 흐뭇합니다.”(시편16,6)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제로 다윗이 있었던 그 땅 자체가 아름답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이 왕으로 제일 먼저 통치하게 하신 곳이 헤브론 땅이었습니다(2사무5,3-5).

그런데 그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의 열 정탐꾼이 가나안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악평을 했던 땅입니다. 또 여호수아14장에서 갈렙이 사람들이 들어가기 싫어하는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했을 때 그 산지가 바로 헤브론 땅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느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그 헤브론 구역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환경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윗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자녀들을 하느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으로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자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아내나 남편을 볼 때도 이렇게 보아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주권적 섭리에 따라서 하느님께서 내 남편을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것을 믿으면 내 남편이 아내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주권적으로 내게 주신 이 창4동 천주교회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지금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권적으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때, 우리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고,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2)또 우리는 우리 인생을 성화(聖化)의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욥은 한 순간에 모든 재산도 잃어버리고, 또 자식도 잃어버리고, 또 육신의 건강도 잃어버렸습니다. 욥의 아내는 이런 욥의 인생을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2,9).

또 욥의 친구들은 욥의 인생을 죄의 관점에서 인생을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욥이 무언가 죄가 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욥의 인생을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어떻게 인생을 해석하고 있습니까?

 

(욥기1,21) 21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욥은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욥기23,10) 10 그분께서는 내 길을 알고 계시니 나를 시금해 보시면 내가 순금으로 나오련마는.

이것은 욥이 자신의 인생을 성화의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가 죽게 하시고 또 왜 큰 아들이 문제를 일으키게 하시며 왜 아버지 이사악을 죽게 하십니까? 야곱이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듬기 위함입니다. 우리들 삶 가운데서 여러 가지 힘든 일들, 시험이 있습니까? 그 어려움과 시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아름답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3)또 우리 인생을 하느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성경을 하나로 압축하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심도 성령하느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심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이 모든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해석한 하느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로와 그 가족들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자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있다가 가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자로가 죽었습니다.

그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왜 예수님 일찍 오시지 않았습니까? 왜 내 오라비의 병을 고쳐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빼앗아 가신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젊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내게 그 꿈을 빼앗아가셨습니다. 또 내가 사랑하던 사람 그 사람도 빼앗아가셨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내 삶에 가시를 돋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호세2,8-9) 8 그러므로 내가 이제 가시나무로 그 여자의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라. 9 그 여자가 애인들을 쫓아가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그들을 찾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그제야 그 여자는 말하리라. “이제 가야지. 첫 남편(하느님)에게 되돌아가야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좋았는데 …….”

그래서 질투하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 날마다 돌아가는 모두가 됩시다.

  

라헬의 비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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