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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54) 꿈(夢)보다 해몽(解夢)이 좋다 (창세41,1-8,14.36)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21 조회수351 추천수1 반대(0) 신고

 

 

창세기(54) 23. 5. 22.

 

()보다 해몽(解夢)이 좋다

 

(창세41,1-8,14.36)

1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뒤, 파라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 잘생기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나일 강에서 올라와 갈대밭에서 풀을 뜯었다. 3 그런데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못생기고 야윈 암소 일곱 마리가 나일 강에서 올라와, 강가에 있는 그 암소들 곁으로 가서 섰다. 4 그러고는 이 못생기고 야윈 암소들이 잘생기고 살진 그 일곱 암소를 잡아먹는 것이었다. 파라오는 잠에서 깨어났다. 5 그는 다시 잠이 들어 두 번째 꿈을 꾸었다. 밀대 하나에서 살지고 좋은 이삭 일곱이 올라왔다. 6 그 뒤를 이어 야위고 샛바람에 바싹 마른 이삭 일곱이 솟아났는데, 7 이 야윈 이삭들이 살지고 여문 그 일곱 이삭을 삼켜 버리는 것이었다. 파라오가 잠에서 깨어 보니 꿈이었다. 8 아침이 되자 그는 마음이 불안하여, 사람을 보내 이집트의 모든 요술사와 모든 현인을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파라오는 자기가 꾼 꿈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지만, 아무도 파라오에게 그것을 풀이해 주지 못하였다.

14 그러자 파라오는 사람들을 보내어 요셉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들은 서둘러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런 다음 요셉은 파라오에게 들어갔다.  36 “이 양식은 앞으로 이집트 땅에 닥칠 일곱 해 동안의 기근에 대비하여, 나라를 위한 비축 양식으로 남겨 두십시오. 그러면 이 나라는 기근으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요셉을 향하신 하느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41,1) 1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뒤, 파라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헌작 시종장이 감옥에서 나가서 요셉을 기억하지도 않은지가 만 2년이 지났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요셉이 만 2년 동안 그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기억지도 못한 시간을 보내게 하신 이유는 그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느님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홀로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생애가운데 제일 좋았을 때가 이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동안 요셉은 하느님 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지할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정말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잊을지라도 하느님은 나를 잊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면서 2년의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동안 더 깊은 성숙의 시간을 하느님께서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외상(外傷) 후 성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외상 후 장애, 또는 외상 후 스트레스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외상 즉 외부에 큰 상처를 받은 후 오히려 더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이 2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중에 총리가 된 다음에 정말 성숙한 사람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다 용서합니다. 이렇게 감옥에서 2년은 요셉에게 가장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2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2년이 지난 후 파라오가 꿈을 꿉니다. 파라오가 꿈을 꾸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꿈을 꾸게 하신 것입니다.

그 꿈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2),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가에서 올라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있었습니다(3). 그런데 흉하고 파리한 소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는 꿈이었습니다(4).

그리고 파라오가 꿈에서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5). 또 그 후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왔는데(6),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꿈이었습니다(7).

그래서 8절에 아침이 되자 그는 마음이 불안하여, 사람을 보내 이집트의 모든 요술사와 모든 현인을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파라오는 자기가 꾼 꿈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지만, 아무도 파라오에게 그것을 풀이해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왜 파라오가 꿈을 꾸고 번민을 했겠습니까? 흉한 일곱 암소가 살진 일곱 암소를 먹는 꿈과 마른 일곱 이삭이 충실한 일곱 이삭을 먹는 꿈은 좋지 않은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서 그의 꿈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것을 파라오에게 해석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이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겠습니까? 파라오가 꾼 꿈은 하느님이 주신 꿈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주신 꿈을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풀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애굽의 점술가들과 현인들이 그 꿈에 대해서 정말 해석하지 못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7년 동안 나라에 좋은 일이 있다가 7년 동안 나라에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파라오의 신하들이 이런 해석을 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파라오에게 좋지 않은 해석을 하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9-13절에 보면 9 그때 헌작 시종장이 파라오에게 아뢰었다. “오늘에야 제 잘못이 생각납니다. 10 파라오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진노하시어, 저와 제빵 시종장을 경호대장 집에 가두신 적이 있습니다. 11 저와 그는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저마다 다른 뜻을 지닌 꿈을 꾸었습니다. 12 그때 거기에는 경호대장의 종인 젊은 히브리인이 저희와 함께 있었습니다. 저희가 그에게 말하자 그는 저희 꿈을 풀이하였습니다. 저희 각자의 꿈을 풀이해 주었던 것입니다. 13 그리고 그가 풀이한 대로 되었습니다. 저는 복직되고 제빵 시종장은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14절에 파라오가 사람을 보내 요셉을 부릅니다. 그리고 이제 요셉이 파라오에게 들어갑니다. 이때 15절에 파라오는 내가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것을 풀이할 자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너는 꿈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그것을 풀이한다고 들었다.” 고 합니다. 이때 16절에 요셉이 파라오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만, 하느님께서 파라오께 상서로운 대답을 주실 것입니다.” 고 합니다.

요셉은 꿈에 대한 해석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상서로운 대답을 주실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상서로운이란 샬롬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분명히 파라오에게 평안의 대답을 하실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여기서 파라오의 신하들과 요셉의 차이는 요셉에게는 하느님의 영()인 성령(聖靈)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주신 성령으로 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요셉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불길한 꿈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창세41,25) 25 그러자 요셉이 파라오에게 말하였다. “파라오의 꿈은 한 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앞으로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파라오께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파라오가 두 개의 꿈을 꾸었지만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같은 꿈을 두 개로 꾸었는가 하면 그것이 만일 하나의 꿈이면 사람이 꾼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겹쳐서 꿈을 꾸게 하신 것은 이 꿈이 하느님이 꾸게 하신 꿈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꿈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파라오께서 같은 꿈을 두 번이나 되풀이하여 꾸신 것은, 하느님께서 이 일을 이미 결정하셨고 지체 없이 그대로 실행하시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은, 26-31절을 보면 일곱 해의 큰 풍년이 있다가 그 후에 일곱 해의 큰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입합니다. 그런데 일곱 해의 흉년으로 그 앞에 있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기근으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꿈에 대한 해석이 파라오에게 편안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이 땅이 기근으로 망하게 된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중요한 해석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32절에서 하느님께서 이 일을 이미 결정하셨고 지체 없이 그대로 실행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3절에 그러니 이제 파라오께서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 하나를 가려내시어, 이집트 땅을 그의 손아래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라 안에 감독관을 두어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고 흉년을 대비하여 쌓아두시라고 합니다.

그러면 36절에 이 양식은 앞으로 이집트 땅에 닥칠 일곱 해 동안의 기근에 대비하여, 나라를 위한 비축 양식으로 남겨 두십시오. 그러면 이 나라는 기근으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37절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이 제안을 좋게 여겼다고 합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꿈보다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삶을 달라집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큰 풍년 뒤에 큰 흉년이 있어도 준비만 잘하면 절대 이 땅은 망하지 않을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38절에 파라오는 자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처럼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을 우리가 또 찾을 수 있겠소?” 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주셨으니, 그대처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또 있을 수 없소.” 라고 합니다(39).

그리고 이제 내가 이집트 온 땅을 그대 손 아래 두오.”하며 요셉에게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합니다(41). 그리고 자신의 인장 반지를 요셉의 손에 끼우고, 아마포 옷을 입히고 금 목걸이를 걸어줍니다(42). 그리고 요셉에게 파라오 왕이 타는 수레 다음으로 좋은 버금 수레를 태우고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합니다(43). 그리고 요셉으로 결혼도 하게 합니다.(45)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은 45절입니다. “요셉은 이집트 땅을 살펴보러 나섰다.”고 합니다. 46절에서도 요셉이 이집트 임금 파라오 앞에 섰을 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요셉은 파라오 앞에서 물러 나와 이집트 온 땅을 두루 돌아다녔다.”라고 합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는 자리에 대해서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총리가 되고 총리가 되어도 파라오의 궁중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합니다. 47-49절에서 요셉은 7년의 풍년의 때에 바다의 모래와 같이 수많은 곡식을 쌓아둡니다. 그리고 풍년의 때에 요셉은 자녀를 낳습니다.

 

(창세41,51) 51 요셉은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고생과 내 아버지의 집안조차 모두 잊게 해 주셨구나.” 하면서, 맏아들의 이름을 므나쎄라 하였다.

 

요셉은 그동안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아버지 집에서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애굽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므나쎄를 낳으면서 하느님께서 내 모든 고난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52절에 차남의 이름을 에트라임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창41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느님께서 이 모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있을 당시에 전 세계를 다스리는 자는 파라오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꿈을 통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파라오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25절에도 파라오의 꿈은 한 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앞으로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파라오께 꿈을 통해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7년의 큰 풍년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7년의 큰 흉년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요셉의 시대에는 이것이 확실히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큰 풍년과 같이 좋은 것과 큰 흉년과 같이 악한 것이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은 선과 악이 서로 섞여져 있습니다. 제가 왜 선과 악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살진 소를 아름답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파리한 소는 흉악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악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다른 가냘프고 아주 못생기고 마른 암소 일곱이 올라오는데, 그것들처럼 흉()한 것은 이집트 온 땅에서 본 일이 없다.”고 하는데, 흉한 것이란 악한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섞여져 있습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서로 섞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선한 것만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것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세상은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는데, 악한 것이 선한 것을 삼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삶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100프로 완전한 행복은 없습니다. 또한 100프로 완전한 불행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더라도 행복과 불행이 함께 섞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볼 때 이런 행복과 불행이 섞여져 있는데, 이 세상의 현실을 보면 행복의 힘보다 불행의 힘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세상은 7년의 흉년이 7년의 풍년을 완전히 삼키는 곳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닥친 불행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서 사람들은 자폐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어느 때에는 어떤 어머니가 자녀가 자폐진단을 받자 자녀도 죽이고, 그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꿈보다 해몽(解夢)‘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꿈이지만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파라오의 신하들은 꿈에서 나타난 불행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그 꿈을 파라오 앞에서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에 감동한 요셉은 그 꿈에 나타난 불행보다 그 꿈을 주신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그 꿈을 주신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꿈을 주신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요셉은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불행한 흉년이 들어도 잘 준비만 하면 이 나라는 기근으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의 삶을 보더라도 행복과 불행이 함께 섞여져 있습니다. 어떨 때는 불행이 행복을 삼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수산나 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남편은 터키에서 이슬람사람들에게 선교를 하다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40군데 칼에 찔리고, 목이 베여 순교를 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욥이 자신의 전 재산과 10자녀를 모두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도 하느님께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것을 다시 보면서 많은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남편을 억울하게 잃어버린 상황에서 이 상황을 이제 다르게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을 바꾸지 못하지만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상황을 바꾸지 못하지만 상황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가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요셉은 불행한 현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행을 선으로 바꾸실 하느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불행을 선으로 바꾸실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과 하느님의 백성의 차이는, 이 세상 사람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불행만 바라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은 현실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불행도 선하게 바꾸실 선하신 하느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에 100프로 행복은 없습니다. 100프로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행복과 불행 위에 계시는 선하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이 모든 것을 합력해서 반드시 선이 이루실 하느님만, 불행조차도 선으로 바꾸실 좋으신 하느님을 믿음으로 바라봅시다.

 

둘째, 창세기 41장을 통해서 인생은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인생이 운명이라면 요셉은 꿈을 해석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이 운명이라면 요셉은 7년 풍년이 되게 하시고, 7년 흉년이 들게 하시는 것이 하느님이 정하신 운명이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살아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앞으로 7년 풍년이 되고 7년 흉년이 되는 것이 하느님의 정하심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운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7년의 풍년 동안에 7년의 흉년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직접 총리가 되어 이 일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꿈이 있다. 하느님의 정하심이 있다고 하니까 이것을 운명론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정하심은 절대 운명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계획은 우리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획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 하느님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계획을 세우셨어도 요셉이 감옥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7년의 풍년을 주시고 7년의 흉년을 주시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7년 흉년으로 그 땅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감옥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7년 흉년을 대비하여 7년 동안 믿음으로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과거와 경험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과거에 몇 십년 동안 그렇게 하려고 해봤다, 그런데 한 번도 안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안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예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정문제에 있어서, 교회에 대해서 과거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교회가 과거에 잘 안 된 것이 있으니 앞으로도 절대 잘 안될 것이다 고 하는 것은 운명주의지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능치 못할 이 없으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하느님을 바로 믿기만 하면 우리들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셉과 같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나누어 주고도 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모든 실패의 과거를 주님의 십자가가 못 박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所望)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리 속단하지 말고 우리가 지금 어떤 절망적 형편에 처해있더라도 주님만을 바라 볼 때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운명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 새롭고 놀라운 삶을 살아갑시다.

 

셋째, 하느님은 역전(逆轉)케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느님은 역전케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죄수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몸이 쇠사슬에 메였는데, 금 목걸이를 달았습니다. 죄수의 옷에서 아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요하게도 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없이 낮추기도 하시고 한 없이 높이기도 하십니다.

요셉과 같이 그 어떤 순간에도 절대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맙시다. 내 삶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불행조차도 선하게 바꾸실 역전의 하느님을 믿읍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우리 삶에서도 역전케 되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혹 이 땅이 아니더라도 저 영원한 천국에 가면 우리의 모든 삶이 반드시 역전이 될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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