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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55) 꾼 꿈을 생각하고 (창세42,1-20)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5-25 조회수271 추천수1 반대(0) 신고

 

창세기(55) 23. 5. 23.

 

꾼 꿈을 생각하고

 

(창세42,1-20)

1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어째서 서로 쳐다보고만 있느냐?” 하면서 2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이집트에는 곡식이 있다는구나. 그러니 그곳으로 내려가 곡식을 사 오너라. 그래야 우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다.” 3 그래서 요셉의 형 열 명이 이집트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다. 4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벤야민을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그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5 이렇게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6 그때 요셉은 그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그였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하였다. 7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양식을 사러 가나안 땅에서 왔습니다.” 8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9 그때 요셉은 형들에 대하여 꾼 꿈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염탐꾼들이다. 너희는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자들이다.” 10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나리의 이 종들은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11 저희는 모두 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저희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이 종들은 염탐꾼이 아닙니다.” 12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아니다. 너희는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자들이다.”

13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리의 이 종들은 본디 열두 형제입니다. 저희는 가나안 땅에 사는 어떤 한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막내는 지금 저희 아버지와 함께 있고, 다른 한 아우는 없어졌습니다.” 14 그러나 요셉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대로다. 너희는 염탐꾼들이다. 15 너희를 이렇게 시험해 봐야겠다. 너희 막내 아우가 이리로 오지 않으면, 내가 파라오의 생명을 걸고 말하건대, 너희는 결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16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어 아우를 데려오너라. 그동안 너희는 옥에 갇혀 있어라. 너희 말이 참말인지 시험해 봐야겠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내가 파라오의 생명을 걸고 말하건대, 너희는 정녕 염탐꾼들이다.” 17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18 사흘째 되던 날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살려거든 이렇게 하여라. 나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19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20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오늘 본문에 보면 드디어 요셉과 요셉의 형들이 만납니다. 요셉과 요셉의 형들이 만나게 된 이유는 기근 때문이었습니다.

 

(창세42,1) 1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어째서 서로 쳐다보고만 있느냐?” 하면서

 

물이 풍부한 애굽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다른 곳은 더 극심한 흉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있는 가나안 땅에도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애굽에는 곡식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곡식이 있다하니 너희는 애굽으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곡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2).

지금 야곱이 당한 기근은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근이 있어도 조금은 살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사오지 않으면 모든 가족들이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절박한 심정으로 곡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곡식을 사러 가면 당연히 열한 형제가 모두 가야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습니다(3,4). 그 이유는 혹시 베냐민도 요셉과 같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야곱은 여전히 라헬의 자식들에 대한 편애(偏愛)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있을 때 야곱은 라헬의 자녀인 요셉만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만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없어지자 야곱은 라헬의 자녀인 베냐민만 사랑합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서 혹시 형제들이 재난으로 죽더라도 베냐민만은 절대 죽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은 보내고 베냐민은 보내지 않습니다.

 

(창세42,5) 5 이렇게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다른 사람들 틈에 끼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여기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옛 사람의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1절에서 4절까지 야곱이라고 하다가 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는 야곱의 아들들을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들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게 해서 그 기근 때문에 야곱의 자녀들을 애굽으로 보내게 하십니까? 그리고 왜 야곱의 자녀들이 요셉을 다시 만나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야곱의 자녀들이 단순한 야곱의 자녀가 아니라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이 인생의 극심한 고난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50장까지 왜 야곱의 족보이야기가 있는 이유는 야곱의 자녀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야곱의 자녀들의 경우에 하느님의 자녀들인 그들이 어떻게 형제 요셉을 죽이려고 할 수 있습니까? 르우벤의 경우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아버지의 첩을 범할 수 있습니까? 시메온의 경우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동생 디나 때문에 스켐 사람들을 그렇게 죽일 수 있습니까? 유다의 경우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창녀를 만나려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자녀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야곱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도 야곱의 이름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도 아직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답게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만을 편애한 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요셉을 잃어버리는 고난을 겪게 하셨는데, 여전히 야곱은 베냐민만을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의 차이는 간섭과 내어버려두심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에사우의 자손들의 경우에는 하느님은 절대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에 대해서 하느님은 반드시 간섭하십니다. 절대 내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극심한 고난을 주어서라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5절에서 가나안땅의 기근 때문에 야곱의 자녀들이 애굽으로 갈 때 성경의 저자는 야곱의 아들들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때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창세42,7) 7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양식을 사러 가나안 땅에서 왔습니다.”

 

드디어 요셉은 형들을 만났습니다. 17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13년이 지난 후 30살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의 풍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흉년이 있은 지 몇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최소 21년이나 22년은 지났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른 체하고 매몰찬 소리로 어디서 왔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매몰찬(카쇼트) 소리란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엄격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요셉의 감정을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수(復讐)의 감정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은 형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셉은 형들에 대해서 복수 하려는 감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감정을 억제했습니다.

창세기4151절에 요셉은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고생과 내 아버지의 집안조차 모두 잊게 해 주셨구나.” 하면서, 맏아들의 이름을 므나쎄라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온 집일이란 형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판 일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요셉이 아들 므네쎄를 낳게 하면서 형들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 망각(忘却)의 선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과거에 좋지 않은 일까지 다 기억하고 산다면 그 사람의 삶은 지옥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망각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만 기억하게 하시고 나쁜 일을 기억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요셉이 형들에게 상처를 받은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형들을 옥에 가두고 괴롭게 하는 것은 절대 복수의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요셉의 감정은 용서(容恕)의 감정입니다. 이미 요셉은 형들의 일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요셉은 형들을 무조건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보자 너무 기뻐서 형님들 제가 요셉입니다. 얼마만 입니까? 20년 넘게 지났습니다. 형님들 건강하십니까? 아버지는 잘 계십니까? 동생 베냐민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은 무조건 용서하려는 감정도 아니었습니다. 만일 무조건 용서하려는 감정이었다면 왜 형들을 옥에 삼일을 가둡니까? 지금 요셉이 형들을 만나자 엄한 소리로 말을 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억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복수하려는 마음도 아니었고, 또 무조건 용서하려는 마음도 아니었습니다.

 

(창세42,9) 9 그때 요셉은 형들에 대하여 꾼 꿈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염탐꾼들이다. 너희는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자들이다.”

 

형들이 요셉을 만나자 땅에 엎으려 절하였을 때 요셉은 형들의 볏 집단이 자신의 볏 집단에게 절하는 꿈을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면서 21년 전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준 꿈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은 사람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셉은 절대 인간적인 감정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된 것은 전적인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절대 인간적 감정으로 형들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무조건 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형들을 끌어안고 싶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무조건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이 하신 일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꿈을 주신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정탐꾼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 틈을 보려고 왔다고 합니다.

 

(창세42,10-11) 10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나리의 이 종들은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11 저희는 모두 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저희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이 종들은 염탐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12절부터 요셉은 계속해서 형들이 정탐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일 너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희 막내 아우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 요셉이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지금 요셉은 절대 형제들에 대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다 용서하고 끌어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요셉이 형들을 정탐꾼이라고 하면서 삼일을 옥에 가둡니까?

 

(창세42,21) 21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요셉이 3일 동안 형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것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감옥에서 3일을 보내고 난 다음에 그들은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라고 합니다.

 

(창세42,22) 22 그러자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하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사실 지금 이 이야기는 요셉의 형들이 자기들끼리 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요셉이 못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요셉은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24절에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라고 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자신들끼리 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을 떠나서 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형들의 마음을 만져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감옥에서 3일을 보내면서 요셉에게 한 일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형들이 억울하게 구덩이에 빠진 요셉의 심정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모든 마음이 다 풀렸습니다. 진정으로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감격해서 요셉은 울고 있습니다.

 

창세기 42장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가나안땅에 극심한 기근이 아니었다면 절대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감옥에서 3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절대 그들은 그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의 아들들에게 극심한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들을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12,6-8)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8 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징계)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

 

혹시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했을 때 하느님께서 나를 징계(懲戒)하신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심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또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십니다. 그래서 징계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마다 다 받습니다.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이고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왜 극심한 고난을 주심은 우리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들을 다 씻어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고난을 통해서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창세기 42장을 통해서 공의와 사랑이 서로 조화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공의의 관점에서만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철저히 보복하려고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하여 결국 그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감옥에 가게 한 목적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형들이 죄를 깨닫자 요셉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사랑의 관점에서만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형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용서한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루카174절에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회개가 없이 용서하면 죄를 용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까? 우리가 우리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시편85,11) 11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사랑과 공의가 같이 만나야합니다. 또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어야합니다.

만일 사랑이 없이 공의만을 부르짖으면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또 만일 공의가 없이 사랑만을 부르짖으면 공의가 없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정의도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평화도 있어야합니다. 정의가 없이 무조건 평화만을 부르짖으면 그것은 거짓 예언자들이 외치는 거짓된 평화입니다. 그런데 평화 없이 무조건 정의만 부르짖으면 그것도 바리새인과 같은 정의가 됩니다.

 

(마르9,50)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화목)롭게 지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금을 정의라고 생각하고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듯이 정의가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의가 있어야합니다. 정의가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너무 지나치면 음식의 맛을 잃듯이 정의가 너무 지나쳐 평화를 깨어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정의의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옳은 것을 주장하되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12,14)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거룩이 없이 평화만 외치면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또 평화 없이 거룩만 외쳐도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평화로움과 거룩함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공의가 서로 입 맞추는 곳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조건 사랑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먼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공의를 나타냅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요셉의 형들처럼 서로 모두 내가 잘못 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럴 때 모든 관계가 풀립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여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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