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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포장은 긍정과 부정적인 면을 다 아울러 가지지만 위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26 조회수453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은 얼마 전 읽은 영성서적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삶을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포장을 하곤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장의 의미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먼저 포장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부터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 그냥 선물 그자체를 선물하지 않습니다. 포장을 합니다. 이때의 포장은 어떤 의미의 포장일까요? 긍정적인 의미의 포장입니다. 또 하나는 선물을 받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도 같습니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장된 선물과 그냥 선물이라고 하면서 포장되지 않은 것을 받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물론 결과를 놓고보면 어차피 포장은 필요가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미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의 정성이라든지 이런 것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포장은 좋은 의미의 포장입니다.

 

약간 부정적인 의미의 포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단순히 어떤 본질을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포장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 숨기려고 하는 것일까요? 뭔가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고 또 숨기는 수단으로써의 포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단순히 숨기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를 벗어나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이때는 이해를 하기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학위 문제입니다. 논문표절 기타 등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십년 전에 언제 한 번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건 포장이라는 부정적인 개념과는 조금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에다가 포장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위장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위장은 거짓으로 포장을 한 것과 같이 해서 누군가를 속이는 하나의 방편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이런 원리가 작용됩니다. 자신은 위장을 하면서 남에게는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포장을 하는 경우 말입니다. 사실 자기 스스로는 그게 포장을 한 것처럼 했어도 무지한 사람이나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알만한 사람은 그게 포장이라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걸 신앙인이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넘어갈 경우도 있습니다. 위장과 포장은 잠시는 괜찮을지 모릅니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봤을 땐 배우나 무대에서 활동하는 광대와 같은 삶이지 않겠습니까? 풍자를 해서 보면 그렇습니다. 천년 만년 사는 인생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떳떳하지 않게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읽은 영성서적의 저자 신부님은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교만이라는 주제로 설명을 하셨는데 저는 이걸 신학적인 어려운 주제를 벗어나 다시 일반적인 세상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의미를 가지고 이 문제를 이렇게 풀어서 세상의 논리로 한번 접근한 것입니다. 이 앞 전 글에서도 제가 언급했습니다만 그땐 너무 내용이 방대하게 길어질 것 같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이제 다시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느님은 절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수단이 바로 핑계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자기 합리화입니다. 이건 실제 고해소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고해소에서 성사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사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성사입니다. 자기의 죄만 고백해도 다행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타인의 죄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타인은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써의 고백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거룩한 고해소에서도 이렇게 자신의 죄를 포장하고 위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신앙생활 안에서는 말해야 무엇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결론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포장하고 싶고 본의 아니게 위장을 하고 싶고 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를 할 수가 있지만 그 정도가 정도를 넘어설 때는 단순히 이해를 넘어서 그건 인간 세상에서도 윤리적인 측면에서 범죄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듯이 신앙 안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교묘하게 남에게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의미로서의 포장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그런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는 얼마나 가증스런 신앙이 될지를 한번 묵상해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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