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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9. 단식 논쟁 / 갈릴래아 활동기[2] / 부스러기 복음[34]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8-10 조회수240 추천수2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9. 단식 논쟁(마태 9,14-17; 마르 2,18-22; 루카 5,33-39) / 공관복음[34]

 

단식 논쟁 새것과 헌 것, 이 부분 소제목이다. 성경에도 소제목, 중간제목 등의 명칭을 부여해, 나름으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 단식 논쟁은 안식일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바리사이 등 그 밖의 여러 집단과의 논쟁의 의미를 돕고자, ‘새것과 헌 것이란 추가 내용도 병행 표기했다. 단식 논쟁을 하다보면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가, 결국은 돌고 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단식 논쟁은 결국 새것과 헌것의 비교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아니 한꺼번에 묶어서 봐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당시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자주 단식하였나보다. 그러기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 말하였다. “저희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사이들도 그렇게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은 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이렇게 주된 논제는 또 단식이다. 단식, 먹지말자는 뜻일 게다. 그렇다고 죽도록 먹지 말자는 것은 아니리라. 죽지 않을 만큼 끼니를 거르는 것이다. 금식이다. 금요일의 금육도 일종의 단식이다.

 

사실 예수님 시대의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축일에 하는 의무적인 단식’(레위 16,29 참조) 외에도 가끔 자발적인 단식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의 경우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에는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단식 그 자체를 비판하지도 않으신다. 다만 예언자들처럼 보기주기식의 단식 그 자체를 나무라실 뿐이다. 성경에서의 단식은 본디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여는 것이다. 끼니를 않는 고행으로 마음을 비워, 그분 뜻을 새겨 담는 것일 게다.

 

이처럼 내가 나야식인 보여주기 단식을 밥 먹듯 하는 이들이 예수님 일행을 향해 따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너네는 어째서 단식은커녕 먹고 마시기만 하요?” 이런 식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단식하면서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 자신, ‘빼앗길 날은 예수님 죽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당신 십자가 죽음을 보는 순간에는 밥 먹을 기운도 없기에, 그때는 하지 말라해도 단식할 것이라나.

 

그리고 지금은 잔치집의 신랑인 나와 함께, 너네는 신랑 친구 자격으로 기뻐하잔다. 또 구세주 메시아로 온 나의 기쁜 소식을 들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함께 회개하며 헌것은 버리고 새것을 나눠 갖잔다. 여기서 헌것은 유다교 율법이요, 새것은 당신의 기쁜 소식인 말씀이다. 이렇게 판에 박힌 악습인 율법을 정리해, 나의 복음으로 채워 구원된 은총의 삶을 살 것을 내비친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참된 단식은 악습을 삼가는 것이다.

 

그렇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훌륭한 이의 자질을 가늠하는 것은 단식의 횟수가 아니라, 삶에서의 절제하느냐와 도를 넘느냐이다. 그러니 먹는 것만을 삼가는 것을 단식이라 생각지 말자. 그분 뜻인 계명을 거역하는 것마저 삼가자. 이렇게 삶에서 도를 넘지 말고 절제로서 계명에 충실하자. 그러려면 온갖 악의 사슬을 끊고 우리에게 고통 주는 이를 용서하고, 작은 이 찾아 자비를 베풀자. 그리고 진짜 죽음은 빵에 굶주리거나 물을 마시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주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다. 이처럼 진짜 죽음은 기쁜 소식인 복음듣기를 거부한 이들의 영혼에서 나타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루카 4,4) 그러기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신랑 친구는 단식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에 대고 깁거나 꿰매지 않는다. 그러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새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질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그리고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렇게 새것과 헌것은 서로 들어맞지 않는단다. ‘새것곧 복음을, ‘헌 것곧 유다교에다가 다 맞출 수는 없다. 신랑과 함께하는 지금은 새것의 시대라나.

 

안식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에 쉬셨으므로 우리 인간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제정되었다.[계속]

 

[참조] : 이어서 ‘10. 안식일에 밀 이삭을(마태 12,1-8; 마르 2,23-28; 루카 6,1-5)’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단식,새것,헌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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