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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8-17 조회수448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마태 18,21-19,1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어느 날 한 신부님이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순간 성당은 쥐죽은듯 조용해졌습니다. 얼마 뒤 뒷 자리에 앉아계시던,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 한 분이 부끄러운 듯 쭈뼛거리며 손을 드셨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바로 저런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면서 함께 박수를 쳐 드리자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 어르신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을 용서하실 수 있었나요?”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어, 원래 미운 인간들이 많았는데 먼저 다 죽었어….”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만드는 웃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도 함께 지내는 형제들을 용서하는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조용히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몇 번까지’라고 횟수를 따지고 제한하는 것에서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마지못해 한다’는 옹졸하고 소심한 마음가짐이 드러납니다. 물론 베드로도 나름대로 용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쓰며 용서해도 말과 행동으로 마음에 상처를 주는 형제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형제들에 대한 실망과 불신, 미움과 원망이 싹텄겠지요. 그런 상태로 계속 억지로 용서하다가는 홧병이 날 것 같아서 어느 정도까지 참으면 되는지, 몇 번이나 용서하면 예수님께서도 ‘애 많이 썼다’고, ‘그 정도 노력했으면 됐다’고 내 편을 들어주실지 확인해보기 위해 나름대로 통 크게 써서 ‘일곱 번’이면 되겠느냐고 물은 겁니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일흔 일곱번 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신 예수님께서는 왜 용서에 ‘한도’를 정하면 안되는지, 어떤 이유로 어떤 마음으로 용서해야 하는지를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종은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유다인들의 세계관에서 ‘일만’은 가장 큰 숫자의 단위입니다. ‘탈렌트’는 가장 큰 화폐의 단위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그 둘을 합친 것만큼 큰 이해와 용서, 사랑과 자비를 조건 없이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받은 것을 함께 사는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베풀면서 살아야하지요. 그런데 옹졸하고 궁색한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받은 큰 은혜는 금새 잊어버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단 돈 몇 백만원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받아내려는 무자비한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살아서 돈 몇 백만원은 지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받은 자비를 무자비로 되갚으려 들다가는 그분께 받은 그 큰 은혜를 모두 잃게 됩니다. 그분께서 속이 좁으셔서 도로 뺏어가시는게 아닙니다. 욕심과 집착으로 쪼그라든 작은 마음으로는 아무리 풍족한 선물을 베풀어 주셔도 담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용서해야 합니다. 돈을 엄청나게 벌어놓고는 하나도 못쓰고 죽으면 그 사람은 그 돈을 참으로 소유했다고 볼 수 없지요. 제대로 써야 진짜 내 돈이 됩니다. 그건 하느님께 받는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써야, 하느님 뜻을 생각하며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진짜 내 은총으로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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