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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6주일 가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0-01 조회수261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26주일 가해] 마태 21,28-32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어떤 약이 특정 병증에 효험을 나타낼 때 그 약이 ‘잘 듣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같은 약이라고 해도 무조건 다 잘 듣는건 아니지요. 어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은 병에 잘 들어서 2-3일만 먹어도 금새 차도를 보이는 반면, 어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은 병에 잘 안들어서 열흘 넘게 먹어도 안먹느니만 못한 경우도 있는 겁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걸까요?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처방해 준 약이 잘 듣는 병원의 의사는 환자가 하는 말을 귀기울여 잘 듣습니다. 환자의 불편함과 아픔을 잘 헤아리고 공감해주기에 환자도 의사의 처방을 잘 따르게 되고 당연히 약도 잘 듣게 되는 겁니다. 반면 처방해 준 약이 잘 안 듣는 병원의 의사는 환자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환자의 아픔을 헤아리기보단 검사 결과만 보고 기계적으로 처방하기에 환자도 그 의사의 처방을 잘 안따르게 되고 자연스레 약이 잘 안듣는 것이지요.

 

그런 점은 하느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가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귀 기울여 잘 듣고, 그분의 뜻을 열심히 잘 실천해야 우리의 구원과 참된 행복에 잘 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과 아들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말씀의 이런 특징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자기의 두 아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의로운 일을 실천한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그분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무와 당위성에 대해서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요.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피하거나 나중으로 미루고 싶은데, ‘오늘’ 즉시 그 일을 실천하라고 하시니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겁니다. 맏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갑자기 그런 일을 시키시는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질 법도 합니다. 포도밭에서 일하는게 너무나 중요한 일인 것은 잘 알지만, 자기도 나름대로 잡아둔 중요한 일정이 있고 계획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을 나중으로 미루고 그 일을 먼저 하라고 하시니, 그런 아버지의 지시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오늘’ 그 일을 시키시려고 진작부터 계획하셨다면, 그 계획을 미리 좀 알려주셨으면 자기도 거기에 맞게 준비를 하지 않았겠느냐고 볼멘 소리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마음 속에 짜증과 불평 불만이 밀려옵니다. 나도 아들로서 당신 뜻에 순명하고 싶은데 굳이 상황을 이렇게 만드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싫습니다!”라고 소리치고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합니다. 생각해보면 포도밭 일은 아버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나에게도 ‘가족’의 소유인 포도밭을 잘 가꾸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겁니다. 또한 내가 도와드리지 않으면 홀로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고생하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포도밭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옆에서 묵묵히 포도가지를 다듬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번져갑니다. 굳이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들의 행동에서 아버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맏아들의 모습을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자기 뜻대로 살고 싶어서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멀어졌지만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그들입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 바빠서, 차마 하느님을 뵐 면목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은 채 살아왔지요. 그러던 중 세례자 요한을 만나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듣고 자기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며 뒤늦게나마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운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아버지의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며,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보다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거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용서해주시고 살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그도 아버지로부터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는 포도밭 일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들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뭐든 말로 하는건 쉽지만 거기에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르는건 다른 차원의 일이지요.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픈 마음은 있으나 쉽고 편한 것을 찾는 게으름과 나태함이 그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자신이 굳이 포도밭에 나가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다 이해해주시고 알아서 잘 하실거라고 생각하는 안일함이 그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립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의탁하지 못하고 그분의 자비를 핑계 삼아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려고 드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안락함과 편안함만 추구하느라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않는 그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모습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런 둘째 아들의 모습을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무엇이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일이고, 무엇이 그분 뜻을 거스르는 잘못된 일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들입니다.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며 이끌었기에, 백성들은 당연히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 철저히 하느님 뜻을 따를거라 기대하며 존중했지요. 하지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어깨 위에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얹어놓고, 정작 자기들은 실질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의로운 척 거룩한 척은 다 하고 다녔지요. 하느님께서 슬퍼하시고 실망하실 ‘위선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런 불의와 죄악에서 즉시 돌아서지 않는다면 죽음과 멸망을 피하지 못하리라고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습니까?’ 욕심과 집착에 눈이 멀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지만 즉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한 세리와 창녀들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약속했으면서도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그 중요한 약속을 저버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까? 지금 나는 둘 중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주님 말씀을 그저 귀로 듣기만 하는건 악인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귀로 들은 주님 말씀을, 머리로 아는 신앙의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이 내 삶의 방향을 멸망에서 구원으로 바꿉니다. ‘세례 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위가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려는 열심한 노력과 실천만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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