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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7주일 가해, 군인주일]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0-08 조회수320 추천수2 반대(0) 신고

[연중 제27주일 가해, 군인주일] 마태 21,33-43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시절, 미국은 '파리 기후변화 협정'에서 탈퇴했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여러 재해가 발생하여 많은 이들이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음에도, 그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는 화석연료의 사용을 강행한 것입니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몰라서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이라는 욕망을 채우는데에만 눈이 멀어, 그것에 방해가 되는 '불편한 진실'에 눈 감고 귀 막아 버린 것이지요. 진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그 진실을 거스르는 모습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 진실이 내가 더 큰 이익을 얻고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기에 완강히 거부하며 배척하는 겁니다. 그러나 손으로 내 두 눈을 가린다고 명확한 진실이 바뀌거나 사라지는게 아니지요. 당장의 이익과 편안함만 추구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진실은 불편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언젠가는 크나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불편하고 힘들어도 진실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들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도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에 눈이 멀어 ‘받은 은총에 감사하며 보답해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실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밭 주인으로부터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관리는 소홀히 하면서 땅을 빌려주기만 하는, 그러면서도 많은 소작료를 요구하는 여느 지주들과는 달리, 그 밭주인은 제 손으로 직접 흙을 뒤집어 엎고 크고 작은 돌들을 골라내며 거름도 듬뿍 주었습니다. 그렇게 잘 준비된 밭에 포두나무들을 정성스럽게 심었고, 야생동물의 침입으로부터 작물을 지킬 ‘울타리’를 둘러쳤으며, 추수한 포도를 모아 즙을 짜낼 ‘확’을 만들고, 도둑의 침입에 감시하며 대비할 수 있도록 ‘탑’까지 세워주었습니다. 그러니 소작인들은 수확 때까지 포도나무를 잘 관리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정당한 소작료를 지급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더 갖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주인의 몫까지 탐냈고, 그 잘못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 사달이 난 것이지요.

 

"내 포도밭을 위해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이사 5,4)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의 눈물 어린 탄식이 들립니다. 좋은 터를 잡아 지극정성으로 포도밭을 마련하고 사랑을 듬뿍 쏟으며 가꾸신 하느님이십니다.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정성을 들였으니 당연히 좋은 포도가 열릴거라 기대하셨겠지요. 그런데 거칠고 알이 작으며 먹을 수도 없는 ‘들포도’만 잔뜩 열렸으니 그분께서 느끼셨을 실망감과 배신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겁니다. 이처럼 들포도만 잔뜩 열린 포도나무의 모습은 감사와 찬미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마음 속에 탐욕만 잔뜩 키운 오늘 복음 속 소작인의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주인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이들 앞에 펼쳐질 미래는 황폐하고 참혹한 ‘멸망’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손으로 직접 ‘세상’이라는 포도밭을 가꾸시어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포도밭을 잘 관리하여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할 책임, 그리고 그 소출중 일부를 ‘하느님의 몫’으로 따로 떼어놓아 그분 뜻에 맞게 잘 사용해야 할 의무를 지닌 소작인들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관리자’라는 지위를 망각하고 스스로가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잘 가꾸라고 맡겨주신 이 세상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 먹으려고만 합니다. 그런 우리의 탐욕 때문에 세상은 점차 소진되어 병들어 가고, 우리 후손들은 지구라는 삶의 터전을 잃게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우리 욕심이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과 행복을 빼앗은 겁니다.

 

소작인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으로부터 밭을 빌려 쓰는 사람일 뿐입니다. 주인의 것이기에 주인의 뜻에 맞게 써야 합니다. 밭을 빌려서 썼으면 당연히 그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소작농들은 자신이 빌려 쓴 토지의 주인에게 수확한 것의 3분의 1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습니다. 물론 세금을 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 양이 너무 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들은 상황이 다르지요. 밭 주인이 포도를 재배하기 위한 준비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었고, 자기들이 주인 눈치를 보지 않고 맘 편히 일하도록 멀리 떠나주기까지 했습니다. 자신들이 주인으로부터 받아누린 이 큰 혜택들을 생각하면, 소출의 3분의 1만 받겠다는 주인에게 오히려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올려야 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를 잊었습니다. 주인에게 소작료 바치기를 거부했습니다. 자기들이 열심히 일해서 얻은 소출을 주인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건이 갖춰진 복된 자리에 소작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뻐하지 않았기에 감사의 마음을 갖지 못했고, 감사하지 못했기에 자기 의지로 기꺼이 내어드리지 못하고 억지로 빼앗기는 쪽을 선택한 겁니다. 바로 그런 마음자세가 그들을 ‘소작인’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자녀는 아버지의 밭에서 ‘억지로’ 일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곧 나의 것’임을 알기에, 풍성한 소출을 얻는데에 기여할 수 있음을 감사하며 기쁘게 일하고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지녀야 할 참된 ‘주인의식’이겠지요.

 

그러나 참된 주인의식을 지니지 못한 소작인들은 주인의 것을 억지로 빼앗으려다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립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주겠지’라는 주인의 간절한 염원을 욕심과 폭력으로 짓밟아버린 겁니다. 그들에게는 주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들’이 너무나 불편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손으로 눈을 가린다고 하늘이 사라지는게 아니지요. 그들이 했어야 할 일은 자기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를 제거하는게 아니라,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 즉 욕심과 집착을 찾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그랬다면 소작인의 지위를 잃고 밭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인의 신뢰와 보살핌 속에서 충만한 결실을 얻고 누리는 복된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었을 겁니다.

 

때때로 우리 ‘양심’이 찔리는 게 하느님께서 내 안에 양심을 만들어 주셔서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양심을 만들어주신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해서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양심을 찔리게 만드는 일과 사람을 내 삶에서 치워버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당신 뜻을 존중하고 따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내게 보내주시고 그 일이 일어나게 하셨으니,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께서 내 마음에 일으키시는 불편함을 오롯이 마주하고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저지른 죄가 내 양심을 찔러 아픈 것이니,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해야 그 아픔도 사라지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양심을 아프게 찌르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불편한 ‘돌멩이’로 여겨 내버리려고 하지만, 그 돌멩이가 우리를 하느님 뜻 위에 굳건하게 자리잡게 만드는 단단한 ‘머릿돌’이 됩니다. 죄악과 자기합리화의 토대 위에 쌓은 집에서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늘 마음 한 구석을 아프게 찌르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주눅 들어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내 구원의 집은 믿음과 회개, 그리고 순명의 토대 위에 단단하게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의 든든한 머릿돌이 되어 세상의 거친 풍파 속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 눈에는 그런 하느님의 섭리가 놀랍게 보이겠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계획하신 일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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