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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8주일 가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0-15 조회수340 추천수4 반대(1) 신고

[연중 제28주일 가해] 마태 22,1-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특정 사람에게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배부하는 물건을 ‘비매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처럼 공짜로 주어지는 물건들을 소홀히 여기고 가벼이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흔히 받는 물티슈는 물론이고,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열심히 커피를 사 마신 대가로 받는 리워드도 마찬가지지요. 처음엔 그걸 얻기 위해 대기번호를 받고 줄까지 서지만, 집안 한 구석에 먼지만 수북이 쌓인 채로 방치하다가 중고거래 시장에 헐값에 내놓거나 그마저도 귀찮으면 그냥 버리기도 하는 겁니다. 반면 사람들이 ‘명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받는 대우가 그와는 ‘천양지차’입니다. 그야말로 ‘애지중지’ 그 자체이지요. 얼룩이나 때라도 묻을까봐 노심초사에 전전긍긍입니다. 혹여 누가 흠집이라도 내면 아주 그냥 난리가 납니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도,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명품이 무엇인지 제대로 식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붙어있는 브랜드와 가격표에 혹하여 불나방처럼 달려들지요. 그러는 사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은, 그분과 맺는 친교는 언제든 맘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비매품’처럼 가볍게 여깁니다. 자연스레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맺는 과정인 신앙생활은 그 우선순위와 중요도가 자꾸만 뒤로 밀리게 되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구원의 기회, 참된 행복의 기회는 ‘언제나’ 열려있지만, ‘언제까지고’ 열려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늘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소중히 여기며 즉시 붙잡으려는 노력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혼인잔치를 베푸는 임금의 비유’에는 우리에게 그런 결단을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단호하고도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잘랄루딘 루미’는 <봄의 정원으로 오라>라는 시에서 우리를 위해 잔치를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신께서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시는 우리를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기쁨의 잔치를 준비하시는 하느님의 기쁨과 설렘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잔치는 당신께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에서 우리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그 잔치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다 부수적이고 부질없는 것들일 뿐이기에 오직 우리에게만 집중하시겠다는 말씀에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그분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 마음을 헤아린다면 당연히 그 잔치에 기쁘게 참여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비유에 나오는 ‘초대받은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을 위해 손수 잔치를 마련하고 기다리는 임금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들이 평소에 하던 일을 계속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먹고 사는 일’이 자기들을 다스리고 보살펴주는 임금보다, 그 임금이 마련한 잔치에 참여하여 그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금의 초대를 무시하고 거부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임금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종들을 보내 초대하자 이제는 그 초대가 불편하고 귀찮아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임금의 초대가 자신을 위한 배려와 사랑으로 느껴지기보다, 간섭과 구속으로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임금이 더 이상 자기 삶에 ‘이래라 저래라’하며 관여하지 못하도록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그와의 관계를 끊어내려고 듭니다. 자기들 딴엔 임금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오히려 세상의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거듭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시는 정의로운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볼모로 삼아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은건 당연한 결과겠지요.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민족에 속하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도 구원받을 기회가 활짝 열렸습니다. 인간의 죄악에 실망하여 마음을 굳게 닫아걸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큰 사랑을 실현할 기회로 삼으시는 하느님의 유연하고 넓은 마음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결코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혹여 우리도 그들처럼 자신의 행복을 재물이나 성공, 학위나 명성 같은 것들에 옭아매어 집착한다면, 우리에게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잔치가 나와 아무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남의 잔치’로 여겨지게 될 테니까요. 하느님께서는 능력도 자격도 없는, 작고 약하며 실수와 허물 투성이인 우리를 참된 행복의 기회로 불러주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천사들이 만나는대로 막 불러온 ‘아무나’라도 괜찮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런줄 다 알고 부르셨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이라는 복된 잔치에 참여하여 그분과 함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맘껏 누리면 되는 겁니다.

 

다만, 그 잔치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것을 ‘혼인예복’에 비유하지요. 우리가 갖춰입어야 할 혼인예복이란 내가 초대받은 자리가 누구와 함께, 무엇을 위해 있는지를 제대로 아는 ‘식별’과 그에 합당한 ‘마음가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에서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하는게 아닙니다. 물질세계와 영의 세계 모두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그 일치 안에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를 잘 식별해야 합니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 알게되는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그 뜻에 맞갖으면 ‘예’하고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아니요’하고 거부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신뢰’와 그분께서 나를 참된 행복의 길로 불러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갑자기 임금의 초대를 받은 이들이 혼인예복을 입은 상태로 잔치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항상 혼인예복을 잘 갖춰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그들은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뜻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누구나’ 초대받을 수 있지만, ‘아무나’ 그 나라에 들어가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가 된 것으로, 그저 구원받을 기회를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그 기회를 붙잡고 누리는 ‘선택된’ 사람, 하느님께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끌고가는 구원의 쟁기에 손을 얹고도 세상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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