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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10 조회수213 추천수2 반대(0) 신고

231210. 대림 제2주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8)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며, “사회교리주간” 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지금, ‘광야’에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가슴 안에, 황량한 광야를 품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그곳에서 황량한 바람이 불고, 이리떼와 승냥이들이 할퀴고 날뛰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광야일 때도 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가 바로 광야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어둔 밤이 있고, 캄캄함이 있습니다. 공허가 있고, 막막함과 무미건조함이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함과 붙들어 매어지지 않는 흔들림이 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무능함이 있고, 도리가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무기력이 있습니다. 벗어나지지 않는 고통이 있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디딜 발판이 없는 늪처럼 그것들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피해 지지 않는, 결코 피할 수도 없는 ‘광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광야를 좋으나 싫으나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광야는 왜 주어진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광야’라는 묵중한 십자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곧 구원에 이르는 통로로, ‘길’로 주셨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하여라.’”(마르 1,2-3)
 
오늘 <제1독서>에서는 광야에서 들려올 위로의 음성, 곧 ‘메시아 오심’을 예고하며, <복음>은 그 메시아가 오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다시 오실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이의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이는 회개하고 가만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증표를 보여라고 말씀입니다. 곧 그 증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결코, 자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곧 그는 ‘용서하는 이’가 아니라 용서를 준비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하나, ‘선물로 주어지는 용서’는 하지 못함을 말해줍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을 증언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이 증언에는 예수님께 대한 세 가지 내용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종만도 못한 부당한 몸’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진정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자라야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둘째’로,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 입니다. 그래서 “오신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는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사실, 이는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곧 ‘두 번의 오심’ 사이에, 곧 이미 오신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실 ‘두 번째 오심’ 사이에는 ‘지금 여기에 눈에 보이지 않은 오심’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바로 지금 여기에 늘 오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곧바로 우리에게로 들어오십니다.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말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셋째’로,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가 용서되고 하느님의 생명을 받는 것, 곧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로 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그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았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위하여 걷고,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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