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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3주일 나해, 자선주일]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17 조회수218 추천수4 반대(0) 신고

[대림 제3주일 나해, 자선주일] 요한 1,6-8.19-28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를 길들여줘.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네 시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알게 되겠지.”

소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그래서 나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살아갈 의미가 된 이를 만나게 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때 누릴 참된 기쁨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지금부터 기쁘게 살아가는 여우의 모습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마음가짐이 엿보입니다. 우리는 대림 제3주일을 이 여우와 같은 마음으로 지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림시기의 세번째 주일을 ‘가우다떼 주일’이라고 불렀는데, 라틴어인 ‘가우다떼’는 “기뻐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오후 4시에 올 어린왕자를 기다리며 오후 3시부터 기뻐하는 여우처럼, 대림 제4주일이 지나면 곧 다가올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 3주때부터 미리 기뻐하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사람이 되어 오시는 주님께 대한 감사와 기대, 희망과 바람이 큰 것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힘을 내어 남은 대림 시기의 후반부를 기쁘게 지내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더 착실히 하자고 격려하고 권고하는 것이 오늘 ‘가우다떼 주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신원’에 대해 궁금해하며 그것을 분명히 말해달라고 다그치는 사제와 레위인들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요한이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와 놀라운 은총으로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태어난 그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으려면 어서 빨리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고 있으니, 그가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라고, 그가 세례를 베푸는 것도 사람들을 정화하여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 그들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던 요한은 단호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그들 앞에서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그들은 요한이 ‘엘리야’냐고 묻습니다.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라는 예언대로, 요한이 세상 종말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을 회개시켜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이끄는 그 ‘엘리야’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요한이 다시 아니라고 하자 그들은 마지막으로 요한이 ‘그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들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라고 모세가 예언한 그 ‘대 예언자’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답하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자신이 수행할 ‘소명’에 대해 설명합니다. 자신은 사람들이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제대로 맞이하여 구원받을 수 있도록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요한이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선구자’(先驅者)라는 자기 소명을 설명하는 부분이 참 흥미롭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온전히 비웠기에, 자기 욕심과 고집, 선입견과 편견, 기대와 바람을 다 비웠기에 사람들에게 주님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참된 ‘소리’가 되었습니다. 온전히 비어 있어야만 자기 안에 들어온 ‘말씀’에 공명을 일으켜 크고 분명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소리를 내는 이는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사람인 것처럼, 진짜 글씨를 쓰는 것은 붓이 아니라 붓을 쥔 사람인 것처럼,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은 요한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요한은 그저 주님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도구일 뿐인 것이지요. 그는 참으로 ‘비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자기 뜻을 외치지 않고 당신 뜻을 외치시는 주님의 소리가 되어 널리 퍼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웠기에 그 안에 주님을 온전히 맞아들였고,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가리키는 자기 손가락을 보게 하지 않고, 자기가 가리키는 주님을 보게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름을 드높이려 하지 않고,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질문하던 이들은 그가 보여주는 겸손의 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이렇게 따집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들은 누군가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공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런 일을 해도 된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인 말에 따르면 메시아도, 엘리야도, 대예언자도 아닌 요한이 성경에 기록된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도 않았으면서, 제 멋대로 사람들에게 ‘회개’ 운운하며 세례를 베푼 행위를 문제삼은 것이지요. 하지만 요한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그분의 일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열심히 실천하는 이의 행동과 삶 안에서 그가 하느님께 받은 고유한 ‘소명’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의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그분께서 허락하시지 않을테니 자연스럽게 멈추겠지요.

그러니 주님을 내 안에 모실 준비를 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를 고민하는게 아닙니다. 그저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권고한대로 실천하면 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기쁘게 받아들이고, 끊임 없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 일들을 통해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분 뜻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그분 자녀인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이 세상에 불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이 힘들다고 기쁨을 미루고, 그럴 여유가 없다며 기도를 미루며, 아직 원하는게 다 채워지지 않았다고 감사를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요? 더 이상은 하느님 뜻을 실천해야 할 소명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며, 그들 안에 계신 주님을 내 안에 맞아들여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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