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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2)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願意)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22 조회수113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3. 12. 22.(금요일)

 

로마서2) 로마를 방문하려는 원의(願意)

 

(로마1,7-13) 7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8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9 그분 아드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내 영으로 섬기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10 나는 끊임없이 여러분 생각을 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든 내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빌고 있습니다. 11 나는 여러분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입니다. 12 다시 말하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통하여 다 함께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비록 지금까지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가려고 여러 번 작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서처럼 여러분에게서도 내가 어떤 성과를 거두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두 번째입니다. 로마서는 바오로가 로마의 성도(聖徒)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른 서신들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다른 서신들은 바오로가 세운 교회에 거기에 믿음의 시험을 당하거나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인하여 편지를 보냈습니다. 로마서는 전혀 상황이 달랐습니다.

아직 그는 로마에 가지 못했고, 가기를 원하는데 로마에 믿는 자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고 복음이 무엇이고 하는 문제에 다른 서신들과는 다릅니다.

8절에서 보듯이 먼저 여러분 모두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믿음의 식구들이 생긴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11절 보듯이 나는 여러분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이다.’ 그럽니다. 이 신령한 은사가 아마 로마서의 주제(主題)일 것입니다.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거는 대부분 조금 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것일 거라 생각하는데 로마서는 사뭇 우리의 이해와 다릅니다. 12, ‘다시 말하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통하여 다 함께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서로 안위(安慰)함을 얻기 원한답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또 바오로의 복음 이해로 서로 안위함을 얻을 것이라고. 무슨 상대방에게 특별한 결함이 있거나 부족하거나 어떤 보충, 이런 개념이 아니고 상대방이 가진 믿음에, 그 진리의 그 한 내용과 바오로가 저들에게까지 전하려고 하는 진리에 대한 관점, 어떤 이해, 그것이 로마서의 내용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11절에서는 하느님의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2절에 이 복음은 하느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이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느님의 복음은 하느님이 이 복음에 관하여 모든 주도권을 가진 것을 시사(示唆)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정하시고 하느님이 시작하시고 하느님이 완성하신 것. 우리에게 거져주신 것. 우리의 어떤 도움이나 어떤 필요나 능력, 협조 같은 것이 개입될 수 없는 하느님의 독자적인 어떤 것이랍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특징 짓는 핵심은 예수랍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구절에서 보듯이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心靈)으로 섬기는 하느님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하느님의 복음은 예수의 복음이라고 해도 차이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복음, 약속하신 복음, 그 아들의 복음, 이라는 표현으로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 바오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오래전부터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것이며 예수로 인하여 그 약속이 성취된 것이랍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 하느님의 계획과 의도로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예를 들면 마태오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이사야 7장에 나오는 아하즈 왕에게 준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의 성취로 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는 기원전 8세기의 예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보라 처녀가 잉태 아들을 낳으리니그 약속이 이제 현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로 역사 속의 현실이 됩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시사하듯이 그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구원자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도로 번역한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의미상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구원자입니다. 예수는 그 구원자의 인간으로 오신 이름입니다.

인간의 이름이라는 건 시간과 공간 속에 참여한 실존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오심은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成就) 입니다. 그가 주시겠다고 한 메시아. 그로 말미암는 구원. 이사야 53장에 드러나는 대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종으로 구원을 이루신 그 약속을 이룬 분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 약속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이 약속하시어 우리에게 이루신 구원인데, 그 구원이 가지는 의미는, 다만 그러니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자,’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얘기를 로마서는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가면, 24-26절에서 보듯이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그의 피로 세운, 피로 성취한 그의 약속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인데 그 구원을 하느님의 작정과 의지와 홀로 세우신 뜻으로 약속하시고 이루셨습니다만 그것은 피로 세운 것입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내시는 그의 죽음입니다.

그렇게 끝날 걸 무슨 약속을 하고, 그 기간을 기다릴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 성경이, 아니 로마서가 주목하는 대목입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결국 심판으로 끝날, 예수의 죽음으로 끝날, 우리가 죽어야 되는 것을 예수 안에서 갚을 거를 그렇게 시간을 끌어야 되는 이유는 뭔가 하는 것이죠.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이 어차피 해결할 것을 그걸 왜 시간을 끌었을까? 오래 참으시는 중에 입니다. 복음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어떻게 주어졌는가? 가 핵심으로 드러나야 된다고 로마서는 이제 큰 초점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인류 역사, 예수 이전에 과거의 인류 역사는 무엇이었느냐? 마땅히 심판받아야 하는 인류였다. 그거죠. 그걸 하느님이 어떻게 하셨느냐? 예수 안에서 해결할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거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할 때 그것이 가지는 가치를 알려면, 심판으로 끝내야 하는 인류의 그 긴 시간을 하느님이 참으시고, 우리 성경 표현으로 간과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공의와 진노를 누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길이 참으시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를 면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공의를 세우는 방법으로 예수를 세우기까지, 예수 안에서 해결하기까지,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복음(福音)을 얘기하려면 하느님이 범죄한 인류를 어떻게 대하셨는가? 불순종한 인류에 대하여 하느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를 마음에 이해하지 않으면 복음은 값싼 구원이 됩니다.

 

(로마5,6-8)“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복음을 논하려면 구원을 받았다고만 얘기하지 말고, 그 구원이 어떤 상태, 어떤 조건에서 일어난 것이냐? 그게 무엇이냐를 알리는 거죠. 의인(義人)을 위하여 죽는 자가 없고 선인(善人)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불경한 자, 죄인을 위하여 죽는 일은 세상에 있을 수가 없다.

예수는 그러셨다. 그때 우리는 죄인이었다. 우린 알지 못했다.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스스로 정하시어 자기의 계획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룬 것이 구원이다.

불경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예수의 죽음이다. 그 얘기를 왜 하죠? 복음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시키려고...

 

(로마5,1-6) 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나아가자! 그런 얘기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자녀답게 살자! 이렇게 도덕성을 어떤 유용성을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는가 하느님이 무슨 일을 해놓았는가를 바라보고 알자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불경할 때, 하느님을 모를 때 구원을 이루신 그 하느님,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신 하느님이 그 아들로 우리를 자기 자녀 삼아서 새 시대를 열었으니, 모를 때 은혜를 받은 것을 근거로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 시대, 하느님이 우리를 간과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보내어 하느님과 화목된 자로 살게 하는 시대를 맞았으니 이 시대가 무엇인지 알자.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안 믿고라는 결단과 실존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이 하느님의 계획 아래서 예수 이전이 다만 기다리고 참으시던 시대를 지나, 예수로 말미암아 인류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우리 죄를 씻으시고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손잡고 나아가자. 격려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인 것입니다. 근데 왜 이렇게 힘드냐? 그게 로마서 5장 얘기죠.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라고 3절에 나오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관계에서 신분에서 운명에서 다만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화목된 자로 살게 되었으나 그 완성은 예수님 재림으로 미루어졌습니다. 왜요? 그 오래 참으신 것이 모두에게 은혜와 용서와 화목으로 되는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 하느님의 통치를 시작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여셨으나 그 온전한 현실은 영원한 나라로 미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로부터, 그 전 시대와 다른 시대가 되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책임이 아니고, 의무가 아니고, 현실로 된 것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시대가 두 조각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로마5,9-10)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뭘 얘기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게 설명이 잘 안 되면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어요. 이게 떠 밀수밖에 없는데, 그 마음의 벽을 허물어 보십시오. 복음이라는 게 무슨 선언인가? 하느님이 이제는 다만 참는 하느님이 아니라, 해결하시고 우리와 화목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참여하시오 이 시대를 사시오가 됐습니다.

신자들은 두 세계를 살고 있죠. 아직 끝나지 않은 세상, 현실과 시작된 하느님의 통치라는 이중 세계에 걸쳐서 삽니다. 그게 어렵죠. 현실은 환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직도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하느님이 다만 약속 속에 있었던 시절이 아니라 그 약속이 성취되어 실제로 하느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 얘기를 바오로는 하고 싶은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 믿은 것 안다. 그게 무슨 얘긴지 알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같은 로마서 425절은 예수를 이렇게 그 분기점의 주인공으로 설명하죠.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이전에 있었던 인류의 형편을 스스로 감수하여 그 운명을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진노를 받아내어 그 죄를 씻으셨죠. 그가 죽음으로 과거의 인류, 아담의 인류를 끝장을 내십니다. 그리고 새 시대를 여십니다. 예수의 부활로 우리를 의롭다 하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에서 예수의 후손으로 바뀝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기도가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값없이 은혜로 구원함을 얻고 진심을 다하여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아 쓸모있게 인생을 살다가 천국 가라. 분명히 그리스도교 복음의 한 국면입니다.

그러나 로마서가 하고 싶은 것은 그거보다 큰 겁니다. 내가 잘 믿고 못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가 하느님의 약속과 은혜와 성취 속에서 어느 시점에 와 있느냐를 알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실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를 돌아볼 때마다 오늘은 신앙생활을 했다. 잘했다. 못했다라고 자꾸 자신을 판단하는데, 로마서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하느님이 시작하고 우리에게 열어놓은 하느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인생에 참여했다, 빠졌다가 있는 겁니다.

잘했다. 잘못했다는 자꾸 회개를 하려고 들지, 도덕성을 확인하는 데로 와서 잘했다, 못했다. 쓸모가 있었다, 없었다를 말하고 성경이 얘기하는 건 참여했다. 빠졌다라고 얘기합니다. 땡땡이를 치는 거죠. 땡땡이라는 말이 별로 멋지지 않아서 거룩한 표현을 요청했는데 아직까지 오지 않았어요. 잘 생각하세요.

복음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빠졌다, 들어왔다의 반복입니다. 사실은 하느님이 하다 말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여했다. 빠졌다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으로 가면 사도 바오로가 고린도교회에 한 이 말씀을 이 시각에서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코린5,13-17) ‘13 우리가 정신이 나갔다면 하느님을 위하여 그러한 것이고,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다면 여러분을 위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7절이 늘 오해되요 예수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된다.’ 예수를 믿으면 새 세상에 살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시작된 세상 속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16절에 있는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은 그의 자격, 조건, 능력을 따라 판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이 그의 진노의 대상들을 다 화해하셨습니다. 그의 은혜와 영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으로는 현실감이 너무 떨어집니다. 너무 내세적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말 그대로 이제부터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세상을 삽니다.’ 진노 아래에 있던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그 지위와 영광과 능력 속에 사는 자가 되었다.‘ 새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로마5,18-21)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가 된다는 게 무슨 말이죠?

(에페1,7-14)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의(), 하느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채우는 것. 이것이 예수 안에서 열린 새 시대입니다.

아직 옛 세상을 계속 유지하고 예수로부터 시작한 새 지위, 새 신분, 새 약속 속에서 이 세상을 살라고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끝날 이 세상 속에서 이 하느님의 영광을 나누어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바로 그 일을 증언하여 하느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이 참여함을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1코린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라는 오늘 본 본문에 나오는 무슨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이라는 로마서를 쓴 이유와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무엇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 우리의 생애가 헛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의 실패와 모자람이 실패와 모자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자책하는 데만 씁니다.

믿음 없는 것, 충성하지 못한 것, 쓸모없었던 것도 하느님이 그대로 놔두지 않고 승리케 하시리라. 조금 더 확장하시죠. 인생을 살면 내가 아무에게도 영향이 없다는 걸 발견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있으나 마나한 인생입니다. 현실에 그렇습니다.

은혜 받았는데 아무도 나를 안 쳐다봅니다. 전철에 타도 누가 보고 놀라질 않습니다. 내가 은혜 받고 탔는데 시비를 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내가 잘해서 보상받지 못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오른편 뺨 맞고, 왼편 뺨 대고 그래서 또 맞고 하는 일들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게 억울한 걸 어떻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이게 뭡니까? 내가 무슨 열심을 낸 이유가 어디에 있냐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슨 가치와 무슨 역할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예수를 줬는데 못 봤냐? 세상 권세가 들고 일어나 예수를 못 박아 죽였는데, 그걸로 부활을 만드는데, 네가 가진 자책, 한계, 실수, 못난 것으로 내가 아무것도 못한다고?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우리들의, 그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고 그 있잖아요. 알잖아요. 그거 일을 한다니까요.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거죠. 지나가는 사람 1, 그게 무슨 말인지 알죠? 엑스트라. 전봇대 2, 가로등 3, 이걸 하세요. 그걸로 하느님 일하신대요. 나중에 그 결과를 볼 거래요. 하느님이 일에 참여하래요. 우리들이 원하는 식으로 확인해서 받으려고 하지 말고, 그게 이미 아브라함에서 이렇게 구약에서 그 증거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12, 중요한 겁니다.

 

(창세12,1-3)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1장까지 무슨 얘기 있었죠? 창조, 타락, 심판이 있었죠. 노아 홍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노아를 통하여 다시 새 인류를 시작하셨으나 그들이 바벨탑을 쌓고 또 반역합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느님이 노아와 무슨 약속을 했죠? 다시는 내가 인류를 심판하지 않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인류는 계속 하느님을 거역하고 배반하고 불순종했습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하느님이 이 불순종하는 인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한 가닥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엽니다.

“1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승리하는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아브라함은 이 약속 하나를 가지고 자기가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을 떠나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도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나그네 길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복입니다.

그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 존재로 삽니다. 약속 속에 살죠. 아브라함은 증거가 없었으나 우리는 큰 증거가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이 인류를 향하여 어떤 작정과 어떤 약속과 어떤 성취를 이루었는가를 보았습니다.

이루어졌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됐습니다. 하느님의 통치 안에 부름을 받고,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그 날,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생을 받는 그날의 영광의 약속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나그네로 삽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야말로 복 그 자체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소원하셨는데 오늘 약속하시오. 아브라함이 되겠다고. (한 사람만. 그건 이사악이고.)

우리의 인생이 이런 성경의 증언들과의 연속선상에 그 약속과 축복 속에 있는 것 기억해서 잘 간수하고 담대하게 사는 복된 인생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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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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