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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24 조회수153 추천수2 반대(0) 신고

231224. 대림 제4주일.

 

루가 1, 26-38(대림 4 주일); 긴 강론- 해군중앙성당 대림특강

 
[대림환]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하얗게 타오르는 네 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양광모 시인의 “기다림”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누군가 /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 얼마나 눈부신 일인가. //
아침이 기다리는 태양처럼 / 밤이 기다리는 별처럼 /
그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건 /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
그리하여 / 그날을 손꼽으며 내가 그를 기다리는 건 / 또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
태양을 기다리는 아침처럼 / 별을 기다리는 밤처럼 /
그를 위해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건 / 또 얼마나 맑은 눈물 같은 일인가. //
우리는 / 태어나고 기다리고 죽나니 /
살아서 가장 햇살 같은 날은 /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촛불처럼 / 기다리는 날이라네. //
 
기다림의 끝자락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와 계십니다. 바로 오늘 밤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탄 예언자는 다윗 왕에게 하느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오랜 세월 감추어 두었던 신비의 계시”(로마 16,15)를 선포합니다.
 
“이제 모습을 드러낸 이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로마 16,26)

<복음>에서는 <제1독서>에서 예고되었고, <제2독서>에서 증언된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경위를 전해줍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천사는 “기뻐하여라.”고 선포하고, 그 이유도 밝혀줍니다. 그것은 그녀가 “은총이 가득한 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말에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그리고 천사는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말합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루카 1,34) 라고 말합니다. 이에, 천사는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 너를 덮을 것이다. ...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고 말하고,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시간에는 이 ‘마리아의 응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마리아의 응답’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응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1. <맨 먼저>, 우리는 ‘말씀 앞에 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경청이 발생하는지?’, 곧 ‘말씀의 경청이 발생하는 자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응답’의 ‘첫 마디’ 안에 있습니다. 곧 “보십시오.” 라는 첫 마디는 바로 ‘그가 있는 자리’를 드러내줍니다. 곧 그가 있는 자리는 ‘주님의 현존, 주님의 면전’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천사를 ‘대면’하고 있고, 그를 ‘향하여’ 있고, 그와 ‘함께’ 있습니다. 바로 여기, ‘주님과의 면전’이라는 자리가 바로 ‘경청’이 발생하는 자리요,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요, ‘응답’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는 바로 이 ‘현존’에서 시작해서 ‘현존’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는 ‘현존’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모름지기 대상을 향하여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애시 당초 하느님의 ‘현존’이 없이는 그 어떤 ‘기도’도, ‘만남’도 벌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주님 현존’ 없이 기도한다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한갓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독백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비록 자기 카타르시스는 될지언정, 기도 곧 하느님과의 만남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에 있어, “하느님 현존에 대한 면전의식”은 그야말로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이고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존’은 대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될까요?
‘만남’은 대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될까요?
 
그것은 분명,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의 방문’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보여주지 않으면 볼 수가 없고,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려주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만남’, 곧 ‘면전’은 그분의 ‘방문’으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먼저’ 찾아오신 까닭이 아니고서야, 그 ‘사랑의 방문’이 아니고서야, ‘만남’은 애초에 발생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나자렛 마을 마리아의 집으로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현존’은 ‘먼저 방문’하신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주님의 현존’이라는 ‘지극한 주님의 사랑 앞’에서 “보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바로 지금, 우리가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면전에 그분의 사랑의 방문 앞에 나와 대면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그분의 면전에서 마리아는 ‘그분과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단지 당신이 “주님”이시고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신앙고백만은 아닙니다. 곧 사실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한 감격으로, 진실 된 인정과 승복과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의 마음을 품은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 ‘“종”이 되고 싶으세요?’ ‘진정, “종”이 되고 싶은 이가 누가 있을까요?’ ‘대체 누가 ‘종살이’를 좋아할까요?’
 
사실, 자신의 권리를 지니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지배당하는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천하고 뒤틀린 질곡의 삶을 연상케 합니다. 더군다나 군대의 계급사회의 생리에서 상관 아래 매여 있는 하급자의 신분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우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하늘나라라 하더라도 “종”으로는 살아야 한다면, 가고 싶지 않겠죠.
 
그런데 <성경>에는 “주님의 종”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종”이란 대체 누구를 말할까요?’
 
대게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모세, 엘리야, 다윗 등이 ‘주님의 종’으로 일컬어지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예언자들, 대사제들, 왕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는 “종”을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 이’(첫째노래, 42,1-9), ‘사명을 받은 이’(둘째노래, 49,1-7), 그리고 ‘사명을 수행하면서 ‘박해와 거부당하는 이’(셋째노래, 50,4-11), ‘무죄하면서도 죄를 짊어지고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이’(넷째노래, 52,13-53,12)로 불리어 집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금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으로 그분 면전에 서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듣는 이에 합당한 마음과 태도’가 요청됩니다. 솔로몬 왕은 제사를 지내려 기브온에 갔을 때, 주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그렇습니다. 바로 이 ‘듣는 마음’에서 지혜가 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듣는 마음’이 필요할까? 곧 ‘어떤 마음’으로 들어야 할까?’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마음의 귀로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신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루카 9,44)
 
“귀담아들어라.”는 것은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심하게 정성을 다하여 귀 기울여 들음’이요, ‘말씀을 넘어 말씀하시는 분께 귀 기울여 들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듣기를 원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의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의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들음’에는 ‘마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귀’로 듣는 일입니다. 이러한 ‘경청은 이미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또 그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에, 이미 믿음(의 마음)으로 잉태하셨다.”
 
이처럼, ‘듣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것에 앞서,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귀 기울이는 ‘인격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경청이란, “전 인격이 말씀의 경청으로 팽팽”(암브로시우스)해져 있음이요, “하느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그레고리우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그처럼 전 인격으로 주님의 사랑에 젖어 매달려 있고, 그 사랑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듣는 이의 태도’는 ‘마음의 귀’로 듣되, ‘들려주는 대로 사실적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곧 자신의 견해나 관점을 내려놓고 듣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듣거나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이나 자기 견해나 주장에 따라 자기 방식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선입관이나 편견, 자기 관념을 내려놓고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려주신 분을 ‘향하여 듣는 것’이며, 그분을 ‘맞아들여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먼저 들려주시는 분이 “주님”임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해드리는 것이요, “주님”이 진정 주님 되시도록 ‘주도권’을 넘겨드리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의 종’으로서, 바로 그렇게 먼저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이 “들려주는 대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듣는 이의 태도’는 ‘마음의 귀’로 듣고 ‘들려주는 대로 사실적으로’ 듣되, ‘실행하기(지키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듣다’라는 단어로 히브리 단어 ‘쉐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듣는 것을 너머, 말씀하시는 분의 명을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 ‘들은 바를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을 듣고 명심하고 실천하여라.”(신명 6,3)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히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 ... 온갖 복이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신명 28,1-2)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말씀을 그저 흘러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담아 듣고, 들은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려는 순명의 마음’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제 우리는 <두 번째>로, ‘말씀을 품으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어디에서 활동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말씀은 대체 어디에서 활동하는가?’

그것은 ‘듣는 이 안’에서 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 안’에서 입니다. 이를 마리아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이 활동하시도록 내어주는 공간은 바로 ‘마리아 당신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말씀이 선포되어도 ‘듣는 이’가 없으면, ‘듣고 받아들이는 이’가 없으면, 말씀은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은 읽는 이(듣는 이)와 함께 자란다.”
 
그렇습니다. 결코, 말씀은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그저 내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허공중에 내뱉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분명하게 누군가를 선택하여 “향하여” 건너오는 것입니다. 곧 “향하여” 건너오는 사랑이요, 방문인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를 택하여 베풀어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곧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여 먼저 건네지고 ‘선사된 선물’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일인가! 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인가!’

이는 천사가 알리는 ‘마리아의 잉태 예고’의 첫 마디에서도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그러니 이는 결코 자신이 만든 아닌 것입니다. ‘주신 분’에 의해 건너오는 것이요,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신 분’이 먼저 있기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그분의 사랑’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선물로 주어진 말씀과 은총’을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자신의 가슴에 받아들여 품으셨습니다. 마음속에 품으시고 간직하셨습니다. 자신을 승복하고 수락하셨습니다. 말씀의 침범에 자신을 허용하고, 자신을 정복하도록 기꺼이 내맡기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머무는 자리’요, ‘하느님의 지상거처’요, ‘말씀의 감실’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것은 그것은, 그것은 바로, ‘성령의 활동’이요, 그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천사는 이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 너를 덮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쓰이고 있는 ‘덮다’(επισκιαξω)라는 단어는 모세가 ‘성막을 세워 봉헌하는 장면’에서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다(επισκιαξω).”(탈출 40,34-35)라는 표현과 서로 연결됩니다. 곧 ‘마리아를 덮은 성령’의 모습은 <탈출기>의 “성막을 덮은 영광의 구름”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었던” 것처럼,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덮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마리아의 몸’이 ‘하느님 현존의 새로운 지상 거처’임을 말해줍니다.
 
곧 ‘옛 계약 궤’ 안에는 ‘두 개의 십계명 판’,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든 금 항아리’,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가 보관되어 있었듯이, 이제 ‘새 계약 궤’인 마리아는 ‘십계명 판’을 넘어 선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을, ‘만나’를 넘어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사제 아론’을 넘어선 ‘하늘의 참된 대사제’를 잉태(요한 1,14,6,55-58)한 거룩한 그릇으로 드러납니다.
 
한편, <2마카베오서>에서는 ‘주님 영광의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 ‘계약 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말합니다(2마카 2,8). 그리고 이제 ‘영광의 구름’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바로 여기, ‘주님 탄생 예고’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세 번째>로, ‘말씀을 따르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을 바라야 하는 것일까?”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fiat’으로 응답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이 황당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혹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천사의 설명을 듣고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게 된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이미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누구의 뜻인가?’, ‘대체 그것을 원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알아듣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깨닫고서, 마침내 그분께 자발적인 믿음으로 ‘피앗’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코, 맹목적인 순종이나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본문>에 보면,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몹시 놀랐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8-29)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듣고 ‘자발적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이 뜻’이기에 자유롭게 ‘순명’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곧 ‘주님이 원하시니까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2009년에 복녀품에 오른 끼아라 루체 바다노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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