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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9)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로마3,21-31)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29 조회수56 추천수2 반대(0) 신고

사도바울 두려움과 장애물 극복 사도행전 16장 사도행전 26장 로마서 14장 예레미야 20장 성경말씀

2023.12.29. (금요일)

 

로마서9)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로마3,21-31)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26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27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28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만의 하느님이신 줄 압니까? 이방인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과연 이방인의 하느님도 되십니다. 30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어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다 같이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 주십니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내세운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존중합니다.

 

성경에 유명한 구절들이 많지만, 아마 그 최고의 구절들 중에 하나가 로마서 321절 이하의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이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도 사실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서 321절 이하는 많이 원래 의도를 놓치는 유명한 장이기도 합니다.

21절을 시작하는 그러나 이제는그럴 때 이미 앞에 그걸 함축하고 있습니다만, 앞에 것과 반대되는 상반되는 혹은 극적인 반전을 의미하죠. ‘그러나입니다. 그러니 이 구절을 읽으려면 11절에서 320절까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해야 됩니다. 확인해야 됩니다.

요약하자면, 사도 바오로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썼고, 자기가 복음의 종이 된 것과 그리고 그걸 전하는 일에 마음이 불타고 있다. 너희를 보기를 원한다 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이렇게 너희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유는, 너희가 이미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이 복음은 믿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너희의 믿음을 듣고 고마워하고 격려하고 이 편지를 써서 그 내용을 한 번 더 확인시키고 싶다. 이런 의도입니다. 왜 복음을 전해야 되는가?

왜 복음이 능력인가를 118절부터 우리가 하느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붙었죠.

우리가 하느님과 맞서고 불순종하고 스스로 멸망의 자리에 들어갔다. 그것은 인류가 역사 내내 저지른 짓을 보면 너무나 자명하다. 모두가 죄를 짓고 악하며 하느님을 찾는 자도 없고 신을 찾아도 하느님의 영광에 걸맞은, 하느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지 않았는가? 거기서 면제되는 자 없었다.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을 알지만 지키지 못했고, 율법이 없는 자는 무지한 채로 하느님을 외면하고 살았고, 유대인은 하느님을 아는 특권이 있었지만 불순종했고, 이방인은 당연히게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함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서 20절이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그걸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당면한 인간의 운명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대책이 없구나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들 하는 거 앞에 모두를 묶어서, 한 사람도 도망갈 수 없게, 아무도 핑계 댈 수 없게, 변명할 수 없게, 모든 길을 차단하고 너희는 다 죽음 아래 있고 하느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인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은 그런 차원에서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에 하느님의 한 의로움이 나타나서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것은 이제 차차 설명할 것입니다.

, 그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느님의 의()입니다. 믿음, 구원, 예수, 라는 단어가 복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이면서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 같은 이런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져라. 회개를 해라. 구원을 받아라.’ 이렇게 권유하지 않습니다. 여기가 매우 많이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여기는 설득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듯이 구원이 사실이다 라고 얘기하는 대목입니다. 이제는,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오신 지금부터 2천년 전 그러나 이제는을 시작하십니다.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는 세상이 다른 세상인 것입니다. 예수가 없었을 때는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인류 역사의 비참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예수 이후로는 하느님이 그 죄 짓고 하느님 외면하고 거역하고 하느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행하신 것으로 시작한 새로운 세상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질문이 있겠지만 로마서의 기본적인 목적은 이것입니다. 이 사실과 우리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잘 하는 조건으로서 많이 쓰입니다. 조건으로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 영접(迎接)해야 된다, 회개해야 된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그렇게 쓰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없다. 모든 입을 막아. 모두가 죄인이다. 방법이 없다. 필멸의 운명 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라고 뒤집음으로써 여기서 믿음은 앞에서 없었던 방법, 앞에서 만들 수 없었던 방법을 소개하는 단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방법이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죽음과 멸망의 자리에서 승리를 만들어내는 하느님의 능력 그게 믿음입니다. 그걸 대조시킵니다.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것입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을 도리도 답을 만들어낼 방법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개입하여 그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이 하십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하느님의 의(), 이렇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얼마나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하느님이 하신 일, 우리의 조건과 자격을 묻지 않고 스스로 홀로 하신 이름을 강조하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 7절부터 보세요,

 

(2티모1,7-11) 7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십니다. 8 그러므로 그대가 우리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이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죄수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천지창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10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제는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깨서는 죽음의 권세를 없애 버리시고 복음을 통해서 불멸의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해서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대로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가 한 것에 대하여 보상한 것이 아니오, 우리의 요구에 반응하신 것도 아니오, 오직 자기의 뜻과 영혼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 오직 하느님이 이유고 원인이고 방법이고 목적이고 내용이고 능력입니다. 하느님이 하신 것입니다.

일의 중요성은,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든가 이해한다는 것이 이 일을 성취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오해하면 안 되는 다른 문제입니다. 마땅히 해야 되고 순종해야 되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닙니다. 그 둘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고 우리가 이해해서 합의되는, 그래서 성취되는, 그래야만 실제가 되는 것보다 우선하는 하느님이 이 일을 이루어 놓으셔서 그 사실 속에서 우리가 나중에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면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먼저 있고 이해가 나중에 쫓아오듯이 우리가 믿으면 이 일이 가치가 있고 또는 실재가 되고 우리가 안 믿으면 그만인 것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예수님 오신 것이 무효가 되고 헛것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여, 죽음이 끝인 세상에 사망(死亡)이 끝이 아니고 반전이 있는 세상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선포를 하는 겁니다. 새로운 세상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 말은 묘하게 쓰이지만, 사실 바오로에게 있어서는 그겁니다.

네가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그 혜택을 받고 그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 놨다.’ 그거죠. 이미 만들어놨다. 아 여기가 로마서의, 사실 압권입니다. 그러나 이제로 나눈 역사는, 역사라는 것이 시간 속에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에 번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구원을 성취 하셨습니다. 허락 하셨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예수의 죽으심이 취소되거나 뒤에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이걸 구원론으로 끌고 가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 얘기를 하는 때가 아닙니다. 이 큰 틀이 있고, 그 속에서 그 전에 우리가 죄와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심판 아래 있었던 것 같이 나중에 나오지만, 낳자마자 죽어 죄지을 틈이 없는 어린 아이들도 죽듯이, 죽음 아래 있었듯이, 예수가 오신 이후로는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건 또 다른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우리 각각에게 채우시는 구원의 영광으로 다시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책임져야 하는 일이고, 역사라는 것이 예수 전에는 가는 길이 죽움일 수밖에 없는 것이, 최고의 권세고 운명이었던 자리에서 예수가 오신 이후로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나중에 예수 앞에 심판대에 서야 하는 것처럼, 이게 다가 아닌 세상이 믿는 자들에게는 영광의 운명, 승리의 운명의 세상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위하여 사는 것이 경고되는, 지적되는 세상이 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가보니까. 아테네에 간 바오로가 이제 우상이 가득한 것이 분노(忿怒)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렇게 전합니다.

 

(사도17,24-31) 24 그분은 이 세상(우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 손으로 채워 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에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 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27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28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 간다' 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라' 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29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 낸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무지했던 때에는 눈을 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는 사람에게나 다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31 과연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분을 시켜 온 세상을 올바르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심판이 있다. 즉 이 세상을 살면 다가 아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다. 존재의 가치에 있어서, 시간에 있어서 하느님이 계시고 영혼을 준비하고 다스리고 축복하시는 주인이 있다. 그 앞에 서야 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예수를 보내어 죽은 자 가운데 부활시킴으로써 모두에게 증거를 삼았다. 그래서 반응이 이겁니다.

(사도17,32) 32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바오로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훗날 다시 그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는 겁니다. 부활이라는 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문제죠. 오늘이 전부면 여러분 성실히 살겠습니까? 오늘이 전부면 오늘 다 소비해야죠. 내일이 있으면 남겨둬야죠. 남길 게 없으면 내일 살 걸 오늘 준비해야죠. 내일이 하느님의 통치와 하느님의 심판인 대로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그러면, 오늘을 그 목적지의 연장선상에서 살아야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뭐죠? 내일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으면 누가 숙제를 하며 교과서를 사겠습니까? 빵 사먹지.

제 친구 하나가 학교 다닐 때 광화문에서 어떤 깡패를 만났습니다. 그 깡패가 너 시키 잘난 척하고 밤에 어딜 싸돌아다녀?.’ 제 친구가 이렇게 답을 했어요. ‘빨리 때려. 학원에 늦어.’ 내일이 있는 사람이 오늘을 사는 법입니다. 알아들으시겠죠.

로마서의 무서운 선언인 겁니다.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저 여기서 견디다 죽어서 보상받는 식으로 생각하면 오늘이 뭔지 모릅니다. 이미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빨리 때리라그러십시오. 천국가게 빨리 죽이라고. 이렇게 도피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예수 안에서 허락된 구원, 이것을 한 개인을 설득하고 결단을, 그래서 자신을 맡기는 하느님의 구원을 누리는 그런 선택과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운명, 우주라는 스케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에 흔들립니다. 마치 선과 악이 나뉘어서 자기의 영역을 갖고 있는 것 같고 신자와 불신자가 나뉘어 있고 세상과 하느님이 나뉘어서 세상에 권세의 영역이 있고 우리는 죽어야만 우리 영역을 물려받는 식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다 그 손 안에 있습니다. 이미 시작된 세계입니다.

하박꾹이 이렇게 묻습니다. 여기 로마서 1장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설명하면서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하박꾹 예언자는 유다의 멸망 뒤에 예언자를 합니다. 부패하죠. 정치사회적으로 부패한 것이 만연돼 있고 종교적으로 신앙에서 부패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슴이 아파서 하느님 앞에 묻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이 선민들이 이렇게 부패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의인이 이 사회를 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뭐라고 답하셨느냐?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 심판을 내리겠다. 갈대아인을 일으켜, 바벨론을 일으켜 이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그러니까 이제 혹 떼려다 혹 붙였잖아요. 이 사회를 정당한 사회를 만들어주십시오 그랬더니, 그거 잘못한 거 알고 있으니까 싹 쓸어주마. 그러니 이제 다시 기도를 하게 됐죠. “하느님 이방 민족을 불러서 하느님의 백성을 멸망시키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하느님이 이렇게 답하셨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 로마서 118절부터 계속 뭘 했냐 하면 하박꾹의 외침, 의인이 악행자들 틈에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는 겁니다. ‘의로움은 없다. 너희끼리 나눈 거다.’ 유대인의 마음이 무엇이냐? 모든 일(凡事)에 많다. 그러나 너희가 하느님 섬기기에서는 실패했다. 그러면 너희가 선민이고 너희가 가진 율법과 너희가 받은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고 물으셨듯이 모든 입을 막았습니다.

하느님, 우리 의인들이 이렇게 악행자들 속에서 탄식하고 있는데 왜 이 세상을 하느님의 통치로 정상화시키지 않습니까?’ “내 정상화시킨다. 내 심판할 것이다.” ‘아니 그럼 우리까지 몽땅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죽이실 수 있으니까?’ “걱정마라. 나는 하느님이다그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심판 아래 묻고서 아무도 도망갈 수 없는 그 하느님의 품으신 심판을 해서, 버려둔 것이 아니라 진노하여 묶으신 그것이, 그래서 도망갈 수 없게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반전시키는 승리로의 묶으심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걱정마라. 나는 하느님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역사에 성취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아무도 변명하거나 부족하다고 얘기할 수 없게 창세기 28장에 가면, 그 가치가 이미 창세기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창세28,10-15) 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11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 간 뒤였다. 그는 그 곳에서 돌을 하나 주워 베게 삼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13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14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 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굉장한 축복입니다. 언제 줬죠? 야곱이 아버지 속이고 형 속이고 장자권 뺏고, 대신 사기(詐欺)쳐서 축복받고 형의 미움을 사서 도망가는 자리입니다.

하나도 자랑스러울 것이 없고, 하나도 복을 받을 이유가 없는 자리, 야반도주하여 노숙하던 자리에 하느님이 오셔서 나는 너의 조상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이고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너 누운 땅, 내가 너 다 준다. 너 디비져 누운 자리, 내가 다 준다. 동서남북으로, 니 눈 끝 간 데까지 다 준다. 니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 떠나지 않는다.”

더 큰 축복, 큰 틀에서의 축복, 아브라함의 후손, 비로소 도망갈 수 없는 축복의 자리에 있는 것을 선언하시지요.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확인하고, 우리가 만족스러운 나라는 하느님이 내 편이고, 내가 실패하고 내가 아슬아슬한 날은 하느님도 고민하시는 것으로 보이니라. 지금 얘기하는 그것입니다.

이제는 율법(律法)외 하느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느님의 의()이니 차별이 없느니라.’

거기서 믿음이 뭡니까? 하느님의 진실하심, 능력, 자비와 복 주시는 거룩하심입니다. 그 하느님의 축복이, 약속이, 의지가 이천년 전의 역사 속에 세워졌다는 번복할 수 없고 훼손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사실로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고 영원한 나라 그 약속의 그 자리까지 그 목적을 하느님의 진실하신 의지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누리십시오. 순종하고 충성하고 복된 삶을 사시오. 긴가 민가 하고 구경하지 말고 들어오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인생은 놀라워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이 무엇을 이미 하셨는지,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어디로 역사와 인류를 끌고 가고 있는지, 말씀으로 확인했습니다. 겁내지 말고 하느님의 일하심에 우리 인생을 맡겨 그 영광과 승리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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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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