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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16)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 (로마6,12-23)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05 조회수135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4. 1. 5. (금요일)

로마서16)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

(로마6,12-23)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할까 하여 이렇게 인간사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 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 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여러분은 정의에 예속되지 않고 제멋대로 놀아났었습니다. 21 그 때에 여러분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활은 결국 죽음을 안겨 줍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대표하는 구원, 영생, 은혜, 은총이라는 그 단어들이 세상에서 쓰는 이해와 늘 혼동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구원, 영생, 은혜, 은총이라는 말의 의미를 자꾸만 왜곡하는 것이 우리들의 그 현실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고 성경을 따라가 그 개념들이 성경 안에서 어떻게 그 단어들을 만들고 있는지를 따라가는 것, 이것이 성경을 읽는다, 설교를 한다, 공부를 한다 라는 그 이유이며 그 유익입니다.

이 구원에 관한 이 성경의 설명, ‘복음(福音)이 무엇인가를 논(論)하는 로마서’입니다. 은총이라는 단어에 왔죠. 은총이 뭐냐? ‘죄 아래 있지 않는 거다. 법 아래 있지 않는 거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뭐 만만치 않죠.

죄를 용서하는 거다. 죽을 자를 살린 거다. 이렇게 되니까, 죄 많은 곳에 은총이 더 많았다니까, 죄를 또 지면 또 용서해 줄 것이다. 죽으면 살려줄 것이다. 이렇게 밖에는 우리가 이 은총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또 더 나은 자리를 놓치곤 합니다. 그 얘기를 이제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6,14)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면 뭐 단박 생각나는 것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가? 이거죠. 법(法) 아래 있지 않고 은총(恩寵) 아래 있다. 이런 말들이 갖는 의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생명을 주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목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느님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자기 것으로 만들자 타락해버렸습니다. 생명체이지만 생명을 만들어낼 실력이 없고, 영광을 약속받았지만 영광을 만들 실력은 없는 자가 그 공급자를 외면했습니다. 그게 타락이죠. 부패하게 되었고 왜곡되고 죽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이 하고 싶었던 앞부분은 뭐였냐 하면, ‘그리하여 하느님이 예수를 보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끌어모아, 그 존재를 소멸시켰다’는 겁니다. 우리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주인이었던 종족을 멸하셨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끌어안고 죽으신 바로 그 연합, 그 ‘하나됨’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우리를 새롭게 부활시켜, 이제는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예수의 후손이 되게 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걸 하느님이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격과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과 능력으로 그리하셨기 때문에 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총, 은혜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잘못한 것을 용서받았다. 그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 하나로 묶으면 성경에 제시되는 대로 그럼 죄를 지으면 또 용서해 줄 것이냐? 죄를 많이 지으면 은혜도 더 많이 받을 것 아니냐? 라는 잘잘못의 개념에서 은혜가 자꾸 축소됩니다.

은혜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예로, 사무엘서에 나타나는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는 것이 성경의, 말하자면 설명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입니다. 그는 준수하게 생겼고, 체격이 좋아서 다른 사람보다 어깨 하나 위인, 장사이며 겸손했습니다. 행구 뒤에 숨었죠. 그는 초대 왕이 되어 정치력과 다른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윗이 이스라엘을 구한 사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서 크게 시험을 받아 망하는 길로 들어섭니다.

그가 다윗을 시기한 이유는 사울이 왜 망하게 되었는가를 잘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적장 골리앗을 당하지 못합니다.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데 다윗은 전쟁에 나갈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아 집에 있다가 전투에 참여한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부모의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랬다가 벌벌 떠는 자기 군사를 만나죠. 적장을 만나고 믿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거룩한 분노로 골리앗 앞에 섭니다. '네가 칼을 차고 창과 표창을 잡고 나왔다만,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을 믿고 나왔다.(1사무17,45) 물맷돌 한 개 딱 던져 돌이 이마에 박혔답니다. 시속 1,000킬로는 돼야 아마 박힐 겁니다. 돌이 이마에 박힐려면 말이죠. 그리하여 영웅이 되죠.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18,7) . 이 백성들의 칭송에 사울이 넘어갑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어야 되는, 그 욕심과 그 허용이 자기보다 큰 인물 앞에서 녹아드는 겁니다.

악귀(惡鬼)가 들고 발작을 하고 거문고 하는 다윗을 향하여 창을 던지기도 수차례, 결국 다윗은 생명을 위하여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를 수색하여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울이 ‘엔게디 광야에 다윗이 숨었노라’ 라는 제보를 받고 휘하를 이끌고 엔게디 광야로 수색을 나가죠. 피곤하여 동굴에 들어가 잠시 쉬는데, 그 동굴에는 이미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들어와 숨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사울이 잠이 든 모양이었고 다윗은 그를 죽일 기회를 찾습니다. 측근들이 모두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를 죽이십시오. 이미 하느님이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삼았고 사울은 하느님이 버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부합니다. 옷자락만 조금 베어 갖고 나와 건너편에 멀찍히 떨어져 고함을 지르죠.

“사울 왕이여! 왜 무고한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저는 왕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왕의 옷자락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그런 일을 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왕이여! 왕이여! 분노를 거두고 적개심을 버리고 돌아가십시오.”

사울이 웁니다. 니가 다윗이냐? 내 아들 다윗이냐? 내가 잘못했다. 그리고 돌아가지요. 그러나 그걸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분노가 되살아나고 그를 죽이러 하길라산 앞에 찾아 나옵니다. 많은 휘하를 이끌고 왔는데 왜냐하면 그때 블레셋과 다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을 치고 밤에 잠이 듭니다. 다윗이 측근과 함께 진중을 뚫고 들어가 모두가 잠들어 깨닫지 못하는 중에 사울왕 곁에 가지요. 그를 죽이라는 측근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창과 물병을 들고 나옵니다. 다음 날, 날이 새요. 큰 소리로 또 외치죠. “왕이여, 보소서! 당신의 부하들이 당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내가 당신 곁에까지 가고 당신을 죽일 수 있었으나 그리하지 았습니다. 이 창과 물병을 보시오.”(사무엘 상26장)

사울이 면목이 없습니다. 부끄러워합니다. “미안하다. 내가 어리석었다.” 그리고 돌아서지요. 그러나 사무엘 상 31장을 보면, 그렇게 돌아서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간 사울은 이런 최후를 맞이합니다.

(1사무31,1-6) 1 불레셋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이스라엘군은 불레셋군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길보아산에서 마구 쓰러져 갔다. 2 불레셋군은 계속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를 쳐죽였다. 3 전세가 이미 다 기울어진 판에 사울마저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말았다. 4 사울은 자기의 무기당번에게 일렀다. '저 오랑캐들에게 붙잡혀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네가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나 무기당번은 감히 칼을 뽑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사울은 손수 칼을 뽑아 자결하였다. 5 사울이 죽는 것을 보고는 무기당번도 자기 칼을 뽑아 자결하였다. 6 그리하여 그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당번과 사울의 부하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이렇게 사울의 생애는 끝이 납니다. 욕심은 있고 소원은 있으나 그것을 승리로 끌어갈 수 없는, 한 인간의 비극을 그가 대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무엇으로 사울과 대조되는가? 그는 하느님이 함께 하고 사울은 버려서? 혹은 다윗은 믿음이 있고 사울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식의 대조는 없습니다. 둘이 다 울 수밖에 없는 현실로 간다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사무30,1-6) 1 다윗은 부하를 이끌고 사흘만에 시글락에 이르렀는데 그 때는 이미 네겝과 시글락이 아말렉군에게 약탈당한 뒤였다. 그들은 시글락을 쳐 불을 지르고는 2 여자를 비롯하여 거기에 있던 사람은 하나도 죽이지 않고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사로잡아 갔다. 3 다윗의 일행이 성에 이르러 보니 성은 불타고 있었고 아내와 아들 딸들은 이미 사로잡혀 간 뒤였다. 4 다윗과 함께 있던 무리는 소리쳐 울부짖다가 지쳐서 더 이상 울 기운조차 없게 되었다. 5 다윗의 두 아내 이즈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가르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혀 갔다. 6 온 무리는 아들 딸을 잃고 격분해서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 수군거렸다. 그리하여 다윗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으나 자기의 하느님 야훼를 믿고 힘을 얻었다.

다윗의 눈물도 사울의 눈물과 같습니다. 현실을 극복할 힘이 없는 자신의 한계에 대하여 웁니다.

사울이, 자신이 모든 국민의 칭송과 영광을 독점하지 못한 것으로 부끄럽고, 어리석은 길을 간 자신에 대하여 울었던 것처럼, 그것을 벗어날 길이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울었던 것처럼, 다윗도 자신의 현실과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웁니다. 고통으로만 울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웁니다. 그는 골리앗을 죽인 사람입니다. 국민의 영웅입니다.

사울 왕의 시기(猜忌)를 받고 질투를 받는 건 어떤 의미에서 이해가 되지만, 사울 왕에 대하여 활 한 번 쏘지 않고 적대 행위를 하지 않은 다윗의 믿음도 놀랍지만, 그는 결국 블레셋으로까지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블레셋은 우리의 한국 사람의 정서로 이해를 하자면,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했는데 일본으로 도망간 겁니다.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현해탄에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그리로는 가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런 명분으로 얘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윗인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라엘로는 못 간다. 거기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하여 우는 겁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이 영광과 명예를 주시는, 이 부끄러운 자리로 나를 떠밀어 이렇게 답이 없게 하십니까? 다윗의 눈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죠. 하느님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울은 끝 간 데 없는 방황과 황폐함과 쇠락과 그 길을 걸어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무게에, 인류의 운명에 묻혀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묻히도록 하느님이 놓아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형편을 바꿔놓았거나 다윗에게 뭘 어떻게 한 게 아니라, 그 눈물의 자리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하느님이 막아, 붙잡아 놨다고 합니다.

어떻게 돌아섰을까요? 뭘 했을까요? 모릅니다. 사울은 전쟁터에 가서 결국 자결했고 다윗은 돌이킵니다. 무슨 실력으로 돌이켰을까요? 죽을 수가 없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돌바닥이 물이 되고, 칼로 찌르면 칼이 부러지고, 대가리를 박으면 벽이 무너지고, 할 수 없이 살아있는 거죠. 그걸 은혜라고 합니다. 납득이 안가죠. 좀 더 가봐야 됩니다.

(2사무7,1-17) 1 야훼께서 사면의 원수를 다 물리쳐 주셨으므로 다윗왕은 궁에서 마음 놓고 살게 되었다. 2 그렇게 되자 왕은 예언자 나단에게 말하였다.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 둔 채 그대로 있소.' 3 나단이 왕에게 아뢰었다.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4 그 날 밤, 야훼의 말씀이 나단에게 내렸다. 5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나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6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집 안에서 살아 본 것이 없다. 7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내 백성 이스라엘을 맡겨 보살피게 한 어느 영웅에게 어찌하여 나의 집을 송백으로 지어 주지 않느냐고 말한 것이 있었더냐?' 8 너는 이제 나의 종 다윗에게 만군의 야훼의 말이라 하며 이렇게 일러 주어라. '나는 양떼를 따라 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 내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9 그리고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들을 네 앞에서 쳐 없애 버렸다. 세상에서 이름난 어떤 위인 못지 않게 네 이름을 떨치게 해 주리라. 10 또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이 머무를 곳을 정해 주어 그 곳에 뿌리를 박고 전처럼 악한들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없이 안심하고 살게 하리라. 11 지난날 내가 위정자들을 시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던 때와는 달리 너희를 모든 원수에게서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하리라. 나 야훼가 한 왕조를 일으켜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2 네가 살 만큼 다 살고 조상들 옆에 누워 잠든 다음,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국권을 튼튼히 하고 13 나에게 집을 지어 바쳐 나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든든하게 다지리라. 14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만일 그가 죄를 지으면 나는 사람이 제 자식을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듯 치리라. 15 그러나, 내가 일찌기 사울에게서 내 사랑을 거두었지만 그에게서도 그처럼 내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리라. 16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 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17 나단은 계시받은 대로 이 모든 말씀을 다윗에게 전하였다.

핵심이 뭐죠? ‘네가 나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니들이 나를 위하여 할 게 있는게 아니다. 그건 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는 거다. 내가 주는 자다. 나에게 부족한 것 없다. 니들이 나한테 해줄 거 없다. 내가 너한테 하는 거다. 니가 성전을 짓겠다고? 내가 너 잘 되게 하는 하느님이다. 니가 나한테 해줄 거 없다.’ 이게 은총이죠.

은총이란 하느님의 통치 아래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와 권능과 복 주심과 은혜와 자비하심의 보호 아래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잘했다, 잘못했다의 싸움이 아닌, 잘못한 것을 용서해주는 싸움보다 큰, 하느님의 복 주심과 영광의 자리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할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처음 너희를 만들 때부터 내가 너희에게 하려고 하는 일이 있었다. 너희가 나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것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예수 안에서 일을 구체적으로 시행했다. 보라.“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이 고백을 하죠.

(2사무7,18-29) 18 이 말을 듣고 다윗왕은 야훼 앞에 나아가 꿇어 앉아 아뢰었다. '야훼 나의 주님, 제가 무엇이며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이런 자리에까지 끌어 올려 주셨습니까? 19 야훼 나의 주님, 이것만도 분에 넘치는 일인데 훗날에 이 종의 집안에 있을 일까지고 말씀해 주시고 알려 주시니, 20 고마운 마음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야훼 나의 주님께서는 종 다윗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21 개만도 못한 이 종을 돌보시어 이처럼 크신 일을 하심으로써 소인을 알려지도록 하셨습니다. 22 야훼 나의 주님은 진정 위대하십니다. 우리는 일찌기 하느님과 같은 분이 또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고, 다른 신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23 세상에 고생하는 민족을 찾아 가서 손수 건져 내어 자기 백성으로 삼고 유명하게 만들어 준 신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야훼 께서는 두렵고 놀라운 일을 하셔서 하느님의 백성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시고, 여러 민족을 그들이 섬기던 신과 함께 몰아 내셨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 같은 민족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24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25 야훼 하느님, 이제 이 종과 종의 왕실을 두고 하신 말씀을 길이 변치 마시고 이루어 주십시오. 26 그러면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드높여 만군의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 할 것입니다. 27 만군의 야훼 이스라엘의 하느님, 하느님께서 친히 이 종의 왕실을 세워 주시겠다고 밝히셨기에, 이 종은 감히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28 야훼 나의 주님, 주님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며, 하시는 말씀에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이 종에게 이토록 좋은 말씀을 내려 주셨으니, 29 부디 종의 왕실에 복을 내려 주시어 하느님 앞에 영원히 서게 해주십시오. 야훼 나의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이 종의 왕실은 복을 길이 받아 누리겠습니다.'

여기가 은혜(恩惠)입니다. 하느님이 이 일을 행하셨으니 이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지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다. 내가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게 뭐라고요? 은혜는 지위와 기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며 우리가 법 안에 있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패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패하는 일이 생길 수 있지만, 그걸로 절대 끝이 안 나는, 기회를 허락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마음껏 위대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하게 살 지위(地位)와 기회를 허락(許諾) 받았습니다.

그러니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바쳐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라 그러는 것입니다. 죄 짓지 마라 정도가 아니라 네 인생이 얼마나 영광된 기회를 받았는지 알라. 자, 살아 보라. 그런 것입니다.

"아이고 못 살겠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가 아니라 그런게 아니라 살아낼 기회, 피와 땀과 눈물을 가지고 우리 몸뚱아리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사람은 어떤 영광과 명예를 가지는가를 살아낼 구체적인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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