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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20) 성령(聖靈)의 법(法) (로마7,21-8,11)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09 조회수12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1. 5. 21사도바울

 

 

2024. 1. 9. (화요일)

 

로마서20) 성령(聖靈)의 법()

 

(로마7,21-8,11)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25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4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5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7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8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9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을 살아있습니다. 11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은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724절의 고백은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모두 예외가 없는 경험일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제가 읽은 책 중에는 이 경험이 없으면 신자가 아니다. 그렇게 써놨을 정도니까 이건 누구나 겪는 것이죠.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겪고, 믿는 사람들도 겪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양심과 윤리와 도덕성에서 이 고백을 않할 수 없고, 믿는 자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더 깊고 더 처절하게 이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 고백들은 다음 25절에 보듯이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라는 표현 같이 이것에 대한 한탄입니다.

왜 나는 선을 행하지 못할까? 왜 나는 자꾸 악을 행할까? 라는 의지력과 분별에 대한 한탄이 아니고, 소원을 갖고 있으나 실제로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죄 아래 붙잡혀 있는 신세다. 그게 이 로마서 7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현실인 것입니다.

() 아래 사는, 이 세상을 사는 자연인들의 현실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이제 복음의 복음된 가장 중요한 핵심된 그 내용이 소개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리로 가기 전에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을 때는 모르고 그랬을지라도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는 선을 향하고 의로워져야 되지 않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인데, 이 문제에서 신자들이 예외 없이 모두 이 과정을 거칩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를 거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실패하고, 할 때 잘못하면, 그 잘못을 만회하는 그 일로 인하여 복음의 복음된 것을 스스로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오해하게 됩니다. 제일 많이 하는 것이 이거겠죠. 아 노력하고 기도하고 연습하고 회개하죠.

제일 무서운게 회개입니다. 회개를 하면 일단 이 문제는 거기서 끝이 돼서 무섭습니다. 회개를 하면 안 됩니다. 아 어렵죠. 그럼 하지 말라고? 그렇게 가자는 얘기가 아니고 회개를 해서 때워야 되는 게 아니라, 다음엔 이겨야 됩니다. 진걸 이기기 위한 하나의 발걸음으로 진전해야 됩니다.

예수가 없을 땐 그게 불가능합니다. 왜요? 죄의 권세 아래에 있으니까 아무리 원해도 안 됩니다. 그걸 필리피서 3장에서 사도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필리3,5-9) 5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는데 하느님과는 그 관계에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예를 들까요? 세상적 차원에서 도덕과 윤리와 양심에서 훌륭하면 우리 다 훌륭하다하다고 쳐줍니다. 훌륭하지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본인 하나 훌륭하죠.

그리스도교가 얘기하는 것은 하느님이 훌륭하시다는 칭찬과 증명을 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오시었다에 대하여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복이 되시고 우리의 능력이 되시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신다 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지, 하느님은 공정하시고 흠이 없으시고 그렇게 얘기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거나 하느님을 증명하고 우리 자신을 증명받아 자존심을 세워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우리의 존재와 인생의 가치와 운명에 대하여 하느님의 부르심과 복 주심에 대한 영광과 생명과 진리에 부요함에 대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자식으로 부르시는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감격하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은 이거죠.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하는 이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으되,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러 돌아가는 일로 그의 율법의 성취가 하느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됐습니다.

하느님과 아무 관계가 없으면, 자랑이 있고 승리가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으로부터만 나오는 진리도 생명도 자비도 용서도 은혜도 어떤 가치도 어떤 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거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다만 옳아서 하느님이 내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자기 안의 자랑과 근거를 가지는 싸움이 아닙니다.

회개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는 이유는 회개함으로 실컷 내가, 하느님이 벌주시기 전에 실컷 내가, 자복하여 자기 마음이 이제 시원해진 것을 회개라 그러지 않습니다.

잘못했다고 댓돌에 대가리 박아서 피 흘리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자의 승리로 나가기 위하여 한 번 넘어진 것이요 두 번 넘어진 것이요 홀딱 떨어진 것을 디디고 나가는 과정으로 삼키고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끝나버린 것들이면 진전은 없고 성숙은 없고 다만, 만 남습니다.

거기는 거친 표현이 나올 것 같아서 제가 하는 말 알아들으시죠?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달라 보여야 됩니다. 가장 중요하게 만나고 싶어야 됩니다. 생명을 만나는, 생명의 환희와 생명의 깊이와 그 찬란함과 그 진정한 신앙의 과정 속에서는 자책이 늘 등장합니다. 절망이 늘 등장합니다.

어떻게 극복하냐구요?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 날 부르소서!’를 기억하는 겁니다. 그래 죄인을 부르러 왔대. 이걸 다시 기억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 밤낮 죄 짓고, 그만하고죄 짓고 그렇게 갖다 써먹는 게 죄입니다. 그 말을 왜 그렇게 갖다 인용을 하시죠. "용서가 있단 말이지. 다시 할 수 있단 말이지." 그래야지 "다시 할 수 있단 말이지. 이게 끝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게 써야죠. 그러니까 넌 게으른, 그렇게 갖다 쓰시는 건 아니죠.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그래서 이 725절에 있는,

 

(로마7,25) 25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끝난 것 같은데 이어져 있는 말은, 24절에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이 찬송과 경탄의 고백 다음이 25절말씀, 도무지 개선되거나 해결되는 게 없어요. 이게 뭐예요? 소원은 있으나 실천을 할 수 없다. 왜 나는 죄의 노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존재다.

(로마8,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여기하고 7장과 8장의 차이가 뭐냐? 예수를 분기점으로 한 과거와, 현재인 거예요. 예수 이전에는 우리는 다 죄의 노예였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었다. 설사 선한 일을 소원하더라도 할 수가 없었다. 죄가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린 그의 노예였다. 지금은 다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결코 단죄함이 없다는 거야.

죽음에 이르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너희가 저지르는 실수나 실패가 죽음으로 끝나도록은 놔두지 않는 세상에 왔다. 예수 안에 있다. 그게 현재라고요. 이건 과거고. 예수는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니까요. 왜 과거에 죽으셨냐구요? 돌이킬 수 없게, 번복시킬 수 없게, 과거에 죽으시고 우린 지금 믿는다니까요.

우리가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는 어떤 절망과 실패에도 십자가 사건을 번복시킬 수 없는 역사라는 걸 기억한다면 우리들의 생애가 나의 부족함이나 나의 못난 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는 생각을 당연히 가져야 되고, 그리고 그 생각을 가지면 일어나야죠.

"계속 누워있어도 가겠네." 그러면, 여러 가지가 와요. 뭐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돼요. 일어날 수 밖에 없어요. 일어나지요. 우리 생에 부닥치는 어떤 현실도 나중에 로마서 8장 뒤에 가면 나오는 게 그겁니다. 제가 잠깐 읽어볼까요.

(로마8,35.38-39)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선언이 그래서 나오는 거야. 현재는 예수 안에서 이룬 새 생명 안에 있는 거예요. 부활이 운명인 거에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는 운명을 가진 자로 살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면서 가지는 것이 다만 예수를 믿었는데, 왜 나는 실패하지? 왜 나는 안되지? 정도로 자신에 의해 자신의 결심, 자신의 의지, 자신의 유효성 정도로 자신을 점검하는 것은 아직도 구습을 따르는 것입니다. 본인 안에 관심을 갖고 싶죠. 예수 믿는 것 같고 싶은 거예요.

예전에는 주로 했던 게 단식, 자해를 가함으로써 그 잘못한 것을 이렇게 대가를 치른 것 같은 심리적 안정감을 취하는 게 제일 흔했어요. 또는 과도한 헌금을 한다든가, 과격한 그 약속을, 서원을 한다든가. 이런 식으로, 이게 전부 안심을 하는 거예요.

자신을 그 자신의 신앙이 확인이 안 돼서, 새 생명 가운데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말하자면, 우리 밖에서, 더 높은 데서, 지극히 높은 데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우리 안에 그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인하여 막막해 하고 합니다. 로마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거였거든요.

고린도전서 15장에 가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단죄함이 없다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돼요.

(1코린15,55-58) 55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승리(勝利)를 주시는 거예요. 밖으로부터 이 승리가 와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승리가 와요. 우리가 해야 되는 건 그 승리를 누리는 거예요. 승리를 줬는데 앉아서 받지 말고 승리를 누리세요. 인생 전체, 우리들이 만나는 모든 정황, 모든 경우에서 승리를 누리세요.

예전에는 우리가 세계적인 쾌거가 드물 때는, 김기수 씨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하고 카 퍼레이드 하고, 박세리 씨도 카 퍼레이드 하고 그랬어요. 승리를 누리는 거예요. 그분들이 어디 앉으면, 그래서 그분들과 상관없는 일에 이렇게 스타가, 영웅들이 이렇게 오면, 전체가 빛이나 영광스럽게.

그 모임을 생각하고, 그 영광을, 말하자면, 나누는 자가 영웅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서 있음으로써 나로 인하여 내 나와바리는, 아 저도 그런 말을 쓰나 옛날 거친 세월을 살 때 쓰던 하는,

(창세12,1-3) 1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봐야 복을, 축복을 하든지 저주를 하든지 할텐데, 그가 나그네 길 인생을 살아, 가능한 한 많은 사람, 많은 경우를 만나야죠. 그래요 안그래요? 그래도 편안한 게 좋다. 그런 얼굴로. 이 로마서 8장으로 돌아와 바로 그 하느님의 능력, 구원의 능력, 죽음을 이긴 예수로 보인 부활의 능력이라는 세상 그 통치, 그 운명, 그 힘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영()으로 산다 그래요. 그게 오해가 많은 부분이죠.

(로마8,3-9) 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4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5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7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8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9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조심할 것은, 이것은 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원론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보이는 물질과 거룩한 어떤 정신으로 이분법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육신(肉身)'이란 보이는 것이 전부인 걸로 알고 있는 죄악(罪惡)된 세상의 길, '()'이라고 표현된 건 성령으로 대표되는 하느님의 은혜와 부활의 권능 아래 살게 된 하느님의 백성의 길을 말하는 겁니다.

마음에 아무런 죄악된 어떤 미혹도 한 점의 흠도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걸 영에 속했다 그러지 않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시험과 비겁한 생각과 두려움이 드는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아슬아슬하게, 조마조마하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생각 자체가 옳은 생각만, 거룩한 생각만하고, 그래서 사심이 없고, 공평이라는 추상명사로 가는 존재가 되길 원합니다. 개떡같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이 위협과 시험은 우리에게 늘 그림자같이 또 따라다닙니다. 그걸 이기는 거죠.

날 너에게 내줄 순 없어. 그러나 이렇게 붙잡고 늘어서 이렇게 찌그러지게 하는 겁니다. 잘 안 되죠. 그러나 지지 않기로 하는 겁니다. 왜요? 그쪽은 지면 늘 후회가 되고, 내가 늘 옳은 것을 위해서 일할 만큼 실력이 있어서 그러기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배우는 거예요.

잘난 척은 해봤자 꽝이다. 고함은 질러봤자 원한만 쌓인다, 못나게 굴면 내가 손해다.” 이렇게 한 걸음씩 매해 떡국을 먹을 때마다 가락가락 속에 사무친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렇게 키워나가는 겁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예를 드는 게 가장 실제적일 것 같아요. 여러분 테레비 중계 보면 유명한 골퍼들이 그 퍼팅에서 전부 진지하게 하고 그걸 잘해야 되는데, 힘으로 꽝 치는 게 아니라 짧은 거리 퍼팅을 하는데, 그 타이거 우즈가 그 말을 하더라구요. 유명한 선수, 언제 만났냐고요? 그거는 알 필요 없어요.

짧은 걸 하는데, 평생 한 모든 퍼팅이 한 번 지나간대요. 머릿속에 그때 빠뜨린 거, 잡아당긴 거, 민 거, 짧은 거, 지나간 거, 그 생각이 막 지나가는 속에서, 그 생각 없이는 절대 못 해. 그 생각 속에서 마음을 움켜 미는 거래요. 지구를 들어 올리듯이. 하나 들으세요.

그걸 넣는 사람과 못 넣는 사람이 있을 뿐이야. 어떻게 넣냐고요? 이겨서 넣는 게 아니라 할 수 없잖아요. 그럼 하지 말란 말이야? 해봐야 될 거 아니야? 들어가면 원래 잘하는 사람이라고 우기고, 그거 못 놓으면 죽인다는 아닌 인생에 들어왔지.

너 실패하면 죽인다가 아닌, 네 실패와 니 못난 것으로 끝나는 인생으론 놔두지 않겠다. 이길 때까지 내가 너를 놓지 않는다. 이것이 로마서 8장 얘기죠. 에페소서 1장에 이 일을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 사도 바오로는 서두에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빵빠레로 표현을 합니다.

(에페1,3-6)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약하면 이겁니다. 창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목적하셨다. 이 일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게 뭐죠? 이것이 의도나 그냥 하나의 환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가 인간을 입고 오셔서 시간과 공간 속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갔다가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은, 예수의 죽으심으로 인한 결과, 선물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내용으로 하고 그 임재가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로마서 8장은 육신에 속한 자들과 영에 속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가 누구인가? 어떻게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우리의 인생과 운명을 바꾸셨는가? 그래 지금,

그때,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해서, 지금은,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고 창조 이전에 목적하셨다. 세상 짓기 전에, 우리 만들기 전에, 그러니 늠름하게 살아야죠. 겁내지 말고 넉넉하세요.

카라스키아한테 홍수환이 한 대 맞고 뻗었죠. 일어났죠. 또 얻어맞아서 네 번이나 넘어졌잖아요. 그래서요? ‘사전오기가 됐지. 다섯 번 넘어졌으면 여섯 번째 이겨서 오전 육기가 됐겠죠. 우린 이길 때까지예요. 이기지 않으면 끝이 안나요.

우리 것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영광의 찬양이 되게 할 거예요. 현재예요. 지금 예수님은 벌써 일 다 끝내셨어요. 성령께서 그 결과와 그 선물로 약속으로 현실로 우리에게 와 계세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엄연한 역사와 현실과 미래의 완성을 알게 하셨으니 우리의 인생을 이제 믿음으로 담대히 걸어가게 하여 주소서. 겁먹지 말고 핑계 대지 말고 고함지르지 말고, 누구에게 갔다가 집어던지지 말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며 그 영광과 그 자랑을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복된 인생들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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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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