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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25) 하느님의 뜻 (선택) (로마9,1-13)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14 조회수142 추천수1 반대(0) 신고

고린도후서 4

 

2024. 1. 14. (일요일)

 

로마서25) 하느님의 뜻 (선택)

 

(로마9,1-13)

1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움직이는 내 양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 줍니다. 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는 번민하고 있습니다. 3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4 나의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5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영원토록 찬양합시다. 아멘.

6 나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패로 돌아 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며 7 아브라함의 후예라 하여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사악의 혈통을 이은 자만이 네 자녀라 불리리라' 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8 이 말씀은 육정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하느님이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9 그 약속이라는 것은 '내년 이 즈음에 내가 올 터인데 그 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이제 로마서 9장에 오면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되는데, 그리스도교 신앙 혹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 질문과 이 도전으로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앞에 있었던 838절과 39절과 이어서 이해를 해야 되는데--

(로마8,38-39)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는 말씀입니다.

 

잘 아시겠죠. 그러나 이렇게 한번 현실적인 문제와 연결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 안에서 무한대 라면, 불가능할 것이 없다면, 이스라엘의 반역은 뭐냐? 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한 것은 뭐냐?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들은 실제로 거부했고 아직까지 이스라엘은 거부하고 있는데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 없다면 저들이 용서가 되느냐? 된다는 얘기겠죠. 그럼 저들이 한 거부는 아무래도 괜찮은 거냐? 이렇게 질문은 생각보다 깊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어떠한 실패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꺾을 수 없다. 그건 대단히 귀한 그리스도교 복음이지만, 동시에 그렇다면 잘한 것과 못한 것이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이냐? 라는 것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 아니겠습니까?

잘못한 건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해결되느냐? 어디까지 괜찮으냐? 이런 문제들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데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막연하게 지나오지 않았을까요? 본문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의 뿌리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느님의 선민된 하느님의 부르심은 오늘날 예수가 오시고, 예수로 말미암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뿌리였다.

이방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뿌리로 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었다. 그러니 그 뿌리 위에 우리를 세웠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면, 그 뿌리들도 하느님이 보존하실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확장하면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결국 하느님이 다 해결하실 것이다. 그렇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됩니다. 그 말이 갖는 의미를 정말 두려움과 하느님의 일하심의 거룩하심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값싼 은혜가 되던가, 율법주의가 되든가 둘 중에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에서 복음이 우리가 잘 아는 321절에 나타난 것 같이, ‘그러나가 있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관계 없다는 것은 조건과 자격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율법, 원인과 결과의 법칙, 인과율, 그것을 벗어나는 하느님의 은혜, 예수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그 앞에 장들이 뭐였죠?

118절에서 320절에 이르도록 인간이 저지른 선택, 하느님 외면, 거부, 불신앙, 자기 마음대로 살기가 초래한 필멸의 운명, 하느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류,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해결해 버리셨습니다. 없었던 걸로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잘못된 역사를 예수 안에서 해결하셨다. 그 해결은 믿음으로 되었기 때문에 자격이 있는 자나 조건이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는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이럴 때 믿는다는 말은 행위와 대조되어 '모든 자에게 가능한'이라는 뜻이 되죠.

그것이 얼마나 큰지, 우리 로마서 8장에서 보았듯이 어떤 것으로도 이 예수 안에 있는 구원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다. 그것은 열어놓은 문에 불과하지 않고 하느님의 적극적인 의지요, 행사다. 그게 로마서 8장입니다.

그러자 이제,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저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저들의 거부, 저들의 선택은 무엇이 되는 것이냐? 그것을 용서한다면 어떤 식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라는 질문이 각 개인에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완전하게 이루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소한 문제라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큰 경우도 더러 생기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본 본문과 같이 이스라엘을 논하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만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생물학적, 인종적, 국가적 구별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는 것으로 구별된다, 해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구별하는데 찾아가 봅시다. 창세기 28장입니다.

(창세28,10-15) 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11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 간 뒤였다. 그는 그 곳에서 돌을 하나 주워 베게 삼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13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14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 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놀라운 약속이죠.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의 자녀에게 준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들에게 주는 복된 약속, 그 약속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 하면 야곱아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내 아비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야곱은 갑자기 어디서 붙잡혀 덜렁 끌려 나오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깨우침과 회개와 결심을 하면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이 벌써 전에 준비하셔서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지나 야곱이 오도록 준비하여 존재하게 하는 하느님, 또는 그렇게 존재하게 된 야곱,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성도 없고, 앞뒤 스토리도 없이 이해, 결단, 이런 추상명사들에 이끌려 믿음, 결단, 윤리, 행위 같은 것들을 자꾸 잘라내는데, 하느님은 계속 창조 이후 인간의 선택과 다르게 하느님의 하느님 되시는 창조를 보존하시며, 회복하시며, 완성하시어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계속 일하고 있다고 설명해오는 것이 성경입니다. 인간의 잘잘못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구별되는 온천하와 역사와 인류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성실하게 하느님 일을 하고 계시다. 너는 덜컹 세워졌지 않고, 그런 걸 덜컹이라 그러나요? 너는 느닷없이 세워진 존재가 아니라, 긴 시간 여러 준비, 내다보고 그러나 신적 이해와 능력과 비전 속에서 준비되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뭐라 그래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이끌며 너를 인도하여 약속된 이 장소에 돌아오도록 너를 떠나지 않겠다.’ 이게 야곱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들어가는 이름들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렇게 들어가는 이름들, 그 이름들을 이스라엘이라 그런다는 거죠.

약속의 자녀, 약속을 받은 자녀, 그때 약속은 뭘까요?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의, 신실한 성의를 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렇게 쓰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가 오해했듯이 이스라엘과 이방, 이렇게 나누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이렇게 나누라고 준 선민이 아니고, 다윗과 사울에서 보여지는 것 같이 하느님이 개입하는 인생과 존재와 운명, 하느님 없는 인생과 존재의 운명을 대비하는 것이죠.

야곱은 부르고, 에사우는 버렸다. 그것은 대조하기 위해서 나온 표현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사우는 미워했다는 대조하려 그러는 것입니다. 선택을 하면 선택을 입은 자가 있고 버려진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을 버린 자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과 우리의 인생의 운명의 끝이 무엇인가와 하느님이 함께하시고 복 주시는 자의 인생의 끝이 무엇인가를 대조하기 위하여 하느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단코 운명을 가르는 대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거부로 이방인이 구원을 받거든요.

이스라엘이 잘해서 무슨 서자(庶子)나 무슨 입양(入養)같이 불려오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마저도 하느님을 거부한 그의 많은 인도와 개입과 경험과 특권들을 누리고도 거부한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방을 불러내는 하느님의 은혜를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라고 바오로가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대조는 결단코 야곱과 에사우는 뭐가 다르냐? 사울과 다윗이 다른 것과 같다. 그렇게 얘기해야 됩니다.

다윗의 승리는 어디서 오느냐? 그가 하느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건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하느님이 편든 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편을 들면 어느 자리, 어느 형편에서도 역전이 있고 명예가 있고 승리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고, 하느님이 없으면 어떤 자랑과 어떤 능력을 가지고도 끝이 좋을 수가 없다를 얘기하는 것이 사울이었습니다.

이방(異邦)의 어려움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었죠. 이스라엘의 특권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었죠. 저들이 가진 특권이 저들에게 유익이 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진 무지가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 않은 것이 현실 아닙니까? 신약시대죠. 이스라엘이 스스로 오해했던 것처럼 신약시대 내내 교회가 오해를 하여 유대인들을 경멸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지위와 정체성을 확보하곤 했습니다. 비겁한 짓입니다.

성경이 에사우를 욕하기 위해서 바쁠 필요 없고, 하느님 모르는 이방을 저주하는데 성경이 동원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로 말미암은 온 인류의 구원, 예수로 말미암은 모든 무지한 자들과 죄인들의 구원, 그게 복음이지요. 우리 로마서 5장에서 했죠.

(로마5,8)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미 구원은 완료되었습니다. 십자가는 2천년 전의 역사 속에 세워졌습니다. 우린 그 후에 태어났고 그 후에 믿었으며 우리가 어떻게 살지 아직 잘 모릅니다.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킬지 아니 지킬지 모르지만 그런 우리에게 성경이 하는 얘깁니다. 완료되어 있단다.

적용만 남았단다. 네가 위대하게 살고 믿음을 갖고 승리하는 일에 조건으로 남은 것은 없단다. 그래서 우리가 힘을 얻는 것이죠. 시간상 역순이라 그러지 않았나요? 결과는 이미 있고 그 결과까지 살아보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같은 얘기를 하는 거죠.

야곱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시며 그 아비 이사악의 하느님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만든 야곱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이사악에게 그랬듯이, 야곱에게서 하느님이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가면 한 걸음 더 나가지요. 모세를 만나시는 하느님입니다.

(출애3,4-8) 4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 말씀하십시오.' 5 하느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것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시고는 6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 7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8 나 이제 내려 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하느님이 직접 내려오시고 직접 데려가실 것입니다. 모세는 이 시점이 얼마나 막막한 시점인지 알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자기 민족의 억울함을 알고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40세 때 그가 자기 민족을 위하여 일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편들지 않아서 실패했죠.

쫓겨나고 도망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원망과 억울함과 분노와 희망과 자책과 눈물과 모든 걸 다 지나서 남은 것 없이 그저 한 목동에 불과한 이 나이에 하느님이 부르십니다. 뭐라고 부르신다고요?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 뒤 이름들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았을 뿐이죠. 네가 존재하고 네가 당한 인생을 다 내가 지켜보았고 만들었고 내가 쓰는 인생이니라. 모세는 두려워합니다. 승복하지 않습니다. 그 모세를 하느님이 다그쳐 보내시죠.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의지와 하느님의 개입을 보십니까? 하느님의 개입, 그것이 오늘 우리가 로마서 9장에서 보는 약속과 선택입니다.

하느님의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직접 행사하시는 그의 행위가 있습니다. 역사 속에, 모든 존재 속에, 우리 모두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느님의 일하심이죠. 그래서 이 모세가 여기에 등장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 하나 빠져 있죠. 요셉입니다. 시편 105편으로 가보십시다.

 

(시편105,16-19) 16 그는 또 그 땅에 기근을 불러 들이시고 그들의 식량 지팡이를 부러뜨리셨다. 17 그러나 사람 하나를 먼저 보내셨으니 곧,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다. 18 요셉은 거기에서 발에 차꼬를 차고 목에는 쇠칼을 쓰고 고생을 하였으나 19 마침내 해몽한 것이 들어 맞아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신분이 밝혀지자 20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의 사슬을 풀어 주었으니 여러 족속을 다스리는 자가 요셉을 놓아 주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형들의 미움을 사서 팔렸죠. 애굽에 가서 시위대장 집에서 일하다가 무고를 당하여 감옥에 갔죠. 그리고 풀려나 총리가 되고 온 세상에 든 기근 때에 애굽과 다른 나라 백성까지 다 살리고 그 속에 자기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는 늘 쉽게, 너무 쉽게 이해가 돼서 그 깊이를 놓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는 바람에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게 앞뒤가 맞는 얘깁니까? 배신을 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요셉은 억울함을 당하고 고난을 겪어 영광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쉽게 붙이지 말고, 그가 얻은 영광이 그 팔림과 무고라는 과정으로 거기까지 도달을 하게 됩니다.

훨씬 적극적인 것이 그 과정에 있어야 맞는 것이 우리의 이해입니다. 남 놀 때 놀지 않고 공부했다. 남 잘 때 자지 않고 일했다. 이래야 맞는 것이 우리가 아는 어떤 결과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이냐? 바오로는 하느님 손에 달려 있는데 그 하느님이 예수를 보내셨다. 구원 못 받을 자는 없다. 해결 못할 일은 없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것은 없다.

그것은 다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전이 됐다. 오히려 잘 됐다. 그렇게, 무슨 동화책 같이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못한 일에 뛰어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거부, 무지, 반역에 들어오시죠. 직접 들어오셔서 그걸 고치십니다. 오셔서, 그게 성육신입니다.

예수의 오심, 하늘에서 나팔 한 번 불고 죄를 다 용서한다. 그렇게 끝낸 게 아니고, 성자 하느님이 육신이 되어 인생에 뛰어 들어오시어 죄가 권세를 잡고 있는 이 땅에서 살아나가십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들의 거부와 오해와 멸시와 박해와 수모를 견디고 살아,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잘못 간 길에 들어와 실제로 우리를 붙잡아 그 길을 회복하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것 다 고치고 받고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자기가 저지른 일은 자기가 해결할 수밖에 없다 쯤은 아시죠?

우아한 세상(세계)’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송강호 씨 나오는 조폭 영화, 그것도 안 봤단 말이죠? 조폭, 두세 번째 두목쯤 되어서, 아래 위로 잘 조화시키고 어렵게, 어렵게 삽니다. 조폭이면 막 힘만 쓰는 게 아니라 먹고 살자고 한다는 영화입니다.

부인하고 딸은 자기 남편, 자기 아버지 보기를 사람 같지 않게 봅니다. 있는 대로 반항하고 개무시를 하는데 어떡할 겁니까? 마누라하고 딸인데, 무슨 힘으로 해결할 겁니까? 그래서 여기서는 애 교육 제대로 못 시키겠다. 그래서 아내가 딸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죠.

그래서 어느 날 보내온 동영상 보고 딸하고 엄마하고 막 웃고 노는 거 보고, 라면 끓여 먹다가 밥상 차 버리는 게 끝입니다. 밥상 차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주워 담는 것이 끝입니다. 그 영화의 압권이죠. 누가 담을 거예요.

하느님께서 오셔서 그걸 하고 계시는 거죠. 우리가 찬 밥상 다 치우고 줍고, 우리 인생에 뛰어들어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일에 우리 한 것 꿰매고 바꾸고 씻기고 시름하고, 요셉입니다.

형들이 팔아먹는 자리에 따라 들어가 팔려가는 요셉을 쫓아가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요셉을 따라 들어가 붙잡고 그를 붙들어, 하필 또 그때 그 땅에 기근까지 들어서 그 감옥에 가요. 먹을 것도 하나 제대로 안 주겠죠. 그 모든 것을 지지 않고 이겨 기어코 이걸 만들어 냈다.

그 하느님을 보라. 그게 오늘 얘기죠. 저들이 이스라엘이 배신과 거부로 갔으나 하느님은 그걸 붙들어 싸워 너희를 만들어냈다. 그럴 수 있는 하느님이, 그들인들 너희보다 더 나쁜 조건이겠냐? 그가 뭔들 못하시겠냐? 너희 두려움을 갖고, 두려움을 갖고, 신앙생활해라. 그게 공포일까요? 아니죠. 로마서 6장이 이미 한 번 지적했던 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중요한 결론이 되겠죠.

 

(로마6,1-2) 1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은총을 논하자, 무슨 얘기가 나왔죠? 모든 게 공짜라면 뭐 때문에 열심과 책임이 필요한가? 그게 나와요. 그래 못 난 거죠. “난 당신을 사랑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랬더니, 상대방이 그럼 죽어봐.” 그럼 나쁜 놈이죠. 그렇게 말하면 나쁜 놈입니다. 우린 꼭 그 질문을 하고 그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이 뭐든지 하실 수 있다면 내가 왜 열심히 살아?’ ‘너 나쁜 놈이야.’ 아시겠어요. 그게 얼마나 명예로운 말인지, 그게 얼마나 진정한, 얼마나 무거운 이야기인지, 감사한 이야기인지 알아야죠. 우리 실수해요. 잘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힘을 다해서 잘 살려고 애를 써야 되고, 실수하면 가서 회개하고 하느님 참으로 잘못했습니다.” 그래야 돼요.

뭐 예수 믿는데 뭐가 어때”, ‘그렇게 말하면 죽여버릴 거예요.’ 이 말씀이 우리가 지금의 어떤 형편에서든지 힘이 되며, 인생을 사는 고마움과 감사와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못하실 것이 없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인생 속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시간을 다하고 노력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붙드심과 함께 우리의 인생을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법을 배우며 영광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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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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