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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30)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뽑힌 자 (로마11,1-12)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19 조회수181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도 바울

 

 

2024. 1. 19. (금요일)

 

로마서30)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뽑힌 자

 

(로마11,1-12)

1 나는 또 묻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2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고발하면서 한 말을 여러분은 성서에서 읽어 보지 못했습니까? 3 그가 '주님, 그들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의 제단을 모조리 헐어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저 하나뿐인데도 제 목숨마저 노리고 있습니다.' 고 하자 4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나에게는 아직도 바알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칠천 명이나 있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5 이와 같이 지금도 은총으로 뽑힌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6 그 사람들은 자기 공로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뽑힌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무슨 공로가 있어서 뽑힌 것이라면 그의 은총은 은총이 아닐 것입니다. 7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찾던 것을 얻지 못했는데 뽑힌 사람들은 그것을 얻었습니다. 뽑히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해져서, 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혼미한 정신을 주셔서 오늘날까지 그들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귀를 가지고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하신 성서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9 그래서 다윗도, '그들이 벌여 놓은 잔치 자리가 오히려 올가미와 덫이 되어 그들이 걸려 넘어져 패망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0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등은 굽어진 채로 펴 볼 날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 11 그러면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오히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12 이렇게 이스라엘의 범죄가 세상에 풍성한 축복을 가져 왔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가져 왔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을 받는 날에는 그 축복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로마서 9, 10장과 11장에 걸친 중요한 바오로의 주제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은 예수를 믿기를 거부해서 망했는가 하는 것이죠. 거기에는 중요한 우리의 신앙적인 이해와 중요한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하느님이 시작하시고 약속하시고 함께하셨는데도 결국 신앙에 실패하면 끝인가 하는 것이죠. 그리스도교 신앙의 운명은 누가 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이 기회를 주셨고 먼저 찾아오신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결정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는 것인가 하는 거죠.

(로마11,1) 1 나는 또 묻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렇게 됐죠. 그렇지 않다. 그럼 이스라엘이 회복되는가? 구원을 받는가? 그렇다고 합니다. 우리한텐 어렵죠. 그리 되면 당장 찾아오는 생각이 책임 있을 필요, 긴장, 이런 내용들이 쑥 도망을 가버리죠. 우선 성경이 하는 바오로가 하는 답부터 들어봅시다.

로마서 1129절에, 하느님께서 한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잘 보듯이, 오늘 본문에 속한 6절에도, 그 사람들은 자기 공로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뽑힌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그들의 운명을 정한다면 은총이라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 그렇죠. 은총은 분명히 자기가 하지 못한 걸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실패할 리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다 구원하실 거면 그들이 반역하고 실패하고 못난 짓 하지 않게 사전에 막으시지, 그때 개입하시지, 실컷 못난 짓하게 놓아두고 나중에 다시 붙들어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지죠.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사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이해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의 다음이 옵니다.

 

(로마11,11-12) 11 그러면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오히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12 이렇게 이스라엘의 범죄가 세상에 풍성한 축복을 가져 왔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가져 왔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을 받는 날에는 그 축복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이렇게 답이 흘러나옵니다. 우리로서는 만만치 않은 성경의 답이죠. 그들이 잘못한 것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었다. 그때 우리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이방이 유익을 얻었다. 잘못한 것으로 좋은 걸 이루었다구요? 오해하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의 완악함과 우리의 실패도 하느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은혜와 능력에 종속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하느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답니다. 이 부분을 우리는 사실 좀 많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애매한 책임을 무너뜨리는 것 같고, 그리고 은혜를 얘기함으로써 우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 부분을 성경을 따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설명은 9장에 파라오에 관한 이야깁니다.

(로마9,14-18) 14 그렇다고 하느님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고 말씀하셨듯이 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17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너를 시켜서 내 힘을 드러내고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궁휼)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완악)하게도 하십니다.

우린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파라오를 완고하게 했답니다. 그럼 파라오의 책임이냐? 이게 우리가 묻고 싶은 거죠. 그럼 파라오에게 책임이 없지 않습니까? 우린 모릅니다. 성경이 하려는 얘기는 이것이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초점은 이리 가야 됩니다.

파라오가 있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풍성해졌답니다. 모세가 가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파라오가 있어서 그 구원이 얼마나 큰지 그 구원을 목적을 하고 있는 이가 어떤 분인지가 너무나 풍성하게 나왔죠. 그 그림을 파라오가 없으면 그릴 수가 없습니다.

벤허, 멧살라는 없고 벤허 혼자 나왔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벤허가 혼자 다락방에서 고민하다 말다, 기도하다 말다, 물 먹고 들어갔다. 그게 다면 그 풍성함을, 그 크기와 깊이를,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능력과 신비와 허락하는 은혜와 기다려주심과 무엇을 이루시고 반전하시고 쌓고 누적하고 터뜨리고 하는 것들은 하나도 없죠.

그건 다만 어떤 장치거나 치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체적인 진심이죠.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와 일하시는 하느님의 땀이요, 하느님의 손길이요, 열심 내는 그 깊은 얼굴이십니다.

우리는 파라오 보고만 얘기하죠. 너는 왜 그따위 일을 하냐? 우린 그렇게 얘기할 필요 없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어떻게 된 거죠? 이스라엘은 예수를 반대하는 바람에 그 구원이 이방에 넘어옴으로써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든가 누구의 어떤 협조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문을 열지요.

이스라엘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그래서 더욱더 크게, 이방을 이스라엘의 실패 속에서 담아내시니까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받았어야 되는데 교회사 내내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인들을 괄세하는 것으로, 저들을 단죄하는 것으로 이 은혜와 신비를 외면하곤 했습니다. 로마서 5장으로 가죠.

(로마5,8-10)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했다면 그의 부활, 살아 계시면 얼마나 더 큰 걸 하겠느냐? 이런 얘기입니다.

우리 쪽에서 얘기를 해볼까요? 우리는 예수를 죽였습니다. 죽인 것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를 믿는다면 죽인 짓으로도 이 은혜를 얻었다면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겁니까? 이 부분이 늘 감추어지죠.

우린 회개를 합니다. 회개에서 돌아왔으면 가던 길을 멈춘 것이 아니라, 돌아와서 우리가 몰랐던 길을 가야지요. 회개는 가던 길을 멈춘 데서 고함 지르고 주저앉아 있을 자리가 아니고 돌아서 가야죠. 회개를 했으면 잘못에서 돌아서 순종하는 인생의 명예와 영광을 누려야죠.

이 여기 서서 회개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심사하는 데 그쳐서, 우리는 파라오를 욕하고 이스라엘을 욕하고 자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로 한 것. 믿음을 가지기로 한 곳에서 서서 돌아선 자리, 화목한 자리, 믿음을 가진 자리를 걸어 나가지 않으면, 와서 그 끝이 없는 회개만 하게 됩니다. 뭘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답이 안 나와서 그 다음에는 손가락질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느님, 쟤 보래요. 쟤 보래요." 그게 아닙니다.

오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에 부요함이 됐다면 그들을 받아들이는 용서까지의 은혜의 크기가 적용될 때는 도대체 인류에게 어떤 영광이 주어질 것인가 기대해보라.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 우리는 이 문제가 사도 바오로에게 얼마나 현실적인 문제였는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즉 이 이야기들은 논리적 이해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바오로에게 이 결론을 이해 시키죠. 예수님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오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거죠. 우리 로마서 하면서 계속 그 얘기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2천년 전에 죽으셨습니다.

될지 안될지 모르는 자를 위하여는 죽을 수 없습니다. 죽을까 말까 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죽으셨습니다. 과거의 완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완료된 운명을 우리에게 적용하고 계셔서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믿고 회개하고 순종하고 의심하고 실패하고 돌아서는 모든 일들을 어디까지 할 겁니까?

예수의 죽으심의 역사적 완료의 자리에 갈 것입니다. 거기가 믿음이 서는 자리인데, 그 믿음을 성경식으로는 이스라엘은 이렇게 오해했다고 합니다.

(로마10,1-3) 1 형제 여러분, 나는 내 동족이 구원받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며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2 나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열성만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바른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3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온 방식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의()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순종이고 결정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온 방식은 예수입니다. 죄인을 자기 자녀 만들기에 십자가에 매단 것, 그게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방식. 그러나 우리는 끝도 없이 이해하고 결심하고 순종한 것이 믿음이라고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끼리 패를 갈라버렸죠.

하느님이 죄인을 찾아오신다는 사실이, 그 모든 것을 덮고 있다는 걸 모릅니다. 죄인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모든 인류, 모든 역사, 모든 운명이 그의 은혜에 덮여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만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 라고 이렇게 이분법으로 쉽게 나누지 마십시오. 아직 모릅니다.

역사적 사실이 그걸 증언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게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뭐라고 외쳤다고요? 우리 잘 아는 대로 그는 호렙산까지 도망와서 하느님 앞에 대답을 합니다. "하느님, 다 죽고, 나 하나 남았습니다. 나도 죽이려고 해서 도망왔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내가 칠천 명이나 남겨뒀다."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망했는가 아니다. 바오로가 뭐라 그래요? 나도 남아있다.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다. 베냐민 지파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안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뭐라고요? ‘하느님이 자기 백성으로 부르는 그의 은혜와 그의 택하심은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우선한다그거죠.

그러니 아까 본 바와 같이 파라오가 일어나서 뭘 했죠?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저들의 자유를 막아섰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행하는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에 오히려 풍성한 기여를 한 것처럼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것, 하느님이 그렇게 쓰신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것으로 뭘 했죠? 파라오가 자기 후손들을 구합니다. 이게 또 무슨 말일까요?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으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2장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기록에 이런, 기억해야 할 말씀이에요.

 

(루가2,25-32) 25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 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 갔더니 마침 예수의 보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 이스라엘의 영광이랍니다. 이어가죠.

(루가2,33-35) 33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예수는 반대(비방)의 표적이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광이고 이방의 빛인데, 그는 반대의 표적이 될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오로가 선언한 복음에 관한, 십자가에 관한 비밀은 이것이었습니다.

 

(1코린1,18.22-24) 18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22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이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24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건 무슨 맞는 길과 틀리는 것으로 같은 차원, 수평적 차원에서의 이 길, 저 길이 아니고, 그걸 덮고 있는 위의 길입니다. 십자가(十字架)의 길()이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이 모두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예수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극렬한 반대와 저주 속에 죽어가는 것에 이스라엘의 영광이 있답니다. 어떤 영광? 그것을 끌어안는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 그 죽음을 부활로 끌고 가는 죽음이기에 이스라엘의 존재는 그들이 가졌던 모든 조건들로 인하여 다른 이방들보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성과 능력을 더 크게 보일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파라오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애굽의 왕이요, 세상의 권력자였기 때문에 더 크게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반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고, 그 덕에 그러면 안 되지만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은 그 위에 차고 넘쳐서 하느님이 누구신가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바오로가 그 역할을 합니다. 바오로는 누구죠? 스테파노를 죽인 사람이죠. 그리고 사도로 부름을 받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이스라엘이 잘못했으니 망해야 된다라는 논리를 적용하면 바오로는 없는 거죠.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 삶에서 하느님이 무얼 하시는가. 우리가 자책하는 것들, 우리가 분노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무얼 만드는가 보십시오. 은혜를 만들어야 됩니다. 잘했을 때보다 못했을 때 은혜가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안에 파라오가 있고, 우리 안에 이스라엘이 있고, 우리 안에 사울이 있습니다.

그게 변하여 바오로가 되고, 순종하여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부활을 가져왔으면, 그 부활은 얼마나 더 큰 것을 가져오겠는가 라는 그 감격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을 견딜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갖는 힘을 알 수 있습니다. “괜찮아를 할 수 있게 되지요.

넘어졌습니까? 일어나시오. 넘어진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실력이 되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스라엘의 완고함, 그들의 못난 것을 얘기할 때는 기껏 이 결론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못난 짓 안 하게 묶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을 내버려 두어서 자유를 누리게 하고 스스로 범죄하여 죄를 범한 것이 얼마나 손해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 인류와 역사에 필요했다. 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려는 것은 그렇게 쉽게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폴 악트마이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로마서 주석을 썼는데, 이 부분에서 아주 기가 막힌 조언을 합니다.

<로마서, 이 책은 로마서를 읽는 독자들이 바오로와 "함께" 생각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동안 널리 행해졌던 어떤 하나의 주제 아래, "하느님의 의()" 같은 주제에 전체적인 로마서의 내용을 꿰어 맞추는 식의 주석이 아니라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전개하고 있는 사상을 솔직하게 그와 같이 호흡하며 파악할 수 있도록 독자들이 도와주는 것이 이 주석의 목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의 범주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 민망함은 인류가 역사에서 배워야 되는 하나의 통찰이고 하나의 경험일 것이다. 그건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이해다.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의 자리에 나와라. 방황하는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목적을 가진 하느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경탄, 억제할 수 없는 찬송의 자리로 와라.> 폴 악트마이어, 로마서 주석 중에서~

그것이 우리 지금 보고 있는 로마서 11장의 결론입니다.

 

(로마11,33-36) 33 !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4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35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36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 이게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 안에서 이루신 그의 죽으심과 부활함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토록 묶어준 운명입니다. 우리 삶에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회개에 붙잡혀 있지 마시오. 더 나오시오.

우리가 그를 죽이고 거부한 것에도 불구하고 주신 은혜가 우리의 순종과 간절함 속에서는 얼마나 크게 경험되는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 우리 생애에 동행하는가! 그 길을 걷는 우리 되어서 밖에서 나를 보고 놀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서 놀라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나 큰, 예수의 생애가 그렇듯, 그러했던 것처럼 위대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나가는 기쁨과 자랑과 감사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이 그 아들을 주셨고 용서하셨고 우리의 못난 것과 무지와 거부를 돌이켜 그 위에 하느님이 화해와 복을 쌓으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를 찾으러 오신 하느님이 은혜와 능력으로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 모든 일을 약속하셨고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우리 인생을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스스로의 인생을 믿음으로 자랑하는 그 신실한 현실을 살아내게 하사 다른 데서 답을 구하지 말고, 자신과 자신의 생애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확인하는 감사와 감격과 능력이 넘쳐나는 우리 믿음의 식구들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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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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