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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32) 진리(眞理)란 (로마11,25-36)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21 조회수140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화모음

 

2024. 1. 21. (일요일)

 

로마서32) 진리(眞理)

 

(로마11,25-36)

2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모든 것을 다 알았다고 장담할지 모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하는 숨은 진리가 하나 있는데 여러분도 그것을 꼭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그 진리란 이런 것입니다.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은 완고하지만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 오는 날에는 그 완고한 마음을 버릴 것이고 26 따라서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시온에서 해방자가 나와 야곱의 후손으로부터 사악을 제거하리라. 27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할 때 그들과 맺으려는 나의 계약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8 복음의 견지에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하느님의 선택의 견지에서 보면 그들의 조상 덕택으로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입니다. 29 하느님께서 한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30 전에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31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32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33 !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4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35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36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우리는 로마서 9장부터 11장에 이르도록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다루는 문제는 복음에서 그리스도교 구원에 관한 복음 내용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말이 그 범위가 어디까지냐 에서 이스라엘이 중요한 시험 혹은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왔고 약속대로 오셨고 그들을 구원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거절하여 국가적으로 보자면 아직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맞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 덕분에, 그 덕분에라는 거는 연결고리가 될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아서 이방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부분은 교회사 내내 오해되죠. “그들은 안 믿었고, 우리는 믿었다.”가 됐고 그들이 안 믿는 바람에 우리에게까지 오지 않을 복음이 온 것처럼 됩니다.

전혀 그런 설명이 성경에는 없고 우리 이방의 구원은 무지했고, 약속 바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됐다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거부가 쓰여지고 있지, 이스라엘이 순종했으면 이스라엘이 받을 것을, 이스라엘이 거부해서 이방이 받았다 라고는 쓰고 있지 않는데, 2,000년 역사 내내 교회는 그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오로가 당시에 질문을 당연히 받았겠죠. 또 스스로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느님은 오래전에 이스라엘을 선민(選民)으로 택하고 그의 종들을 보내고 약속하고 예수까지 오셨는데 그 복음이 이스라엘에게 거부당해서, 그럼 이제 이스라엘은 끝난 것인가?

자기 자신을 가르쳤습니다. 나도 이스라엘 백성이다. 나도 베냐민 지파다. 내가 사도가 되었은즉 어찌 이스라엘이 완전히 끝났겠느냐? 그들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 이방을 구한 구원은 아무 조건도 없는 곳에서 허락된 것이므로 이스라엘의 거부가 하느님의 은혜를 막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이스라엘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래도 거부했으니까. 우리 잘못하면 우리 현실 속에서 우리 정서에 이런 거 있죠. ‘몰랐어는 좀 봐주죠. 모르는 것과 알고 그런 건 얘기가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는 얘기는 모르는 게 죄()입니다. 거부한 건 알았는데도 거부했으니까, 더 큰 의지가 포함된 죄라고 생각하지만, 모르면 그것도 죄입니다.

이방(異邦)은 몰랐습니다. 약속 밖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얘기하자면, 관심 밖에 있었는데도 구원을 얻었다면,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고 하느님이 우리에 대하여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관심을 가졌던 이스라엘은 그들이 거부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인가? 그 얘기죠. 그래서 이제 길게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이방인들아 너희가 얻은 구원이 이스라엘이 배반해서 얻어진 것이라 라는 이유로 너희는 보다 나은 조건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은혜 위에 선 것이다. 너희가 완전히 은혜 위에 선 것 같이 이스라엘의 거부가 하느님의 은혜를 방해할 수 없단다. 그래서 31절에 보는 바와 같이,

 

(로마11,31-32) 31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를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32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풀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시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그랬답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읽으면 이렇게 들립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순종하지 못하도록 어떤 굴레에 가둬놓아 자비를 베풀어 자랑하려고 하셨다." 그렇게 들립니다.

저의 국어 수준하고 여러분 국어 수준하고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글을 쓰면 딱 그렇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욥기 38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38,8-11) 8 바다가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그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9 바다를 구름으로 싸고 먹구름으로 묶어 둔 것은 바로 나였다. 10 바다가 넘지 못하도록 금 그어 놓고 문에 빗장을 내려 놓은 것은 바로 나였다. 11 그리고 나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 오지 말아라. 너의 도도한 물결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바다가 그 못에서 터져 나올 때 문으로 그것을 가두었다. 이 표현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뒀다. 바다를 그 문으로 막았다. 막았다는 넘어가고 터지려는 것을 이렇게 가로 막았다 라는 뜻보다 큽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그때 내가 구름으로 싸고 먹구름(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었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우리 바다에 가면 바다가 계속 넘실되죠. 이게 넘어올 것 같은 겁니다. 우렁우렁하고 해변을 끊임없이 공격하는데 거기가 끝입니다. 그걸 이렇게 힘으로 막고 있다 라는 개념이 아니라, 그래서는 바다를 감싸놨느니라.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지어 감싸 안았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감싸 안았느니라." 그게 그거 아닌가요? 우리의 불순종은 대등한 차원에서 순종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이리 와.” “싫어.” “이렇게 해” “싫어이게 불순종이죠.

이리 와” “싫어하면 이리 못 오는 겁니다. “저리 가” “싫어그러면 저리 못 가는 거죠. “나랑 함께 가” “싫어그러면 함께 못 가는 거죠.

이 바다를 막음으로 순종치 않음을 가둠으로 순종치 않는 것이 외면하고 거절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감싸는 그 위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이, 바다가 넘쳐 지구를 넘어갈 수 없듯이, 인간의 불순종이라는 것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선택이라는 것은, 그 선택이 창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선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고, 할래 말래, 좋아 싫어이지, 창조같이 무엇을 만들어내는 실력이 아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을 너희가 내 말에 순종을 할래 안 할래는 존재론적 권위와 창조세계 속에서는 대등한 충돌을 할 수 없는 차원의 차이가 있단다.

내가 너희 모두를 불순종 가운데 안고 있는 자란다. 난 그 위의 존재란다. 너희가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가 내 창조와 의지와 결국을 막을 차원에 있는 문제는 아니란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럼 우린 약간 분()할까요? ? 선택이란 우리의 자유거든요. 인간에게 준 자유. 그건 우리의 인간 된 고유한 권리며 무한한 선택 아닙니까?

그러니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무얼 선택할 수 있습니까? 실존주의자들이 기만한 것이죠. 허무와 자폭을 선택이라는 걸로 기만했지요. 선택을 하고 있으면 마치 가치가 있고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것 중에서 할 수 밖에 없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 안 사는 거죠.

그게 무슨 창조며 의미며 가치에요? 살 것인가 말 것인가가 최고의 선택인데 열심히 살래, 게으르게 살래, 이리 갈래, 저리 갈래, 참을래, 말래 밖에 없는데, 그게 무슨 선택이 전부인 것 같이, 창조 내에 있는 것인데, 그래서 자유란, 선택이란 성경에서는 순종과 연결이 되죠.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가 자유에 속한 문제랍니다. 어느 길을 가느냐? 로마서 6장이죠. 우리 이미 지나오면서 했던 내용이지만, 이 시점에서 돌아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의미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로마6,19-22)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할까 하여 이렇게 인간사에 비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 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 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여러분은 정의에 예속되지 않고 제멋대로 놀아났었습니다. 21 그 때에 여러분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들밖에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활은 결국 죽음을 안겨 줍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게 자유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복음의 중요한 선언은 이 자유입니다. 영광의 길을 살 자유, 죄의 종에서 벗어나 우리의 소원 아래, 우리의 의지와 전 인격을 동원하여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지은 피조물의 궁극적 영광입니다.

우리가 창조세계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에서 그 창조주 하느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됨과 사랑을 선택하는 것, 그래서 신앙은 늘 순종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굴복이 아닙니다. 선택의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숙명이 아니고 기꺼이 자원하는.

이 문제에서 종종 오해되는 성경의 예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입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입니다.

(마태19,16-22) 16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7 예수께서는 '왜 너는 나에게 와서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하고 대답하셨다. 18 그 젊은이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19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계명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하셨다.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 갔다.

 

아주 많이 오해되고 있는 성경 말씀입니다. 부자에 대한 공격도 아니고 가난을 구제하라는 그 권면도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이 예화의 아주 중요한 어떤 배경을 다들 놓칩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잘난 척하려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걸 가졌는데 그 위에 예수님께 확인도 받고 싶은 겁니다. “선생님!, 뭘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고 나온 겁니다. 예수님이 한눈에 알아보셨죠. 그래 너 잘난 척 하고 싶어? 계명지켜. 그거야 다 지켰죠. 그래? 그럼 니 재산 다 팔고 나 따라와. 거기서 덜컥 넘어졌죠. 그게 뭘까요? 순종이란 누구를 따라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순종이란 다만 그것 혼자 열심이라는 말이 그렇듯이 무슨 열심, 무슨 진심, 그런 추상명사들이 혼자 돌아다닐 수 없듯이 순종은 무슨 순종? 예수에 대한 순종,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뜻과 그 목적에 따라가는 것, 나를 내어주는 것, 기쁜 헌신이죠. 그것 없죠. 이 청년은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가장 세상적인 힘을 상징하는 돈에 묶여 있습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복음서 내내 예수께서 싸운 사람은 부자가 아닙니다. 바리새인입니다. 자기 의()거든요. 이 부자도 그것이 자기 의()입니다. 자기의 이것이 전부이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세상적으로 종교적으로 확인만 받으면 되는 거, 덧칠만 하면 되는 거, 그렇게는 안된다지요. ‘니가 근거하고 있는 거 놓고 나를 따라라. 여기가 어렵죠.

하느님은, 예수를 보니, 가난을 구제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 나라를 구할 마음도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을 그런 것들로 어물어물해서 정말 해야 되는 걸 안 하고 있는가 물어봐야 됩니다. 무엇에 매여 사는가 보십시오.

무슨 선택 속에, 무슨 헌신 속에, 아니 무슨 보장으로 우리를 슬쩍 속이고 있는가 보십시오. 그러니까 이 순종이 대상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을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잘 가르쳤었습니다. 이것과 연결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요한15,5-6)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이게 무슨 얘기야? 나무 가지가 나무에 안 붙어 있으면 마르죠. 당연히 그게 순종이에요. 그것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강제하지 않고 시간을 주고 기회를 줘 선택하게 하세요. 근데 대부분 무슨 선택을 했다구요? 대부분이 아니라 인류는 늘 불순종해요.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를 거절해요.

그걸 감싸 안으세요. 예수 안에서 붙들어 매세요. 예수는 강력 접착제인지 모르죠. 그래서 붙들려 조금씩 알게 되어 나무 진액을 받아요. 세상이 주던 것 해가 쪼이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지만 모두 나를 썩히지 밖에 못했던 것들을 그 속에서 처음으로 생명을 알게 돼요. 그게 그리스도교 복음이 하는 얘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가 무엇이었느냐? 자기 의로움을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싸움이냐? 로마서 10장에서 사도 바오로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고해하며 한탄하며 이런 고백을 하죠.

(로마10,1-3) 1 형제 여러분, 나는 내 동족이 구원받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며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2 나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열성만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바른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3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를 죽였다는 거죠. 구원하러 온 구세주를 죽이는 의로움, 이게 세상이 만드는 의()입니다. 생명도 진리도 능력도 거룩도 영광도 없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영광과 승리와 명예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끝이냐? 그렇지 않다고 하는 대목이죠.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시면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실수할 시간을 줍니다. 어리석음을 마음껏 부리는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바다가 그 못에서 터져 나올 때 문으로 그것을 막은 이가 누구냐?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시편 103편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우리의 행한 대로 갚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대로 갚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그게 예수죠. 그게 복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차원에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이 가지는, 그 차원을, 그 무게를, 그 크기를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어야죠. 구원이 예수, 구원이 우리에게 복음 입니까, 공포입니까? 부흥기에는 이 양면이 다 합동하여 그 작용을 합니다.

지옥 불에 영원히 타 죽을 그 죄인들이라는 원색적인 그 설교 제목이, 18세기 19세기 뉴잉글랜드 지방에 일어났던 부흥기의 대표적 설교, 에드워드의 설교였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지옥 불에서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회개합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역사하심이죠. 지금 보면 그 못난 우리의 실패와 어리석음과 무지와 방탕들이 이렇게 하느님의 품에 쌓여 있지, 거기를 넘어 나갈 수 없답니다.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저들의 능력, 선택, 실력, 행사, 무엇으로도 이 감싸 안은 나를 풀 수 있는 것은 없단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믿는 바오로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이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죠. 그래서 우리는 이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문을 활짝 열어야 됩니다.

우리가 성경식으로 이야기해서 요한복음 146절같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것은 문을 좁히는 겁니까? 넓히는 겁니까?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그럼 분명히 문을 좁히는 거죠. 그렇죠. 그럼 예수 외에 필적할 자가 있습니까? 모두를 불순종하는 것을 감싸 안아 이기실 수 있는 분을 넘어선 영역이 없는데,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이라는, 그 외의 영역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로 묶인 가장 폐쇄된 좁은 분명한 이 문이 어떤 문일까요? 필수적인 문이죠.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이 그의 일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하신 목적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 그런 여러 가지 수와 경우 수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목적하신 것, 그것 이외의 것으로 타협하지 않겠답니다.

그게 앞에 나왔던 부자 측면입니다. 너 이 세상에서 내가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겠다. 그게 예수입니다. 우리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가 아니라 그러는 것,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깊이에서 크기에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이유는,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얘기했었습니다.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로마9,19) 19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하느님 마음대로라고 그러신 것이 앞자리에 나옵니다. 바오로가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이 사람아 니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우리 복음주의 내에서 감격과 구원과 뭐 이런 확실한 것들로 인하여 하느님이 너무 낮아졌어요.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말한다고 해서 하느님을 함부로 생각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 어진 뜻이 얼마나 높고 깊고 거룩하고 그리고 무서운지를 알아야 되지않느냐?

여기서 무섭다는 건 공포를 얘기하는 건 아니고, 진지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 모두를 이길 수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나오는 찬탄(讚嘆)이라 그랬죠.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로마11,33) 33 !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왜 안 되죠? 우리 생각보다 높아서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겠느냐? 누가 그의 모사(某事)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아까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데 가두어 둔 것이 '감싸 안은 것이다'를 풀기 위해서 그 힌트를 욥기 38장에서 가져왔습니다. 혹 왜 하필 욥기에요? 라고 물으신다면 이것이 욥기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게 욥기 42장입니다. 제가 거기서 욥기를 연상한 것은 당연한 성령의 인도하심이실 것입니다.

 

(로마11,36) 36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이 말을, 욥기 42장으로 가서 욥기가 이토록 로마서와 일관된 주장을, 결론을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로 우리 이 말씀을 마무리합시다.

(욥기42,1-6) 1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2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3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5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들었다는 건 뭘까요? 들었다는 것은 말이 된다는 뜻이에요. 봤다는 건 뭘까요? 말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아니라, 보면 그만이에요. 그 말이 이런 소원을 하느님께 했대요. 하느님 저 억울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부려먹고 타고 다니고 고생스러워서 못 살게 했습니다. ‘뭘 원하냐?’ 사람들이 타지 못하게 등에다 혹을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낙타를 만들어줬대요.

우리가 낙타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야 이렇게 누가 낙타를 봐. 낙타가 이렇게 생겼어. 말이 이렇게 생겼어” “그게 뭐? 말이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 있느냐?” 답은 하나예요. 보여주면 돼요.

성경이 하는 얘기는 말이 되느냐? 전부 이거에요. 봐라 예요. 그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리고 우리예요. 너희가 구원을 얻은 것이 너희에게 무슨 티끌만한 근거라도 있느냐? 있으면 자랑해봐라. 맞습니다. 제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내게 아무 조건이 없는 것, 내가 만들어낼 것이 아무 근거가 없는 곳에서 하느님 창조의 역사를 하시는 줄 믿고 회개합니다. 주님 앞에 나를 바칩니다. 내가 붙들어 안고 내 이해와 내 능력 안에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높이소서.’

그렇게 욥기가, 그리고 오늘 로마서 11장이 복음의 위대함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결론 내는 것입니다. 그 인생을 사는 줄 아는 순종과 자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그 신비와 능력과 기적을 보았으니, 그 영광과 자랑과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허락하신 자유를 알았으니, 기꺼이 자랑과 명예로, 그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의 인생을 자리하게 하소서. 매진하게 하소서. 성실히 사는 자랑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인생을 누리게 하소서. 복으로, 자랑으로, 영광으로 채우는, 나누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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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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