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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35)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膳物) (로마12,3-13)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23 조회수273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4. 1. 24. (수요일)

 

로마서35)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膳物)

 

(로마12,3-13)

3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4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5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라면 자기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써야 하고 7 그것이 봉사하는 일이라면 봉사 하는 데 써야 하고 가르치는 일이라면 가르치는 데 써야 하고 8 격려하는 일이라면 격려하는 데 써야 합니다. 희사하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을 다해서 해야 하며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11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13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구원받은 자의 인생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신자답게 살자, 옳은 일을 하자, 쓸모 있게 살자, 이런 개념에 갖다 붙들어 맬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래 의도한 자기의 형상대로 만든 그 인간에 가진 목적, 하느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것,

로마서 6장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사람의 예대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그러나 이제는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되었으니’, ‘하느님의 자녀로 살면 어떤 삶이 되는지 따라가 보라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옳고 그른 것, 천국과 지옥, 일하는 것으로 작아지거나 가난해지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 것들은 다 이 특징에 어떤 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단어들이지만, 원래 풍성함과 큰 것이, 그런 옳고 그른 것이나 기능적이거나 유용성이거나 명분이나 도덕에 의해서 작아질 위험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너 명예롭게 살아라.” 하는 말이 명예라는 다만 추상명사에 묶이지 말고, 하느님이 이제껏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신 일들을 보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이제 알 것 같지 않냐? 구약을 읽어보면 하느님이 잘못한 게 뭐가 있냐? 그 이스라엘이 못났지. 그 못난 사람들을 하느님이 어떻게 대접하시더냐? 하느님이 얼마나 울고 개입하시고 그리고 놓아두지 않고 기다리시고 달래고 그러냐?

그의 거룩하심을 타협하시지 않는 것, 보지 않았느냐?

그것이 예수 안에서 어떻게 정말 말도 할 수 없는 이 세상이 담아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 한복판을 깨고 지나가는 식으로 그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 봤으니 그가 하시려고 하고 목적하시려는 그 십자가로 이루시어 우리 보고 살아보라는 그 길을 걸어라 그런 얘기입니다.

다른 걸로 하는 것은 우리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나와 있는 것이지, 그것들이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가치가 되어 우리를 묶으면 그리스도교의 원래 의도한 하느님의 높으심과 넓으심과 깊으심은 방해를 받는다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2절은 이거였죠. ‘그러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느님의 뜻이, 그 기쁘심이 무엇인가 분별하라, 살아보면 알지 않냐? 세상은 거짓되지 않냐? 나이가 들어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누구나 이기면 행복이 올 것 같고 열심히 하면 어떤 자랑이 생길 줄로 압니다. 당연히 그렇지요.

살아보면 속고 실패해서만 아는 게 아니라 성공해도 알지요. 누구를 이긴 걸로는 영혼의 답이 없습니다. 내 노력에 보상을 받아도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허무합니다. 이게 승리라고? 이게 영광이고 명예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성공과 승리는 각박함 속에서 치열함과 모든 술수를 이겨낸, 쥐어짠 상처로만 남은 메마른 승리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성경은 다르게 얘기하는 거죠. 예수 안에 있는 승리, 그건 뭘까요? 죄 없는 이가, 아니 하느님이 그가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그들의 손에 오해받고 죽는, 그 길을 뚫어 주는 영생이란 뭘까요? 어디에 명예가 있고 어디에 참된 답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의 갈증을 답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기만과 체념이 있을 뿐이죠. 이런 신이 있다면, 있느냐 없느냐 이상으로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여 죽으러 오시는 하느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느님,

말이 돼요? 그런 신이 정말 있다고 어디서 확인해요? 우리의 신앙 고백 속에서 확인했잖아요.

우리가 믿은 것 아니고, 어느 날 우리의 영혼이 깨어났잖아요. 은혜를 입었잖아요. 그리고는 스스로 좁힌다니까요. 다시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3절이 뭐였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말라.’ 우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동시에구체적인 것이다. 각각의 삶을 살아라.’

누구가 하는 거 구경하듯이 살지 않는다. 이것은 각각이 사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각각이 살아야 되는 것이다. 나는 네가 아니다. 내가 놓일 수 없는 것이 한계가 아니라, 나는 나밖에 나일 수 없는 구체성으로 이 성경의 약속들을 우리 모두가 자기의 인생과 자기 자신에게 채우고 경험하고 누린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4절 이하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거죠. 니가 걷는 길에서 그 영광을 살아라 그겁니다. 뭐라고 되있어요?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이게 다 한계에요.

더 잘나고 싶으세요? 자기에게 준 자신의 구체성을 살라구요. 자신의 구체성,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아내고 IQ 86이고 그걸 살라구요. 복되고 영광된 거라고요.

무슨 위대한 명분을 갖다 걸어서 그 바람에 자기 인생, 자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자기 자리를 놓치든가 그래서 더 나은 것과의 구별과 경쟁에 뺏겨서 실제로 살아야 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그런 길을 가지 말라 그겁니다. ‘그러지 말라에 강조점을 두는 것보다 모두가 특별하다그런 얘기죠. 모두가 특별하다.

골로새서 3장에 가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서신서는 이 동일한, 오늘 우리가 다루는 이 본문 얘기를, 그 가장 중요한 주제로 가지고 있습니다.

(골로3,15-17)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모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십시오. 그리고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십시오. 17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대표적인 게 감사(感謝). 스스로에게 넉넉하지 않으면 감사는 할 수 없습니다. 쥐어짜서 할 수는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넘쳐야 되는데, 무엇에 넘칩니까? 내 한계에 대하여 만족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때와 장소에 붙잡히시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붙잡힌다는 건 얼마나 많은 제한 속에 들어옵니까?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와 뭘 만들죠? 구원과 부활을 만듭니다. 그러니 겁내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발언권을 가지고 우리 생각이 더 큰 능력으로 증거되어야 우리의 인생이 가치 있고 쓸모 있을 걸로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속이는 거죠. 너 이겨야 돼.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괜찮아. 그러죠. 너 충분해. 우리 자주 인용하는 고린도후서 12장에 사도 바오로의 기도, ‘이 가시를 빼달라고 내가 주께 세 번 간구하였더니, 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다.’

그리스도교만이 하는 것, 은혜, 기적, 우린 이 일에 겁을 내지요. 우리가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부족해서 하느님이 일 못하시는 것 같이 자책하고 마는데 그렇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시오. 그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게 하고 싶은 얘기죠.

고린도전서 12장에 가면 그래서 바로 이런 일들을 섬기는 일, 구제하는 일, 누구를 위로하는 일들의 가치를 이렇게 다루었습니다.

(1코린12,28-30) 28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직책을 두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가르치는 사람이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 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등입니다. 29 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가르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30 모두가 다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해석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에요? 모두 같은 은사를 받지 않는다. 모두 똑같은 조건 속에 있지 않다. 괜찮다. 각각 자기의 조건과 은사가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라. 모두에게 유익이 되게 하라. 너 자신에게 유익이 되라. 그런 얘깁니다. 그리고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청하라. 여기서 더 큰 은사는 능력이 아닙니다. 더 큰 유익이 되라 라는 뜻입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사랑이 나오죠. 사랑은 이건 아니야로 시작합니다. 뭐가 아니다? 환상이 아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게 사랑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봉사는, 믿음은 환상이 아니다. 잘난 척 하지마라. 교만하지 말라. 그러는 거 아니다.

거기에 붙잡히지 마십시오. 천사의 말을 하는 게 사랑 아니다. 두 번째, 능력 아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이 사랑 아니다. 쓸모 있는 거, 그걸 유익이라 그러지 않는다. 셋째는, 니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거 사랑 아니다. 정열이 사랑 아니다. 담담하게 지켜내는 게 사랑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그리고 긍정적인 정의로 들어갑니다. 사랑은 뭐래는 거예요, 환상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고 그리고 정열도 아니라면, 그건 오래 참는 거다. 오랜 고통이다. 왜 고통스럽죠. “쟤는 왜 그러나?” 이게 고통이죠. “저건 왜 있나?” “하느님이 만드셨으니, 냅 둬라.” 그게 사랑이다. “사랑은 손잡고 우는 거 아니다. 내비 둬라.” 그게 사랑이다. 여길 못하죠.

난 왜 이 꼴이야? 내비 둬라.” 하느님이 너 만들었고 그건 최선의 조건이다. 너 못난 채로 살아내라 그겁니다. 못났으면 경멸을 감수해야죠. 어렵죠. 무지를 감수해야죠. 모든 은사는 이겁니다.

하느님이 나 같은 것도 불렀고 나를 통해서 일한다 라고 스스로의 존재와 한계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않는, “그건 하느님 손에 달린 거다.”라고 자신을 믿음으로 붙잡을 수 없다면, 당신이 원하는 다른 지위, 다른 조건을 가져도 소용이 없다구요.

인생을 살다보면 열등하고 못나서 불행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없으면 불행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성공이 올무가 됩니다. 얼마든지 실컷 보는 일 아닌가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가장 많은 번뇌가 못난 것들이 열심을 부리지 않는 것, 잘난 것들이 자기가 잘난 것보다 더 크게 고함지르는 것, 그 두 개를 빼면 뭐가 남나요? 아무것도 안 남죠.

주제 넘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려, 재난에 빠뜨려, 겸손을 배우게 할 수 있을까요? 그를 꺾으면 겸손을 배우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원망하고 분노하는 자에게 조건과 지위를 주면 그러면 그가 만족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 내내 그런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만 있습니다. 하느님만 주시는 은혜며 능력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모든 일 속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이 각각의 한계를 특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좋겠다. 저 사람 얼마나 부러운가!”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 아래 있는 것 같이,

내가 행복할 수 없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하느님이 나를 만들었고 나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냈다. 내가 실제로 있지 않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리라. 여기에 오늘 본문의 가치가 있다고요. 사랑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죠.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친구네 집 아이가 수석으로 대학에 붙어서 밥 살 때, 가서 ! 훌륭하다! 어떻게 수석을 하냐? 너 재수해서 또 한 번 수석해라. 밥 한 번 얻어먹게.” 이런 말 하는 것이, 그것이 복인 것입니다.

거기 가서 아유, 난 죽겠어. 우리 애는 공부자만 보면 펄펄 뛰어!” 이런 얘기 안 하는 겁니다. 내가 견뎌야 되는 거죠.

거기 갔다 와서 아들을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난 아들인데 어떻게 자기보다 더 잘하라고 그래요? 알아들으세요? 잘난 아들 데리고 사는 것이 권리만 있을 것 같아요? 못난 아들 데리고 살면 손해만 있어요? 짐만 돼요? 아니요. 성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습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고 누가 겸손을 배우며, 누가 인내를 배우며, 누구 속이 깊어진단 말입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로마서 8장은 이런 얘기를 하지요.

(로마8,12-17)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빛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빛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구체적인 인생을 살자. 왜 고난 속을 걸어야 하는지를 분명한 건 있습니다. 우리의 영광은 고난을 이기는, 고난이 없어서 무사태평이 아니고, 고난으로 막을 수 없는 큰 것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그 고난은 외적인 고난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의 못난 것도 우리에게 유익을 끼칠 것입니다. 이 영광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는 아차 잘못한 바로 이것,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 말씀과 각각 조건이 다른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이 일을 그르치고 합니다. 오판하곤 합니다.

이것은 지금껏 설명한 것 같이 그 명분, 그 도덕성의 가치가 아니라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자유입니다. 죄에게 굴복하지 않고 우리가 선택할 자유, 하느님이 보이신 하느님의 길과 하느님 없을 때 우리가 가졌던 과거에 세상의 시험과 위협이 주는 것 사이에서의 선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보고 이렇게 묻는 것과 같죠. “공부할래? 음악 할래? 그림 그릴래? 축구 할래?”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너 죽을래?” 이렇게 물어보는게 아닙니다. 공부는 석차를 매기기 위해서 시작한 게 아닙니다. 음악은 많이 팔아먹으려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축구를 하면, 지면 상대방 다리라도 부러뜨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 팀이 만들어내는 인간 정신의 가치에 고급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지면 마치 목숨을 잃은 것 같이 고개를 떨구고 나올 만큼 최선을 다하는 투지를 불살라, 그러나 정정당당히 붙어,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운동 경기입니다.

그러니 응원을 하는 거죠. 직접 그라운드에 나서지 않을지라도 어느 쪽을 편들어, 지면 다 죽여버릴 거야, 그리고 지면 선수들하고 같이 서서 우는 거. 그런 가치들을, 그런 명예들을, 그런 인생을 사는 겁니다. 한 팀을 응원하고 거기에 내 기쁨과 슬픔을 묻는 것보다 더 큰 조건이 있죠.

사는 것, 내 가족, 그 모든 것이, 그런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신자된 영광이고 특권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져도 멋진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할 줄을 모르면 다만 승패만 남고, 이기기 위하여 영혼과 인생을 팔아먹게 됩니다. 그러지 마시오.

우리의 자랑은 져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셨습니다. 그죠. 실제로는 이기셨죠. 하느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죽음의 자리에 자신을 내어놓음으로 세상은 그가 졌다고 판정을 내렸으나, 알고 보니 세상이 진 거였죠.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속에 그 내용이 빠져 있으면 우리는 절대 죽지 못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면 세상보다 더 악착스러워지죠. 세상 사람들의 비난 속에 이거 있는 거 아십니까? 저것들은 예수 믿어서 돈도 벌고, 지위도 가지고, 게다가 죽으면 천국도 간대. 그렇게 되지 마시오. 우리가 가진 것이 가난하면 그 욕을 먹게 됩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우리는 유일하게 질 수 있는 사람들이죠, 그 속에서 부활 승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납득하고 있지 않으면, 세상이 행하는 모든 야비함과 더러움을 다만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을 걸어 호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재난이 오느냐? 믿는 당사자의 영혼과 인격에 재난이 옵니다. 스스로에게 영광이 없습니다. 아까 본 대로 거기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식으로 하나 더 얘기를 해놔야 이런 일이 없어요.

(에페4,25-29) 25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26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하던 사람은 이제부터 그런 짓을 그만두고 제 손으로 일하여 떳떳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29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도둑질 하지 말라우리는 내 이웃의 것을 뺏아서 우리의 필요를 채울 필요가 없는 자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의 필요는 하느님으로부터만 나온다. 내가 이웃에게 보복하거나 우리 필요를 그에게서 빼앗아 올 필요가 없다. 그러니 너 더러운 말, 악의에 찬 말, 하지 마라. , 덕을 세워라. 은혜를 끼치라. 니가 가진 자다. 그런 얘깁니다.

이사야 42, 이 말씀으로 하느님이 주신 말씀의 결론을 삼기로 합시다.

(이사42,1-8)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2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3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4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5 하늘을 창조하여 펼치시고 땅을 밟아 늘이시고 온갖 싹이 돋게 하신 하느님,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입김을 넣어 주시고 거기 움직이는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는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7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 주어라. 8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내가 받을 영광을 뉘게 돌리랴? 내가 받을 찬양을 어떤 우상에게 돌리랴?

 

우상은 하느님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아닌 것을 대등하게 이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에 못 미치는 데서 타협하지 않겠다. 그런 뜻입니다.

좋은 단어들이지만 도덕, 윤리, 대의, 이런 유능, 유익이라는 단어들 같이 자랑, 명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 다 올라가기 전에 끝나는 것들로 타협하지 않겠다. 내가 원래 목적한 것, 내가 내 아들 안에서 이룬 것으로 너희들 존재와 삶과 운명을 채울 것이다. 그러니 용서하는 자가 되고 은혜를 끼치고 감사하는 자로 사시오.

윤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의 특권입니다. 그 인생을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하느님을 택하고 하느님께 순종하여 우리의 생애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겠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선택이 되었나이다. 하느님 함께 하시어 그 영광 드러내시고 우리 입술에 찬송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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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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