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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38) 하느님 권위에 복종(僕從) (로마13,5-7)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27 조회수201 추천수1 반대(0) 신고

아테네의 사도바울

 

2024. 1. 27. (토요일)

 

로마서38) 하느님 권위에 복종(僕從)

(로마13,5-7)

5 그러므로 하느님의 벌이 무서워서뿐만 아니라 자기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도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6 여러분이 여러가지 세금을 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은 그와 같은 직무들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임명을 받은 일꾼들입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국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

 

로마서 13장은 하느님이 일하시는 구체적인 방법, 틀을 소개하고 거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장입니다.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라. 이렇게 됐죠. 이 당시는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 때라는 걸 기억해야 됩니다. 민족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항복할 수 없는, 피지배하에 있는 억울하고, 특별히 종교적으로는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백성들이 말도 안되는 많은 우상들을 섬겨야 하는 나라에 묶여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도 않고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 이 말씀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종종 신자들이 자기가 사는 시대의 정권, 당시 정부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되는가 하는 데에서도 자주 논란이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로마서 전체의 가르침에 비교해보면, '위에 있는 권위' 라는 것은 컨텍스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컨텍스트란 지난번 내용부터 제가 입에 올리기 시작을 하고, 원래 전문적인 용어로는 문맥, 정황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것을 물론 문맥으로도 정황으로도 당연히 이해해야겠고 조금 더 넓혀서, 적당한 한국말이 아직 없기 때문에 이 컨텍스트라는 말로, 배경, 무대, , 그릇 같은 말을 다 포함해서 컨텍스트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대비하고 싶은, 비교하고 싶은 개념이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는 본문이죠.

여기서 컨텍스트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신의 시대에서 정권은 뭐냐? 그때 사회 질서와 가치들은 뭐냐? 우리 이해하기 좋게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복종해라 하는 것은 우리 권력에 복종해라와는 사뭇 다르게 들리시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복종해라. 그러면 누가 반발하겠습니까? 그런 의미라고 보고 있죠. 부모는 꼭 다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지만은 않았지만 부모는 굉장히 큰 것입니다. 낳아줬고, 물론 반대하겠죠. “누가 낳아 달랬어?” 그건 이제 못 났을 때 하는 소리고, 낳아줬고 길러줬습니다. “제대로 안 먹이고 제대로 공부 안 시켰는데...” 그렇게 말고, 크게 부모가 있어서 내가 있고 최소한의 기본을 해주신 분이 부모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부모가 되어야겠죠.

세상에서는 컨텍스트는 경쟁 혹은 전진을 목적하게 됩니다. 더 나은 나라, 더 나은 사회, 우리 본문을 이해하는 쪽으로 조금 옮기면 우리는 우리 자식들한테는 더 나은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나라와 사회에서 더 나은 나라,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권력을 가진 지도층이 잘해야 된다.’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중에서 뽑힌 자들, 다시 말하면 민도가 높아져야 된다.’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됩니다.

전문적인 표현으로는 시민 의식, 시민 사회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겁니다. 민주주의의 좋은 점은 이것이죠.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은데, 아직 민도(民度, 국민의 생활이나 문화 수준의 정도)가 올라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민도가 올라가야 된다. 우리 모두가 권리는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고함을 지르면 해결이 되는 게 아니고, “우리나라는 왜 이 꼴이냐?”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스스로 침뱉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민 가지 마십시오. 이민가면 쫓아가서 죽여버릴 것이니, 이 나라를 지키고 망신을 함께 당하시오. 그리하여 쌓아가야 됩니다. 이건 당연히 서론입니다. 나라 얘기하려고 꺼낸 게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교인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십니다. 지금 우리나라, 우리 지금 현실에서, 당황스러운 부끄러운 실망스러운 현실 속에 있듯이 예수는 당시에 가장 나쁜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십니다. 서론에 얘기한 것 같이 유대인으로 태어납니다. 피식민계급의 한 사람으로 들어오시죠.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400년간 아무런 지도자가, 영적 지도자가 나서지 않고, 알렉산더 휘하에 있던 장군들에 의한 분할 통치에 속하여 피식민계급으로 살다가 독립투쟁을 해서, 독립을 잠깐 했다가, 다시 로마 정권에 붙잡힌 바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여러 갈래로 분열되지요.

현실적인 세력과 손을 잡는 그룹들이, 지도자 그룹들이, 정치가 그렇게 흘러가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고유한 민족성과 책임 같은 것은 저버리고, 다만 현실적 이익에 급급한 정치세력, 그리고 거기에 맹렬하게 반대하는 소수의 항쟁파 세력, 그때에 태어나셔서 이쪽에도 관심을 받고 저쪽에도 의심을 받는,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여생을 사십니다.

그건 뭘까요? 결국 죽어버린 그의 공생애는 무엇일까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직전에, 시험을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사탄이, 마태복음식 순서로 하면, 마지막 시험으로 이걸 걸었죠.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줄께. 거부하셨어요. ‘오직 야훼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길 것이다.’

그렇게 헤어지셨습니다. 컨텍스트를 소유하지 않으시고 컨텍스트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하는 텍스트가 되기로 하십니다. 그 말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컨텍스트와 텍스트는 다른데, 그럼 어떻게 묶여 있는 것일까요? 그런 질문이 나오죠. 이사악에게서 그 비밀이 이렇게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사악은 이스라엘 역사의 족장입니다. 3대 족장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으로, 구약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선포하시고 설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입니다. 우린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은 좀 이해가 되는데, 이사악의 하느님은 사실 내용이 넉넉지 않습니다. 이사악은 백살에 얻은 자식입니다. 이사악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자식을 주겠다 그래서 사라가 문 뒤 에서 웃었습니다. 그죠? 하느님이 너 웃었다. 내년에 너 애 낳을 거다. 안 웃었습니다. 우겼죠. 너 웃었다. 그러니 너 애 이름을 이사악이라고 지어라.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자면 당황스러운 이름을 얻게 된 겁니다. 사라가 믿지 않았던 아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고 동시에 웃을 수 없는 집안에 웃음을 주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에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그 이사악을 잡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잡으러 가지요. 모리아산으로 가서. 아들이 물어요. “다른 건 다 있는데 제물은 왜 안 갖고 오십니까?”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이 준비하실 거다.” 애를 잡을 작정이니까 올라와서 이제 단을 쌓고 장작도 쌓고 애를 묶고 칼로 찌르려고 하는데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됐다. 니가 제대로 된 신앙을 갖고 있는 걸 내가 확인했다. 손대지 마라." 그래서 살아나죠. 우리는 그래서 아브라함이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다. 그 결론을 압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좀 더 이해해야 됩니다.

아브람은 이사악을 낳기 전에 이미 네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라. ‘열국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고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러니 네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라. 이렇게 됐죠.

자식은 하나도 없고, 아무래도 안 주고, 그리고 언제 애 낳아요?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돼서야 낳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니가 만든 자식 아니다이거죠. 그리고 그 자식은 왜 줬을까요? ‘니가 만들 수 없는 것을 내가 약속하고, 내가 만드는 것으로 네 후손을 하늘에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게 하리라.’

그럼 이사악 없이 그냥 만들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럼 구체화되지 않으니까, 이사악을 줘요. 이사악을 내가 만들어서 생물학적 차원에서 자손이 번성하는 게 아니라, 약속에 의하여, 하느님의 의지에 의하여 생긴다 했지만 만들어 놓으니까 또 혼을 뺏기죠. ‘그래서 잡아라가 되는, 애 잡아라. 이 자식은 없어도 되는 거다.” 아브라함이 알아들은 것 같아요. 가서 잡죠. 그러니까 이사악은 없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고 이거 다 가져라. 대신 나한테 절해라.” “그거 안 한다. 난 그거 가지려고 온 자 아니다. 모두를 하느님 앞에 경배케 하고 하느님만 섬기게 하려고 왔다.” 그래서 그 속에 들어오죠. 그 속에 이사악은, 이사악의 존재가 아니라, 그 없어야 될 존재의 보임으로 텍스트를 갖고 있는 자로 보이는 거죠.

그런데 텍스트만 있고 컨텍스트가 없으면 텍스트가 담길 데가 없어서 이사악은 그릇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있는 시간과 구조, 질서, 조직이라는 것은 컨텍스트다. 그 속에 텍스트를 담는다. 이렇게 시간, 시간에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그 시대의 조건, 환경, 정황, 수준, 이런 것 모두, 모두 그것이 보이는 그릇이 되어 텍스트가 담기도록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독특한 지위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그 아무래도 좋은 것이 그냥 무작위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각각에게 허락한 다양하고 특별한 지혜와 은사에 의한 자리라는 걸 기억하고, 공통된 텍스트를 묶으려고 하십니다. 예수입니다.

시민사회를 만들자, 더 나은 국가를 만들자 라는 컨텍스트의 개선 이외에는 텍스트가 없는 세상에서, 그 컨텍스트를 만들기 위하여,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자들만이 지금 오직 분노하고 비난하고 보복하고 밖에는 가질 수 없는 세상에서, 컨텍스트를 유지케 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하느님은 텍스트를 담아내실 수 있다를 아는 신자들만이 억울함을, 말이 안 됨을, 재난을, 불운을, 위기를, 의심을 견딜 수 있는 거죠. 나만 혼자 왔구만요.

철학의 가장 중요한 숙제는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규명할 숙제가 주어져 있는 학문입니다.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야 되는가, 죽어야 되는가, 그걸 맹렬히 고민하고 있다 까지 밖에 못 오고, 답은 아직 낸 사람이 없습니다.

그 답은 그리스도교에만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 인간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보다 더 굉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하느님의 의지와 목적이 완성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영광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지는 답입니다.

어떻게 하였는가? 예수 안에서 창조의 하느님이, 구원의 하느님이, 그것을 당신의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니 인생 속에서 하느님이 신비하게 간섭하실 것이다. 그게 그리스도교 복음입니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에서, 살 이유를 찾지 못하면 죽어야 맞습니다. 사는 건 고난의 연장일 뿐이고 모두에게 짐이 될 뿐이니까 죽어야 마땅합니다. 살아야겠다고 답을 찾았으면 살 이유를, 그리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살 이유와 목적을 매일의 삶 속에 채우고 그 방향으로 연결해야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컨텍스트를 개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텍스트를 담을 수 있고 하느님이 그 텍스트를 담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이신 죽음을 뒤집을 수 있는 기적을 살고 있고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궁극적 승리를 우리를 통하여 구현하고 계신다고 안다면, 우리는 무서울 게 없는 겁니다.

더 나은 나라에 태어나고 싶다구요? 그래서 뭐 할려구요? 아무것도 안 할 거 아니에요? 좋은 나라에 가서 와인 한 잔에 좋은 책 하나 보겠다고요? 좋은 책은 없어요. 다 쓰레기 같은 거예요. 성경을 보세요. 그리고 그 말씀이 가지는 약속의 명예로움을 아세요. 알아 들으세요?

왜 이렇게 무섭게 말하세요? 진지하게 말하는거예요. 그게 아닌 인생은 속는 거예요. 그렇게 안 사는 것은 방치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지 마세요.

요셉을 보세요. 컨텍스트 속에서 하느님이 뭘 만드는가 보세요. 어떻게 텍스트가 들어왔는가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보면 이렇게 거대하게 드러나요. 요셉이 팔려가요. 요셉은 왜 팔리죠?

야곱이 마누라 넷에 애가 열둘이거든요. 오죽했겠어요. 딸 이름은 안 나왔으니, 그러니 적어도 한 삼십 명 됐을 거 아니예요? 이복 형제, 자매에요. 보통 많은 시샘이 있었겠어요? 거기에 요셉은 편애를 받아요. 다 꼴보기 싫었겠죠. 팔아 먹었잖아요.

요셉은 얼마나 철이 없었나요? 지가 꾼 꿈 얘기도 해요. 철이 없어서. 미움을 받고 있는데 나가서 그 얘기했다가 죽을 뻔하잖아요. 르우벤이 살려줘서 간신히 노예로 팔려서 애굽에 들어가요. 낯설은 땅에 들어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종이 돼요. 그리고 무고를 당해서 억울하게 감옥에 갑니다.

그냥 보냈을 것 같아요? 그 시위대장이 반쯤 죽여서 보냈을 거예요. 아마 외눈박이였을 거예요. 카드에 나오는 원아이드 잭. 반쯤 패서 죽여 갖고 보냈을 거 아니에요? 거기서 발은 족쇄에 묶이고 몸은 쇠사슬에 묶여 감당할 수 없는 나날들을 막막하게 보내는 거예요. 죽어야 나오는 곳이에요.

거기서 부름을 받아서 총리가 되어요. 요셉은 보복하지 않아요. 원망하지 않아요. 했을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가 당한 눈물과 한숨과 비명과 분노 속에 무얼 담았느냐고요? 그래, 자기 식구를 구해요. 식구가 모두 들어와 고센 땅 가장 기름진 땅을 받고 거기서 한 민족을 이루어요.

너무 융성해져서 파라오가 드디어 이런 칙령을 내려요. “히브리 민족은 사내 아이를 낳으면 죽여라.” 얼마나 무서운, 무서운 컨텍스트 속에 있었겠어요. 그래서 모세를 나일강에 떠내 보내요. 그걸 누가 건져요? 파라오의 공주가 건져서 왕자로 키워요. 자긴 뭔지 모르고 잘 컸을 거예요. 잘 먹고,

그리고 나이 들어서 자기가 누군지 알아요. 자기 백성 구하러 나갔더니 아무도 안 들어요. 그래서 망명을 하죠. 미디안 광야에 가서 40년을 녹아버려요. 어느 날 하느님이 오셔서 , 가자! 내 백성을 구해야겠다.” “아이고 하느님 늦었습니다.”

그 곳에 데리고 와서 열가지 재앙 내리고 홍해를 가르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샘을 먹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여보내고 나라를 세우고 그리고 부패하고 배신해서 망하여 바벨론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 제국 아래 피식민 계급이 되었고 자중지란 속에서 막막한 현실을 보내고 있는, 그리고 2,000년 다시 유대인이나 욕하면 우리들 책임이 끝나는 것 아닌 그리스도교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 그리고 우리는 한국에 태어났습니다. 조급하고 성급하게 선진국을 뒤쫓아 갔지만 민도가 따라오지 못한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우스갯소리에 그게 있죠. 어느 배가 난파하여 구명정에 탔는데, 탈 수 있는 사람은 적고 사람은 많아서 자원하여 누가 포기해 달라.

그 예화에서도 희한하게 영국놈들이 제일 잘난 놈으로 나와요. 대영제국 만세! 그리고 한놈이 물속에 팍 뛰어들더라, 그리고 이 나라 저 나라 하나씩 뛰어들었는데, 한국사람 하나가 나왔었죠. 대한민국 만세! 그리고 옆에 있는 일본놈을 밀어 넣었다. 얘기 잘 아시죠? 거기에 자조가 있는 거 아세요. 대한민국으로는 자랑할 게 없어요. 일본 놈 미는 보복 외에는 아직 담을게 없어요. 아세요? 그 나라 국민으로 같이 죽는 거예요.

진실이라는 것은 초시간적 개념이 아니고 시간 속에서 만들고 반성하고 덧입히는 구체적인 것이예요. 우리가 욕 먹고 후회하고 그렇게 죽고 죽어 누적되어 디디고 넘어갈 수 있게 해야 돼요. 우리가 몸 담고 살고 있는 우리의 컨텍스트에요. 그렇지만 우린 텍스트를 갖고 있으니까, 이걸 감수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걸 감수해내지 못하면 그리스도교라는 말 입밖에 낼 수가 없어요.

세리(稅吏)는 당시에 어떤 존재였을까요? 기생충 같은 존재였겠죠. 로마의 정부 관리가 되어 자기 백성들의 고혈을 빼내는 자였겠지요. 본인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랬는지, 원래 나쁜 놈이라 그랬는지는 상관할 거 없습니다. 그걸 하는 일과 그 꼴을 보는 자, 양자가 다 그 현실을 극복해야 되는 거예요.

컨텍스트를 받고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을 살아 모두에게서 텍스트를 담아야 돼요. 우린 복음서에서 세리 마태오의 회심을 봐요. 그의 회심은 그가 세리였었기 때문에 더욱 빛나죠. 세리일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되는 있을 수 없는 현실을 살아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던 것처럼 그의 구원이 역사적 사실로 부각되지요. 분명해지죠. 커지죠.

컨텍스트가 훌륭해야 텍스트가 멋있어지는 것이 아닌 것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도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지나가는 모든 이가 저게 보물일 리가 없다. 밭에 널려있으니까. 그러나 그건 보석이었습니다. 밭에 갖다 버려서 쓰레기인 줄 알았죠.

여러분의 지위, 현실을 납득해야 됩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이 일하신다는 걸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으로 고함밖에 지를 것이 없고, 원망밖에 할 게 없습니다. 그렇게 살지 마시오.

우리가 얼마나 굉장한 시대, 굉장한 일에 묶여 하느님이 일하시는 손길이요 현존하는 구체적 하느님의 개입인가를 이해하는 우리 인생을 사시오. 그렇지요! 아멘올시다.

예수님이 그리 하신 것처럼, 의심과 무지와 배신과 조롱과 헛된 기대 속에 자신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인류 모두를 위한 역사의 궁극적 완성을 위한 길이었다는 것 기억하는 각자의 인생, 존재, 가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를 절벽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조용히 가서 짓눌려 죽어야 됩니다. 하느님은 그 속에서도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어찌 할 수 없고 안심이나 평안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책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살고 있는 현실은 하느님이 일하시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의 길이고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그 삶을 사는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 되게 하소서. 우리 시대가 죽어 싸매고 짊어져 간 짐들이 마침내 커다란 승리로 돌아오는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시대가 되도록 예수를 믿는 믿음에 힘과 기쁨과 희망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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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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