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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41) 형제를 심판하지 마라 (로마14,1-12)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29 조회수124 추천수1 반대(0) 신고

 

남을 심판하지 마라.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2024. 1. 30. (화요일)

 

로마서41) 형제를 심판하지 마라

 

(로마14,1-12)

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나 여러 견해를 두고 논쟁할 생각으로 그렇게 하지는 마십시오. 2 어떤 사람은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믿지만, 믿음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3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 먹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가려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4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5 또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이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어느 날이나 다 같다고 여깁니다. 저마다 자기 판단에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6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12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은, 13장에서 본 결론과 같이, 우리는 세월을 낭비할 수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됐습니다. 하느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 만들어주신 무대와 환경과 전황 속에서 실제로 내가 내 역할과 하느님이 그 안에 담으시는 본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렇게 살기로 해서 우리 지난번에 확인한 바와 같이 방탕하지 말고 술취하지 말고 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되게 생겼습니다. 열심히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보니까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게 14장에서 다룰 내용들입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얘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채소만 먹고 어떤 사람은 고기도 먹는다하는 것이 여기 예로 들려 있는데, 이 초대교회의 시대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고 많은 신을 섬겨서 국가가 그 기본 권위를 그들이 섬기는 많은 국가적 우상들의 신적 권위에 의지하여 나라의 기본을 삼고 있었습니다.

시장에 나오는 모든 고기는 그 우상 신들에게 바쳐진 제물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간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리했듯이 고기 안 먹겠다라는 것은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오로나 또는 여기 다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우상은 원래 없는 거다. 모르고 바친 건데 그게 무슨 우상이 있는 것 같이 안 먹음으로써 우상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냐? 하는 자리까지 나간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 또 15장에 가면 강한 자와 약한 자라는 설명을 위한 대비가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 나는 그 고기는 안 먹어서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 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어떤 표현을 삼겠다.” 하는 자와 하느님 외에는 다 없는 거야. 그건 가짜야. 그건 몰라서 그러는 거야.” 라는 더 큰 것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려고 하는 자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을 봅니다.

바오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기에서 믿음이 강한 자, 믿음이 약한 자를, 어느 편을 들 의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날을 더 중히 여긴다는 것은 아주 쉽게 안식교나 유대교같이 토요일을 성일(聖日)로 지키는 자들과 우리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가 가지는 주일로 성일의 옮겨짐,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성일로 삼는 것, 이것도 중요한 논쟁거리가 됐죠.

구약 내내 안식일을 지키라고 돼 있고 십계명에도 들어있는데, 어떻게 슬쩍 넘어가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에겐 당연히 안식일이 가졌던 그 상징성, 그 증거 하고자 하는 내용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으므로 이제는 안식일을 지킬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을 기념한다. 이게 또 큰 싸움이 됐죠.

바오로는 분명히 그 두 문제가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1절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라는 사실입니다. 만만치 않은 것이죠. 151절에 가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다로 더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1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믿음이 강한 자, 믿음이 약한 자는 우월하고, 열등하고,라는 비교로 비교되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14,4) 4 우리가 남의 종을 판단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가 서거나 넘어지거나 그것은 그의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는 그를 서 있게 하실 힘이 있으시니 그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걸 기억해야 합니다. 이 강한 자와 약한 자라는 건 우리는 언제나 평면적으로 이해가 돼서 누구는 강하고 누구는 약하고 누구는 우월하고 누구는 열등하고 이런 식으로 대비되지만, 지금 로마서 내내 우리가 확인하는 중요한 요소, 우리의 신앙이나 하느님의 일하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간'이라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이 고급한 단어나 사상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열등하다 그러지 않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아이를 평가할 때는 그 나이의 기준에서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 나이의 평균으로부터 그 아이를 평가를 하지, 지금 절정에 이른 어떤 전문가와 대등한 차원에서 비교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 시간이라는 개념이 그 심판권이 하느님에게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죠.

 

(로마14,10-12) 10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아닙니까? 11 성서에도, '정녕 나는 모든 무릎을 내 앞에 꿇게 하고 모든 입이 나를 하느님으로 찬미하게 하리라' 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2 그 때에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십니다. 먼저 태어나고 나중 태어나고, 먼저 깨우치고 나중에 깨우치고 하는 시간상의 순서를 대등한 평면적인 차원에서 우열로 비교하지 마라. 우리가 가지는 신앙상의 가장 다급하고 실제적인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치가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이외에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문제에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주장들은 다 어떤 신앙상의 확신에 근거해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70년대에 한국교회를 강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였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좀 조금 애매한 질문입니다. 구원을 받으셨는가? 혹은 예수를 믿는가? 그래야 맞는데, 그때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라고 물었고 그렇게 묻는 것은 그 요구하는 답이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구원을 받은 그 순간에, 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라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었죠. 저에게 물으면 저 같이 모태 신앙인 자들은 대단히 애매했습니다. 기억나는 가장 아득한 옛날까지 교회 안에 있었으니까요. 그걸 묻는 이들은 그런 의도에서 묻지 않았습니다.

유아 세례받고 교회 안에서 어물쩍 살아난 것 말고, 자기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그 전과 그 후가 다른, 그런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가 라고 묻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자기가 본문을 받은 날, 즉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으로부터 생명과 구원을 받은 날의 컨텍스트가, 그 텍스트가 담긴 그 컨텍스트가 텍스트와 분리가 되지 않아서, 그 본문은 이런 정황, 이런 틀로만 담아진다고, 말하자면 혼동을 한 것이었습니다.

모두 다 요한복음 316절로 구원을 받았다.” 그래야만 되고, 다른 구절을 대면 열등한 것이거나 의심해야 되는 식으로 됐습니다. 저는 성경 중에서는 구약을 읽다가 이렇게 둥글게 문득 떠오르는 다윗처럼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뭐 어디냐? 그러면 매우 애매합니다. 그게 시나이 광야였는지, 바벨론 포로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구약에서 만났다는 것만은, 그 이스라엘 역사의 그 장고한 역사와 저들의 그 흥망성쇠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성실하심으로, 저는 문득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컨텍스트가 모호하죠. ,

그런 문제들이 우리를, 우리 한 50년 전 부흥기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가 붙들고 있었던 텍스트는 이 컨텍스트였죠. 성수주일! (聖受主日)! 그렇습니다. 뭘 먹느냐 안 먹느냐는 그 제사 문제와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결법 어떤 음식은 부정한 것이고 어떤 음식은 괜찮은 것이고 에도 걸리는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문제죠.

음식을 피채 먹지 말라 때문에 순대를, 피 넣은 순대를 먹느냐? 그냥 순대, 맨 순대만 먹느냐? 해장국에 선지를 넣느냐? 마느냐? 이런 데 걸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대부분 이젠 상관없어졌죠. 왜냐면 어느 날 이미 먹었으니까. 텍스트를 담는 컨텍스트가 좀 더 커지고 좀 더 깊어지고 있는 중이지요.

그게 어떻게 둘이 묶이는지를 알아서 그 컨텍스트는 보이는 공간으로, 구조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있다는 걸 아신다면,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얘기할 때 공간적 차원에서, 구조에서, 틀에서, 형식에서, 원칙에서의 대비 이상으로 시간의 이해가 있어야 된다는 걸 알아야 되게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고 뒤서는 문제가, 말하자면 컨텍스트로서 주어져서 앞선 것으로 어떤 본문을 담고 아직 어린 것으로 어떤 본문을 담는지 우리가 결정하지 못합니다.

피카소는 17살에 이미 내려오는 모든 고전 미술에 대한 이해와 기법을 다 터득했답니다. 그러나 평생토록 동심을 회복하지 못했답니다. 기가 막힌 얘기죠. 어리기 때문에 무지해서 가지는 본문이 있습니다. 그때만 드러나는. 교회도 초신자 때만 딱 한 번 나오는 그 대단한 능력과 진심과 기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이 나이와 경험이 쌓여야 지혜 속에 주름살 속에 나오는 것입니다. 뭐가 더 낫냐? 이렇게 얘기하는 거는 정말 한심한 얘기입니다. 왼쪽 신발이 더 낫냐, 오른쪽 신발이 더 낫냐? 그렇게 비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각각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지금의 정황, 조건이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감수해야 됩니다. 교회는 물론 더 그렇습니다. 사회가 보이는 것들로 묶을 수밖에 없다면, 법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유용성으로 묶을 수밖에 없다면, 교회는 예수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능력, 은혜라는 것으로 묶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는 더 넓고 더 깊고 또 놀라워야 됩니다.

그러나 뜻밖에 법으로 묶는 사회에서는 많은 융통성과 많은 감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분명하고 더 깊고 더 높은 이상 때문에, 명분 때문에 교회는 더 경직되곤 합니다. 교회는 그 단죄가 더 심하곤 합니다. 제가 아주 어려서 컸던 교회에서는 파마하는 것이 죄였습니다. 매니큐어 바르는 것은 그거보다 더 심한 죄였습니다. 이제 이해가 가죠. 그런 것들은 본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본문을 어떻게 담아내야 되는지 몰라서 절제, 희생, 거의 자학에 가까운 것들로 그 본문을 담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식기도, 성령기도, 그다음에 동우회, 그런 것들이 소용없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겠죠. 거기다 다 담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컨텍스트가 더 넓어져야죠.

요즘 교회에서 탁구모임 이다 당구모임 등이 있는데 모이는 게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모여서 할 수 있는 것이 한적이라는 걸 알고, 모이지만, 그것으로 교회 가르침을 전부 담으려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 입니다.

전부를 담으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대와 지금의 현실, 자신의 지위, 그리고 연결돼 있는 이웃 안에 우리가 있어야 제대로 다 담을 수 있습니다.

 

(로마14,7-8) 7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거 아멘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은 없습니다. 아니 다 아멘입니다. 근데 그 주님을 위하여 사는,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각각의 관심과 각각을 표현해서 다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일미사하는 것이고, 헌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하게 드러내는 자신의 충성이며 신앙이었습니다.

거기 그걸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한계를 더 극복하기 위해서 더 넓어져야 됐는데, "헌금하라고 강요하지 마" 라는 비판만 나왔고 헌금하는 거 말고 그 다음엔 뭘 해야 되느냐는 교회가 아직 못 찾고 있습니다. 그저 수가 늘고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해서 전도하고 선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더 넓혀지는 모두가, 성도(聖徒) 일반이 가지는 보편적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넓어지지 않았습니다.

선교 같은 특별한 미션에 묶였지, 정말 정말 일상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아직도 교회는 다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선 가장 급한 것은 지금 얘기하는 것 같이 앞서고 뒤서는 문제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다음에 뭐라 그래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정도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눕니다. 산 자와 죽은 자면, 우리 지금 살아있는 것과 죽은 자, 그런 개념보다 우선 와서 닿는 게 예수 믿은 자와 안 믿은 자입니다. 그 둘을 다 예수 안에서 묶겠다고 예수께서 죽었다가 사셨답니다.

그러니 우리가 쉽게, “나 그렇게 하는 거 싫어. 당신은 왜 그따구로 해?” 보다 얼마나 큰가 보십시오. 예수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모두의 주님이 되시려고 죽었다가 사셨답니다. 모두의 주인이 되려 하신답니다. 물론 믿는 자에겐 영생으로 믿지 않는 자에겐 심판으로 주께서 주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얘기 할려고 시작한 것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신앙생활을 살기로 한 자들에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는 자들에게 한 얘기입니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묶을 수 없는 간격과 분명한 이분법을 묶으시는 예수님이라는 걸 기억하고 또 신앙생활을 해라.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만만치 않은 요구죠. 이런 일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유는, 필리피서에가면,

 

(필리1,3-6) 3 나는 여러분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시작하신 분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합니다. 구원을 주신 분이 그 구원을 완성케 하며 승리케 할 것을 확신합니다. 전문적인 교리적 설명으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손에 성패가 달려 있는 것보다 크게, 시작하신 구원을 베푸신, 약속하신, 목적하신, 하느님이 주시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이라는 교리입니다.

우리의 인생, 우리의 고백, 우리의 운명이 예수로 확인되고 있다. 예수의 부활로 분명한 증거를 삼고 있다는 걸 언제나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니 신앙은 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뜻이 같고 표현이 같고 척하면 알아보고 하는 일사불란한 데 있지 않습니다. 윈수들하고 서는 데 있습니다. “저건 왜 교회 나올까?” 속에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겁니다. 그걸 살아낼 실력이 없으면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에페5,18-21)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19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20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성령 충만한, 서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서로 복종, 어떤 서로일까요?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하죠. 우리 인생을 살면서 제일 많이 한 고민이나 항변이 있다면 하느님, 어쩌자고요?” 이것 아닙니까? “하느님, 어떡하라구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겁니다.

하느님이 전능하시고 지혜롭다는 말을 우리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제일 많이 하는 원망이 그겁니다. 제일 많이 하는 원망. “왜 날 낳았어?” 생각들을 하세요. “니 입을 크게 열어라.” 그딴 말 쓰지 말고, 자기 좋은 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딴 말 쓰지 말아요. 왜 날 낳았어?” “기다려봐!” 옆에다 그걸 합시다. “기다려봐!” ‘서로 복종하라가 어디로 가냐면, ()으로 가잖아요.

 

(에페5,22)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복종을 하라고요. 주어진 조건을 기꺼이 감수하라고요. 그 속에서 일을 하라고요. 부부가 뭐예요? 평생, 일치하지 않는 것. 부부. 감수하고 사는 거예요. 대안이 없어서 살지요. 거기서 남자들은 백 프로 다 아내가 없으면 방탕할 거예요. 그 방탕은 윤리적인 얘기가 아니에요.

그냥 술 먹고 노래 부르고 절대 일하러 안 나갈 거예요. 여자는 그 바보 같은 남편에게 매여 있지 않으면, 묶여 있지 않으면,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억척스러워지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밑에 딸로 있으면 평생 사달라고만 하고 자기는 설거지 한 번 안 할 거예요. 이상해요.

거기서 위대해져요. 아내 하나 만족시킬 수 없는 남편으로, 남편 하나 믿고 살 수 없는 인생으로, 인생을 새삼스럽게 더 깊이 도망갈 수 없이 묶여 커요. 위대해집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컨텍스트입니다.

컨텍스트가 많은 도전을 하죠. 인문학은 그 도전입니다. 질문 뿐이죠. 인생이 뭐야? 이게 다야? 역사가 뭐야? 이게 죽고 말 것인데 어떡할 거야? 여기까지 밖에 물을 수가 없습니다.

진지하게 전문적으로 인류 역사 내내 반복해서 묻고 있죠. 이렇게 저렇게 치장하고 있지만, 답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과 진리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그의 본문을 생명과 진리와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은혜와 그것을 키우시는 그의 능력과 그의 승리와 영광을 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허락하시지 않으면 모든 정황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거기서 일하겠다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립니다. 살아냅니다.

자기 역할을 소중히 여기며 당시의 정황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귀기울여 순종합니다. 우리는 정황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도망갈 수 있습니다. 안 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전을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별이 없이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외아들(獨生子)을 주셨으니라는 말이 갖는 범위와 깊이를 안다면, 믿고 있다면, 우리가 살아내지 못할 컨텍스트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과 현실과 지위를 불평하고 비교하고 다른 쉬운 것으로 확인하려고 들지 말고 이제 다 각각의 지위와 말하자면 억울함과 막막함과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이죠. 그래서 믿음은 성경에서 '순종', '인내'라는 단어로 종종 대체되곤 합니다.

왜 그런 말을 쓰고 있는지 왜 시간의 개념을 쓰고 있는지 기억해야 됩니다.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제가 이만큼 훌륭해졌는데 여러분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따뜻한 눈을 가진다는 것, 무슨 일이든 감수할 수 있다는 것, 그 지점에 오면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리에 오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으로 보상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느님이 매일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지요. 그러니 여기 그대로 나왔죠. 매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敬畏)함으로 서로 복종하라.”

이렇게 아멘하고, 위대하고 기대찬 하루하루를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의 존재, 조건, 현실, 도전, 숙제, 의심, 불안, 공포,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를 대적할 자 없습니다. 그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 되어서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 하느님의 은혜의 손길이라는 것, 자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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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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