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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43) 성경(聖經) 말씀 (로마15,1-7)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31 조회수42 추천수1 반대(0) 신고

이집트,이스라엘,로마 성지순례 여행기 제79편 - <로마(9) - 사도 바울(1)>

 

2024. 2. 1. (목요일)

 

로마서43) 성경(聖經) 말씀

 

(로마15,1-7)

1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저마다 이웃의 뜻을 존중하고 그의 이익을 도모하여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시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 라는 성서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4 성서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인내를 배우고 격려를 받아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5 아무쪼록 인내와 격려를 주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 모두 한 마음이 되어 6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 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 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우리는 로마서 14장에서 약한 자를 비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15장에 오면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들의 약함을, 다른 편으로 그 짐을 나누어지라 라는 권면에 이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실천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윤리에 있어서, 그 윤리들이 그 윤리적, 도덕적 가치에 명분적 가치로 이렇게 독립되면 안 됩니다.

남을 비난하지 않으며 그들의 약점을 짊어진다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어떤 근본적인 진리에 의한 권면인가로 이어져 있어서, 우리가 그런 고급한 윤리를 행할 때 그것이 그 자체의 가치로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신앙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실천자들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15장에 이르는 이 뒤의 장들은 그 앞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 그것을 이루신 방법이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그것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2,000년 전에 이루신 구원에 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분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였죠. 그 은혜와 이미 결정된 운명을 놓고 그것이 이제 구체적으로 살아야 하는 신자들의 생애 속에서 어떻게 누려야 되는 것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12장부터입니다. 121절을 기억하면,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 구체적인 인생을 산다는 것은 하느님이 이미 이루신 구원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선택한 타락에서부터 출발하여 예수를 만나고, 우리가 선택한 하느님 없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누리는 그런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나서 뒤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번복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보다시피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구원은 이미 예수 안에서 완성됐는데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거기서 출발하죠.

역사에 이루신 구원을 각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현실화 시키시죠. 죄인으로 태어나 하느님 없이 살다가 예수를 만나고 그리하여 세상과 예수 안에서 하느님이 이루신 것과의 차이를 보며 하느님이 만드신 인간의 영광과 궁극적인 목표를 예수 안에서 확인하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인생은 다만 예수를 믿은 자의 선택이 가지는 책임이거나 선택에 의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 없이 사는 것과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의 비교이며 영광이며 하느님이 아직도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아직도 하시는 일, 예수님 다시 오시기까지 계속되는 구원, 우리를 부르신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시는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가면,

 

(갈라6,1-5)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2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 3 사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4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해 봅시다.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지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못됩니다. 5 각 사람은 자기 짐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잘못하거든, 이렇게 이분법으로 쉽게 나누지 말라는 겁니다. 저 사람은 틀렸고 나는 바르다. 이 일은 틀린 것이고 이 일은 옳은 것이다. 이 이분법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 저 사람이 지금 틀린 것이 끝이 아니고, 나는 다만 옳으면 다인 것이 아니라고, 깨달으라는 겁니다.

3절에 있는 바와 같이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이 전부가 아니며,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하느님이 지금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전에 그리하신 것처럼 인류가 하느님 앞에 반역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을 때 하느님이 우리의 행한대로 갚지 아니하고 기다리시고 그 아들을 보내어 인류를 구원한 것 같이,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시다는 걸 기억하여, “네 형제 중에 누가 하나 잘못되거든 하느님이 일하실 것이라는 걸 믿고 그 짐을 나누어져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 짐을 나누어진다는 것은 정확히 동료가 되라. 이웃이 되라. 가족이 되라.’ 그런 뜻입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과 흡사하죠. 외국에 나가면 물어볼 겁니다. 어디에서 왔냐고. 그럼 한국 사람이라고 조그맣게 말하십시오. 나는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그게 여기서 말하는 짐을 나누어지라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달라요를 지금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수하시오. 저 사람, 우리 형제입니다. 내 친구입니다. 우리 교우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입니다. 이게 짐을 지라는 거죠. 그 짐 지는 자리, 그들의 동료로 보냄을 받는 것, 그것이 판단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약점을 담당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입니다.

14장에서 나왔던,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아까 있었죠. 그 주인이 있지 않느냐? 주인이 그를 세울 수도 있고 그를 넘어뜨릴 수도 있다. 그 주인에게 세우시는 권능이 있지 않느냐?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권능이 있지 않느냐? 하느님에게 용서와 기적과 구원이 있지 않느냐? 네가 심판하지 마라. 하느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 옆에 너를 보낸 줄 알고 들어가 그 옆에 서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

 

(갈라6,4-5) 4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해 봅시다.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지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못됩니다. 5 각 사람은 자기 짐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자랑? 하느님의 세우심, 하느님의 고치심, 하느님의 베푸심을 위하여 서 있는 자, 보냄을 받은 자라는 걸 알게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교정하고 국외자가 되지 마시오 국외자(局外者). 그 상황과 현실의 밖에서 심사위원이 되거나 해설자가 되지 마시오. 그 중의 일원이 되시오. 한국 축구가 지거든 같이 우시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하면 국방색실로 꼬매버릴거야. 그게 신자가 현실에 대하여 가지는, 성경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모든 명령의 근본적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이 지금 뭘 어떻게 하시는가에 관한 이해, 그것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들먹여 나 편하게 하자는 것 밖에 할 수 없고, 옆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나 편하게 , 내 말 들어라.” 밖에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런 것 아니라는 것이죠. 에폐소서 5장에 가면 이 일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에페5,15-21)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16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17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18 술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19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20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 2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

 

성령 충만이 등장합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아라입니다. 술 취하는 것은 가장 불신앙적이고 악한 행위의 대명사 같고, 성령 충만은 가장 신앙적이고 가장, 가장 완전한 신앙의 대명사 같습니다. 그런 얘기 아닙니다.

여기 비교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문제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문제라는 것은 매일 오늘을 살아라이겁니다. 오늘은 어떤 날? 일상의 반복. 그것이 기본적인 무대입니다. 신자의 인생이든 불신자의 인생이든 먹고 살기에 바쁜 오늘, 그것이 오늘입니다. 그 오늘에 무슨 별일이 다 생기죠.

매일 생기면 못 견딥니다. 사회에도 일이 생기고 개인으로도 사고가 생기고 뜻밖의 행운도 생기고 하는 것이 오늘입니다. 오늘은 내가 준비하지 않고 하느님이 준비하고 나를 그리 보낸다는 뜻으로 오늘입니다.

어느 나라에 태어났느냐, 어떤 신분이냐, 어떤 입장이냐, 어떤 짐이 있느냐를 하느님이 정하여 보냅니다. 그거를 답답해서 이런 조건, 이런 정황, 이런 현실이 왜 일어났는가 때문에 시간만 흘려보내기 위한 것, 술 먹는 겁니다. 그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그거 하지 말라는 겁니다.

고민하라는 거죠. 고민해서 지혜를 얻고 답을 얻으라는 얘기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죽어나라는 거죠. ? 성령이 이끄신, 성령이 함께하여 너에게 요구한 자리다. 그게 성령 충만입니다.

대부분은 싫은 현실입니다. 억울한 현실입니다. 하느님이 거기 나를 보냅니다. 왜요? 여러 이웃과 묶이도록 보냅니다. 그 짐을 지도록. 대한민국에 쓸 만한 사람이 다 없어도 우리 하나 있으면 괜찮은 사람 되시오. 그물이 다 찢어져도 성한 그물코 열 개 있으면 내가 고래라도 잡는다.

소돔, 고모라 얘기 아닙니까? 의인 열명이 있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야 돼요. 그들이 있으면 그들을 인해서 봐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몇 군데만 성해도 그물 노릇 대강할 수 있습니다. 멸치는 못 잡아도 고래는 잡는다.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가 와 있는 자리를 좋게 판단하지 말고, 묶여있는 이웃, 짐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 억울해하지 마시오. 그게 하느님이 일하시려고 보낸 자리고 그렇게 묶으셨다는 걸 기억해서 그걸 감수(勘收)하는 겁니다.

어떻게요? 답이 없는 인생을 기다리는 거죠. 하느님이 무엇 하시나 보자! 그래야 됩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입니다.

정말 행복해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울면서 비명 지르면서 이 조건이, 이런 방식이 잘못됐거나 외면당해서 생긴 잘못된 길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고 있어야 되는데, 어느 형편, 어느 경우에도 하느님이 그의 은혜를 못 담는 경우는 없다. 이걸 기억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어려움이 있어요? 그 사람 없으면 안 되는 거에요. 벤허, 멧살라 없으면 벤허는 십 분 만에 끝난다는 것, 드라마를 담을 수 없다는 것,

예수는 죽지요. 원해서 죽지 않습니다. "아버지,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둬 주십시오." 진심어린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음의 자리를 원하셨고 순종(順從)하여 가십니다. 그 자리가 부활(復活)의 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우리의 결정, 우리의 능력, 우리의 이해가 모든 것을 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뭘 보았는데요? 예수 안에서 기적을 보았지요. 그 기적은 어디에 담기나요? 말 구유에 담기지요. 우리의 생애가, 형편이, 말구유보다야 낫겠지요. 아니 말구유만 하면 어때요? 예수를 담는데. 그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 안의 자랑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상대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헛된 것으로 치부되면 본인이 견디지를 못합니다. 감사가 어디서 나오며, 어디서 용서와 이해가 나오겠습니까? 겸손이나 봉사나 사랑은, 죽었다 깨도 인간이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꾸밀 수만 있습니다. 위선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만이 만드는 하느님의 은사입니다.

예수 안에서 그 구체성을 보았죠. 그랬으니 이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죠. 안 되면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안하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마음은 그렇게 깊고 넓지 않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그 속에서 순종을 하는 것이죠. 진심을 물어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 정말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 그건 진심이 아니고, 철딱서니가 없는 답이며, 무례한 답이란 말입니다. 알아들으시겠어요?

그럴 수 없는데 하는 것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그걸 하셨어. 우리가 받지 못할 걸 주셨어. 나는 그거 따라가는 중이야.’를 하란 말입니다 한 인생이 사는 생에 도움이 되고 고마운 사람은 몇 없습니다. 저는 딱 하나 있는데 죽었어요. 아브라함 링컨. 왜 그렇죠?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개인의 욕심은 바다보다 크고 한 인간의 변덕은 태풍보다 사납습니다. 누가 그의 도움이 되며 마음에 들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보았죠. 그 은혜를 입었죠. 그리고 그 명예를 알게 된 것입니다. 힘써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한다는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예수로 말미암아 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이 나를 묶는다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못 참으면 저 한강에 가서 고함 한번 지르고 오시오. 그렇게 가는 겁니다.

이 일에 대한 오해가 우리를 잡아먹습니다. 나는 왜 속이 편하지 않을까? 나는 왜 마음에 계속 딴 생각이 들까? 나는 왜 온전해지지 않을까? 라고 무흠한 사람이 되려고 자기를 닦고 또 닦느라고 살아내지를 못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오늘을 못 살고 끊임없이 때만 밀다가, 살아내는 일, 가까운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일, 감사하는 일, 격려하는 일, 따뜻하게 쳐다보는 일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음악회를 가면 음악회에 간 표정이 있죠. 우리는 잘난 사람들이야! 그거, 그 표정이 있잖아요. 설교를 들으러 오면 최소한 그거보다 표정이 나아야 될 거에요. 이게 무슨 표정이냐? 왜 이게 암담하거든요. 아닌 거 같고 틀린 거 같고 소원은 있고 그 둘이 분리되지 않아요. 그 길에 서 있어요.

기쁜 마음으로 와야죠. 같은 편끼리 만나는 자리,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인데, 같은 소망을 갖고 있는데, 고린도전서 2장 사도 바오로는 이 얘기를 이런 식으로 합니다.

(1코린2,1-5) 1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 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2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3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4 그리고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느님의 능력만이라 그러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라서 인간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만들어내려고 하느님이 나 보낸다는 것 알아서, 내가 설득하고 설명하고 감동시켜서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느님이 그거 하려고 나 보냈다는 거 알아서, 나 아무것도 안 들고 빈손으로 뛰어 들어 갈 수 있다. 난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가지고 들어간다. 그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삽니다.

아브라함은 뭐 하냐 하면, 고향 친척 아버지 집에서 나와서 왔다 갔다 하다 죽는 겁니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다.’ 그는 누구죠?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族屬)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기억하십시오.

와따리 가따리가 전부인 인생 아브라함. 하느님이 일하신다고요. 아브라함을 보고 은혜를 받는데 하느님이 은혜를 넣으실 거예요. 거기다가 아브라함은 왔다 갔다 하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아니 예수님이 보이신 것 같이 지는 것 같고 망한 것 같은 십자가의 길로 하느님의 은혜를 담으시겠대요. 얼마나 다행이에요.

어느 수준 이상이어야만 이 은사를 담을 수 있다라고 조건을 정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마음 놓고 사시오. 성시와 노래와 찬송과 감사와 화답과 복종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조건이 신적 지도 아래, 주도권에, 인류와 역사의 운명을 묶으신 능력에 붙들려 있다는 것 기억하는 그 인생이 되시오. 살아내는 기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아버지, 우리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하느님의 권능이며 신비며 능력이며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라 다시 확인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했으니 십자가의 길도 따라가고 자랑하고 찬송하는 영광이 있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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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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