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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6주일 나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11 조회수148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6주일 나해] 마르 1,40-45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간밤에 얼어서 / 손가락이 한 마디 /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나병환자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씨가 지은 <손가락 한마디>라는 시입니다. 뼈와 살이 썩어 문드러지다가 결국엔 떨어져나가는, 그렇게 날이 갈수록 점점 자기 본모습을 잃어버리고 참혹한 괴물처럼 변해가는 나병환자의 아픔을 담담하게 표현한 것이 오히려 더 가슴아프게 다가오지요. 이렇듯 나병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무서운 불치병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단 이 병에 한 번 걸리면 사회적으로 배척받고 고립된다는 점입니다. 유다인들은 질병을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결과로 받는 ‘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랬기에 나병과 같은 불치병에 걸리면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지요. ‘머리에 병이 들어서’, 즉 탐욕과 교만에 눈이 멀어 마음과 생각이 부정해져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결과로 ‘악성 피부병’이라는 큰 벌을 받은 것이므로 그는 사제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정한 사람’으로 선포됩니다. 그리고 그 부정함은 전염병처럼 사람 사이의 접촉을 통해 퍼진다고 여겨졌으므로,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등 눈에 보이는 표식으로 자신이 나병에 걸렸음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이들이 자신과 접촉하여 부정해지지 않도록 해야했으며,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성 밖에 있는 움막이나 동굴에서 홀로 외롭게 지내야 했습니다. 살아있지만 제대로 사는게 아닌,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비참한 처지가 바로 ‘나병환자’였던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런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 곁으로 다가갑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부정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선 안된다는 율법의 ‘금기’를 깰 정도로 나병이 낫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겁니다. 그 간절함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지요.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배수의 진’으로,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매달리는 것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상대방에게 청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이 저주받은 병에서 나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희망은 오직 예수님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나병환자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를 옭아매어 멸망에 이르게 하는 심각한 불치병들을 앓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찾을 생각, 그분께 매달릴 생각, 그분께 자신을 의탁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분들도 그러는 경우가 있지요.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지금 자기 상태가 어떤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총의 선물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궁금해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과 도구들로 충분히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는 은총의 선물들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알아야,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를 깨달아야, 주님께 다가갈 마음이, 그분 앞에 무릎 꿇을 용기가 생기는 것이지요.

 

자기 앞에 닥쳐올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간 그 나병환자는 그분께 이렇게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잘 모르는 상대방을 높여 부를 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가 진짜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부르는게 아니라, 그렇게 높여 불러주어 그의 기분을 좋게 해주면 자신이 그에게서 원하는걸 얻어내는데에 유리할 거라는 계산적인 판단으로 그러는 것이지요. 그 나병환자도 그런 심정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거기서 한술 더 떠서 ‘당신은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예수님이 지니신 놀라운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예수님의 능력을 ‘머리’로 믿는 이성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마음으로 느끼며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는 완전한 믿음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어렵사리 주님께 다가가 놓고서도 자신이 그분께 간절히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나병환자라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이 그의 마음을 주눅들게 만든겁니다.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냉대, 무시와 배척을 당하다보니, 누구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홀로 외로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예수님이 자기 병을 고쳐주고 싶어하실지 자신이 없어서, 흉측한 몰골의 부정한 존재인 자신을 불편해하시고 싫어하실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예수님께 원하는게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지요.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에게만은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시며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얼마나 받았길래, 마음 속에 담긴 간절한 바람조차 입 밖으로 꺼내는걸 두려워할까?’하는 생각에 마음 속에서 그를 측은하고 안쓰럽게 여기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당신 팔을 뻗어 상처로 가득한 그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다른 이들은 그에게서 질병과 부정함이 옮을까봐 그를 멀리 밀어내고 배척하려고만 했지만, 예수님 당신은 그의 슬픔과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계심을, 그의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당신 몸이 그에게 닿아 부정해지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음을 먼저 행동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따스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 당신께서도 그가 병에서 나아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바라신다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뜻을 분명히 밝히신 겁니다. 이는 슬픔과 아픔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그분께서 공통적으로 지니시는 마음입니다. 지금 내가 질병과 사고, 고통과 시련을 겪는건 주님께서 그러기를 바라셔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고자 하시는건 고통과 시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구원과 참된 행복이지요. 다만, 십자가 고통과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듯, 고된 훈련과 인내의 시간 없이는 승리의 영광이 없듯, 내가 그런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성장해야만 구원에, 하느님 나라에 한 발 더 가까워지기에 주님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고통과 시련을 겪는 우리를 곁에서 지켜보시는 겁니다. 그런 주님 마음을 이해하고 그분 사랑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 믿음의 힘으로 그분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지요.

 

그러나 그 나병환자는 그런 참된 신앙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얕은 믿음에 머무른 채, 그분을 ‘주님’으로 부르며 따르는 참된 믿음에는 이르지 못한 겁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불치병이 낫는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자신이 그분 ‘앞’에 서려는 교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널리 알리는게 그분께 더 이득이 될거라는 자기 생각과 뜻으로 섣부르게 판단하여 실행한 것이지요. 그런 그의 불순종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해야 할 예수님의 사명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를 나중에 알게된 그 나병환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순종이 바로 죄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교만에서 시작되어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강요하는 독단과 독선으로 심화되고, 결국엔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심어주신 은총과 말씀의 씨앗이 열매맺지 못하게 되지요. 예수님으로부터 불치병이 낫는 큰 은총을 입고도 참된 구원에는 이르지 못한 그 나병환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교만과 고집을 버리고 주님 뜻에 순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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