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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오 9, 14 - 15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15 조회수71 추천수3 반대(0) 신고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지고 뉘우친 마음이며 이를 위한 선행의 행위가 바로 단식입니다. 단식 행위는 경건한 신심 행위이기에 행위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약 성서 안에서의 단식은 수덕 실천의 기능보다는 애환 중에 하는 슬픔의 예식이나 참회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가 낳은 아들이 중병에 걸려서 단식하였고, 그 아이가 죽었을 때 단식을 중단하였습니다. (2사12,16~2참조)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다윗은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단식하고 운 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 아이가 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오.”(2사12,22)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단식은 참회 혹은 슬픔, 고통의 표시였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에도 단식은 이런 참회, 슬픔, 고통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속죄의 날일 경우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단식하였습니다.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 그에 따르는 슬픔을 표시하면서 이를 깊이 참회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단식이란 참회의 뜻도 있지만 그런 참회를 통하여 자기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동참의 뜻도 있습니다. 이런 정신이 확연히 드러난 성서가 바로 오늘 독서인 이사야의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58,6~7)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단식은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표시하는 참회의 뜻과 이를 사회적으로 확대하여 굶주린 이들과 진정으로 함께 하겠다는 동참과 나눔의 뜻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식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8,4)라며 질타합니다. 마침내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더욱더 단식의 의미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예수님은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리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성전에 들어와서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18,12)라고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기는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바리사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마태6,17)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6,18) 라고 촉구하신 그 이유가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다음 광야로 물러나 40일간 단식하시면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셨나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 있어서 단식과 참회는 비움이자 낮춤이며 자기 포기이며 연대와 동참의 표시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면서 당신의 몸과 마음의 빈자리에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으로 채웠고, 하느님의 뜻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세상에 나와서 삶에 지치고 고달프고 힘겨워하는 사람들과 연대와 친교를 나누는 표현으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가7,34)라고 비난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첨부하셨는데,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루7,35)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훗날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손가락질당했던 그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신들을 사랑하시어 부유하신 분이 가난해지셨으며,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게 되시어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잃고 난 뒤, 참으로 처절하고 애통하게 참회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사랑에 의한 단식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다음에 그들은 진정한 단식을 할 것이며, 자신들을 사랑했던 그 분의 그 사랑으로 그들 또한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단식한 까닭은 사랑의 기억과 자신들을 사랑했던 주님께 대한 사랑의 통회이며, 사랑에서 울어 난 참회의 표시로 단식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기억하기 위한,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에게 있어서 단식은 하나의 수단이었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유일무이한 참된 단식을 준비하셨는데 그 단식은 바로 십자가상에서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사랑의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의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며,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기 위해 참된 단식을 실행하셨습니다. 그 참되고 거룩한 죽음의 단식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보고 세리와 죄인들은 참으로 참회와 자선의 단식을 실행하였으며 그분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순절 기간 우리 또한 단식하며 예수님처럼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는 참된 단식을 실천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하고 질문을 던졌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왜 단식을 하였을까요? 그리고 오늘도 세상의 많은 사람은 왜 단식하는 걸까요? 이 모든 사람이 오늘 이사야의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단식하였으면 좋겠고,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부터 참된 단식을 실행하길 바랍니다. 

예전 세월호 특별법 입법 청원 행진이 진행되고 있을 때, 신문에 읽었던 죄를 지은 것은 정부와 정치권인데, 왜 유족들이 단식하고 아이들이 땡볕의 아스팔트를 걸어야 하는가, 라는 글귀가 아직도 생생하게 제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그 질문은 오래전 진도 팽목항을 순례할 때 제 마음에 떠 올랐던 의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단식해야만 했던가? 오늘은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로 단식과 금육을 지키는 날입니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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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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