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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17 조회수135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의 내용은 회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에 대표적인 대명사가 바로 회개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 사형수와 같은 사람이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선고와 동시에 집행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유예를 하신 것입니다. 보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 보류를 하신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예와 보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보류는 집행이 되긴 되는데 다만 시간만 연기됐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상황이 번복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예는 조건이 허용된 상황입니다. 조건이 충족되면 상황이 번복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 무엇이 될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회성 회개와 같은 회개가 아닙니다.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따르지 않는 회개와 같은 회개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했다고 다 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된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회개는 죄를 끊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어설픈 회개는 어쩌면 하나마나한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설픈 회개는 악의의 눈물과도 같은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는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한국 교회에만 있는 판공성사를 하게 됩니다. 만약 판공성사라는 제도 때문에 성사를 봤다면 우리는 이 성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를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진지하게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성사로서의 효력은 있을 겁니다. 효력은 있지만 그 효과가 어떤가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변수는 바로 회개가 이루어지는 그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제도 때문에 또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속성 때문에 해야 하는 상황, 혹은 마지못해 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한 성사와 그래도 그런 제도가 있어서 지키긴 지키되 철저히 그것도 나의 영혼을 지켜주는 안전장치처럼 생각해 철저히 이루어진다면 전자와 같은 성사보다는 이와 같은 성사의 효력이 더 강하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봤을 때 불을 보듯 뻔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 국한해서 그럼 회개를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죄로 나아가는 방향과 역행하려고 전환을 하는 시점이 회개의 첫 시작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이끌 수 있는 단초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환경도 중요합니다. 회개는 거룩한 환경에서 잘 이루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회개는 더러운 진흙과 같은 곳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불허의 명작인 죄와 벌, 물론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서 보듯이 소설의 주인공을 회개로 이끈 것은 바로 마음씨 착한 창녀였습니다. 죄와 벌 같은 것은 소설이긴 하지만 이건 단순히 일반 소설처럼 치부할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한 인간의 심리묘사를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렸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극찬을 해도 아깝지 않은 소설입니다.

 

저는 신앙인의 관점에서 이 창녀를 보며 평소 한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심판주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창녀를 보며 내 속에는 그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그걸 봐야합니다. 창녀를 통해 내가 어쩌면 바라보는 그 창녀보다도 더 더러운 창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창녀를 보고도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의 사고 속에 "너는 죄인, 나는 그래도 너보다는 좀 더 깨끗해" 하는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빠져 있게 된다면 이런 유형의 사람은 결단코 회개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죄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해 죄인과 방어벽을 쌓아서 마치 의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한다면 말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 영혼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하셨는지 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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