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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1주일 나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2-18 조회수163 추천수5 반대(0) 신고

[사순 제1주일 나해] 마르 1,12-15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이름이 꽤 알려진 중견 작가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뜬금 없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대뜸 그녀에게 “너는 뭐가 되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지요. 마흔을 훌쩍 넘은 중년의 딸에게, 어느 정도 자기 분야에서 자리를 잡은 자신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도무지 의도를 헤아리기 어려워 벙쪄있던 그녀의 눈을 응시하면서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물으십니다. “뭐가 되고 싶으냐?” 그러자 그녀는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답했지요. “저 지금 작가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혀를 끌끌 차시며 안됐다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에휴, 너는 꿈도 없냐?” 그 작가는 아버지의 이 말씀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래를 보지 않고, 마음 속에 품은 희망도 없이 그저 현재라는 시간을 버텨내듯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삶은 하루 하루를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궁극적인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더욱 그런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매 순간을 닥치는대로 넘기기에 급급하지 말고, 쉽고 편안한 삶을 쫓으려고만 애쓰지 말고,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마음 속에 품은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라는 척박한 땅으로 내보내시는 것도 그런 참된 희망을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광야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입니다. 하지만 그런 곳이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세상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뜨겁게 만나는 은총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극한의 환경에서 자연스레 하느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지요. 비록 모든 자유가 제한된 노예 신분이었어도 양식이나 지낼 곳 같은 기본적인 것들은 보장되었던 이집트에서는, 고기처럼 좋은 건 못 먹더라도 적어도 빵만큼은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익숙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인도에 따라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그곳을 벗어나자,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끼며 그분을 따르는 백성으로 점차 변화되어 가지요. 광야는 편안함보다 불편함에, 생명보다 죽음에,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힘들고 괴로운 곳이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그 고통과 시련 때문에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나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깊이 체험하게 되며, 그 체험이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여 신앙적으로 한 단계 성숙해지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셨듯 성령의 이끄심에 순명하여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어려서부터 고생은 사서라도 시키듯,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광야로 내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러시는 의도와 의미를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광야 체험’을 통해 자신의 부족하고 약한 부분을 성찰하고, 뾰족하게 모난 부분을 순명이라는 정으로 조금씩 깎아 나가다보면, 광야가 내 삶에 갖는 진정한 의미를, 나를 광야로 보내신 하느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겁니다.

 

하지만 그런 광야의 의미를 생각한다고 해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청하라고 하셨을 정도로 악의 세력은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심각한 ‘걸림돌’인데, 그 걸림돌을 예수님 앞에서 치워주시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탄이 그분을 마음껏 유혹하도록 방치하시는 듯한 모습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겁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의 답 또한 주님의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저희 앞에서 유혹을 없애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청하는 것은 유혹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 있지요. 길을 걷다 마주하게 되는 똑같은 돌이라도 부주의함과 안일함으로 그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지만, 늘 깨어있는 자세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을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도와주는 ‘디딤돌’이 되는 것처럼, 유혹 또한 우리가 영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에라 모르겠다’하고 그것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과 함께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의 신앙으로,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운 곳으로 이끄는 이정표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도 유혹에 당당히 맞서십니다. 무려 4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유혹에 당당히 맞서고 그것을 극복하는 훈련을 하심으로써, 당신 앞에 놓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힘과 용기를 얻으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그리고 우리를 아무 대책 없이 유혹 속에 방치하시는 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로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당신 목숨을 위협하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여기서 ‘들짐승’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의 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위협을 상징하는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된, 욕망과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고자 하는 죄스럽고 악한 성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광야에 들짐승만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 함께 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애쓰는 이들을 이끌고 지켜 주지요. 그러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간계와 들짐승들의 위협을 천사들의 기도와 보살핌 속에 극복하셨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과 함께, 또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이 힘들고 고된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 가운데서 주님 뜻대로 사는 ‘광야살이’가 참으로 고되고 어렵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이 광야 한 가운데서도 참된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을 샅샅이 성찰하고 낱낱이 파헤치는 ‘수사’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 자기 허물과 잘못에 절망하며 ‘난 결국 이거밖에 안되는구나’라고 자책하는 ‘자기비하’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뒤를 향하고 살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눈, 코, 입, 귀 같은 우리 감각기관들이 모두 앞을 향해 있는 것은 허물 많은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갈 희망찬 미래를 지향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부족했던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면 됩니다. 알 수 없는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면 됩니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그분 뜻을 철저히 따르며 매일의 시간을 착실히 살다보면, 그분과 함께 누릴 영원한 행복이,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을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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